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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아시아=황성운 기자] 누가 뭐래도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말이 참 어울리는 배우다. 류승범은 영화 ‘베를린’ 이후 홀연히 떠났다. 뚜렷한 거처도 없이 프랑스 파리에서 시간을 보냈고, 삶의 태도와 사고가 바뀌었다. 말 한마디를 내뱉는 순간에도 생각의 시간에 잠기는 모습이다.
그가 다시 국내 대중을 찾은 건 영화 ‘나의 절친 악당들’ 때문. 물론 영화 홍보를 마친 후 다시 한국을 떠날 테지만. 류승범은 영화에서도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어내는 괴짜 지누를 연기했다. 판타지 기운이 가득한 영화 속 캐릭터임에도 지누는 곧 류승범처럼 보였다. 맞다. 류승범도, 지누도 ‘자유로운 영혼’이다.
Q. 행복해 보인다. 영화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 같다. 류승범 : 유니크하다는 것, 그 점이 개인적으로 마음에 든다. 또 하나는 어느 캐릭터도 관심이 안 가는 게 없다는 점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청춘영화를 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Q. 류승범과 임상수 감독이 만나면 어떤 느낌이 나올지 궁금했다. 영화를 보고 나니 서로의 장점이 잘 묻어난 것 같다. 류승범 : 진짜 너무 좋았다. 내가 출연했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와 감독님의 ‘눈물’이 비슷한 시기 개봉했다. 독립영화였던 두 작품이 당시 언론에서 비교도 많이 되곤 했다. 그때부터 임상수 감독님에 대해 관심을 두게 됐고, 그 이후 영화를 보면서 감독님의 세계가 궁금해졌다. 또 언제쯤 감독님과 연이 될까 했는데 이번에 만나게 됐다. (참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2000년 7월 15일 개봉, ‘눈물’은 2001년 1월 20일 개봉됐다. 그리고 제38회 대종상 시상식에서 류승범은 신인배우상을, 임상수 감독은 신인감독상을 차지했다.)
Q. 이번 작품은 ‘하녀’ ‘돈의 맛’ 등 임상수 감독의 전작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류승범 : 신뢰라는 것은 어떤 것을 해도 믿음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작은 이랬는데, 이번 작품은 이래’라고 말한다면 그건 신뢰하지 않는 게 아닐까. 의심이라는 게 들어가는 거니까. 그동안 작품을 봐오면서 신뢰를 하는 거다.
Q. 왜 이 작품을 선택한 건가. 류승범 : 작품을 고를 때 어떤 한 가지 요소가 도드라지는 것보다 두루두루 보는 것 같다. 이 작품은 임상수 감독님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호기심도 있었고, 캐릭터도 많이 배울 게 있다고 생각했다. 청춘 영화를 찍어보고 싶었고, 글 안에 숨은 뜻이 어떤 뜻인지 찍으면서 알고 싶기도 했다. 뭔가 유니크한 느낌도 있었고.
Q. 그 숨은 뜻을 알게 됐나. 류승범 : 글쎄. 알았다는 표현은 위험한 것 같다. 감독님의 시선이 더욱 궁금해진 것 같다.
Q. 전작에서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가 많았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의미나 메시지를 찾으려는 것 같긴 하다. 류승범 : 다 안다고 할 순 없지만, 심플하게 하는 것 같다. 돌려서 의미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의미가 없으면 정말 없을 수 있는, 꼬임이 없는 심플함일 수도 있다. 의미는 글쎄.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 그게 중요한 것 같다. 어떤 뜻일까 생각하는 게 나한테는 또 하나의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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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준희가 앞서 캐스팅됐다고 들었다. 사실 잘 어울릴까 싶었는데, 기대 이상이었다. 류승범 : 사실 준희와는 ‘인류멸망 보고서’에서 만난 적 있다. 뭐랄까 좋은 기운이었다. 시나리오 보면서 준희를 생각했을 때 기대도 됐고, 이 역할을 어떻게 해낼까 지켜보고 싶기도 했다. 현장에서 너무 편하게 잘 지냈다.
Q. 캐릭터를 봤을 때 류승범은 늘 잘해왔던 그런 이미지라면, 고준희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모습이다. 그래서 끌고 가야 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 같다. 류승범 : 고준희라는 배우의 새로운 발견이다. 그전에도 좋은 친구, 배우였지만, 영화를 보고 사랑스러웠다. 쉽지 않은 일을 해냈는데, 동료로서 축하해주고 싶다. 또 고준희가 그 캐릭터의 매력을 십분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또 좋은 선배님들에게 배운 것 중에 하나가 진심으로 같이 나누고 만들어야 한다는 거다. 감독 또는 배우 한 사람이 주도하게 되면 다른 것을 놓치고 갈 수 있다. 그래서 좋은 팀워크는 같이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모든 배우가 빛나는 게 아닌가 싶다. 이번 영화는 그런 부분에서도 좋았다.
Q. 호흡은 잘 맞았나. 류승범 : 연기할 때가 아닌 시간은 고민하고, 생각하고, 준비하는 시간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들이 특별하진 않다. 이번 작품 역시 끊임없이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볼 수밖에 없게 되고, 준희와 대화하고. 그럴수록 얻어질 수 있는 게 많다. 그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고민하면서 해온 게 아닌가 싶다.
Q. 지난 언론시사회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수용하고, 의견을 나누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류승범 : 말의 뉘앙스가 다르게 전달된 것 같다. 모든 의견을 거절했다는 게 아니라 어떤 사람의 의견을 깊숙하게 존중하려는 태도가 부족했다는 거다. 이로 인해 나 자신이 부끄럽다는 걸 알게 됐고, 내 소리보다 다른 소리에 대해 인정하고 노력한다는 각오를 말씀드렸던 것 같다. 대중에게 솔직하게 고백을 한 거다.
Q. 영화 속 지누를 보면서 류승범과 참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원래 이런 느낌을 참 잘 살렸던 배우’라는 생각도 들었다. 류승범 : 그건 다른 분의 생각이니까. 대중 배우로서 그 부분은 인정해야 한다. 그 마음의 준비는 돼 있다. 그리고 배우 개인적으로는 항상 새롭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울타리가 다른 것 같다고 표현하고 싶다.
Q. 류승범이 본 지누는 어떤 사람인가. 류승범 : 시나리오를 보자마자 ‘이런 친구가 있으면 친구 하자고 프러포즈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지닌 태도나 성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뭔가 닮고 싶고, 배우고 싶다. 성숙한 남자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 면들이 너무 좋았다.
Q. 근데 정확한 직업은 무엇인가. 인턴인 건 알겠는데, 직업 자체가 모호하다. 류승범 :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그걸 파고들진 않았다. 그 친구가 어떤 직장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않았다.
Q. 연기할 때 본인과 캐릭터 성향이 비슷한 게 편한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류승범 :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없고, 다른 느낌이다. 정장을 입었을 때와 편한 옷을 입었을 때를 생각하면 된다. 배우니까 둘 다 흥미로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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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일상에서도 사색을 즐기나 보다. 그리고 말투나 톤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류승범 : 개인적인 시간이 많아지니까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그리고 말을 할 때 신경을 쓰면서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말을 할 때 좋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소리의 양, 높낮이, 톤 등 어떻게 하면 듣기 좋을까를 노력하고 있다. 아무래도 프랑스 사람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조심스럽게 얘기하는 태도 등을 배웠고, 좋다고 생각하는 건 실천하고 싶다.
Q. 어떤 계기가 있는 건가. 류승범 : 어떤 시기라고 말하긴 어렵다. 사는 환경, 만나는 사람, 먹고 보고 마시는 것들이 모두 달라지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 그 생활에 적응하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여전히 적응하는 중이다. 그리고 언어들이 거칠어지는 것 같다. 최근 프랑스 언론사 테러 때 그곳에 있었는데 소리, 말, 글이라는 걸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한석규 선배님, 최민식 선배님 등 좋은 선배님과 동료 배우를 통해 많이 배우는 것 같다. 진심으로. 그러면서 나도 좋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좋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항상 좋은 사람인 것 같다.
Q. 그렇게 생각이 바뀌면서 작품을 보는 시선도 달라졌을 것 같다. 류승범 : 변화하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그리고 영화의 본질을 알게 된 게 있다. 어느 날 문득 영화를 보고 있다가, 음악을 듣고 있다가 깨닫게 됐는데 내가 50년대 음악을 듣고, 30년대 영화를 보고 있는 거다. 그래서 영원히 기록된다는 생각을 문득 했고, 그러면서 무책임해질 수 없었다. 영화 선정하는데도 달라지더라.
Q. 인터뷰에서 ‘생각’이라는 단어와 함께 ‘개인적으로’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한다. 류승범 : 그런 성향이 있나 보다. ‘이것이다’가 아니라 ‘내 생각은 이렇다’라고 말하는 거다.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좋다.
Q. 그런데 때로는 뭔가를 확실하게 결정할 필요도 있지 않나. 류승범 : 프랑스에 있을 때 충격에 빠진 적이 있다. ‘왜 나는 항상 결정하려고 하는가’였다. ‘이렇다, 저렇다’를 구별하려고 하더라. 물론 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있지만, 항상 여지를 두고 싶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서 알 수 있는 것도 있지 않나. 그래서 ‘블랙 or 화이트’로 결정하기보다 흘러가 보는 게 편한 것 같다.
Q. ‘나의 절친 악당들’ 활동이 끝나고 나면. 류승범 : 또 간다.
Q. 정확히 프랑스 어디에서 지내는 건가. 류승범 : 없다. 여기저기 지낸다. 아직은 제 인생에 있어 여행 중이다.
Q. 그런데 류승범은 대중 배우다. 대중에게 잊히거나 멀어진다는 걱정은 하지 않나. 류승범 :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면서 나 스스로가 싸워서 승리하고 싶은 게 있는데 바로 두려움이다. 어떤 두려움이건 그것과 싸워서 승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래서 순간순간 두려움과 싸울 때 이기는 편으로 나를 보내는 것 같다. 두려움이 올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한다.
Q. 지금 말하는 것만 들었을 때는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을 것 같다. 류승범 : 쉴 땐 또 일하고 싶다. 그런 밸런스가 맞아 돌아간다. 불평불만이 별로 없다. 싫은 일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일만 한다. 어제와 오늘이 별로 다르지 않다. 너바나(해탈, 열반)가 아닌 이상 감정을 가지고 있으므로 화도 나고, 짜증도 난다. 그런데 항상 중요한 건 어떤 선택을 하는 순간 나한테 물어본다. 화나는 쪽으로 선택하지 말고, 잊어버리는 쪽으로 생각하라고. 나 스스로가 친구고, 나 자신을 보살피고 있다. 그래서 나한테 많은 것을 주고 싶다.
Q. 올 하반기 계획은 있나. 류승범 : 여행 중일 것 같다. 문명이 안 닿는 곳, 생경한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유일하게 돈 쓰는 게 그거다. 돈 쓰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