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기
“너라고 부를게”를 외치며 누나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은 이승기를 사람들은 연예계 ‘엄친아’라 부른다. 가수활동을 하며 쌓은 반듯한 이미지와 그와 대조되는 의외의 ‘허당’ 면모를 예능에서 발휘하며 시너지를 얻었다. 어디에 던져놔도 종국엔 제몫을 해내는 ‘짐꾼’ 캐릭터임은 ‘꽃보다 누나’를 통해 증명해 내기도 했다. 그렇게 대중을 실망시킨 적 없는 이승기가 선택한 첫 영화는 박진표 감독의 ‘오늘의 연애’다. 여자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만 100일도 못 가 차이고 마는 준수는 아마도 이승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캐릭터 일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너무 안전한 선택이 아니냐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통해 좋은 결과를 끌어내는 것도 사실 쉽지 않다. 아니,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Q. 영화가 오늘 개봉(14일)했다. 잠은 잘 잤나.
이승기: 못 잤다. 예민한 성격이 아닌데, 주위에서 영화 예매율을 캡처해서 보내고 하니까, 괜히 심리적으로 긴장이 됐다. 결국 밤을 꼴딱 샜다. Q. 이런, 어제 생일 아니었나.
이승기: 맞다. 생일을 하마터면 응급실에서 보낼 뻔 했다. 사실 지금 음반 녹음중이다. 밤에 녹음실에 가보려고 했는데 도저히 힘들어서 못가겠더라. 올해 내가 욕조를 딱 두 번 썼다. tvN ‘삼시세끼’ 수수 베고 와서 한 번,(일동 웃음) 그리고 어제 한 번. 뜨거운 물을 싫어해서 웬만하면 욕조를 안 쓰는데, 심리적 압박감에 힘들었는지 어제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Q. 음반도 발매하면 판매량을 볼 텐데, 그것과 비교해서 영화 예매율을 살피는 건 어떤 느낌인가.
이승기: 지금은 가요시장의 음반 판매량이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음원 순위를 살피는데, 그마저도 롱런하기가 쉽지 않다. 음악 주기가 워낙 빠르게 회전하니 말이다. 1집을 냈을 때는 ‘몇 장이 팔렸나’ 정말 매일매일 들여다봤었다. 그래서 영화는 예매율을 어디가야 확인할 수 있는지 일부러 안 물어봤다. 알면 들어가서 계속 ‘새로 고침’ 누르고 있을 것 ‘뻔’하거든. 지금 설레어하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일단 예매율이 1위라고 해서 한 숨 놨다.
Q. 일찍이 데뷔를 해서 10년 넘게 ‘숫자로 결과가 판가름 나는’ 나름 냉정한 경쟁의 바닥에 있는 건데, 이렇게 20대를 보내게 될 줄 알았나.
이승기: 그래서 ‘인생은 산 넘어 산’이라는 말이 참 와 닿는다. 사실 참 많은 목표를 이뤄 왔다고 생각한다. 중간엔 ‘이걸 성공시키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을 거야’ 희망을 품었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뤄도 달라지는 게 없을 때가 많았다. 가령 tvN ‘꽃보다 누나’때 첫 시청률이 10%를 돌파했다. 당시 10%는 케이블 꿈의 시청룔이었다. ‘10%를 넘기면 세상이 바뀔 거야, 그러면 내 존재감도 더 높아질 거야’ 기대했는데 돌아오는 반응은 “이승기 너무 답답하다!”였다.(일동 웃음) 기대는 기대일 뿐이고, 나를 꾸준히 증명해야 하는 구나를 절실히 느꼈다. Q. 인생이 원래 그런 거다. 별 생각 안 했는데 반응이 크게 올 때가 있고, 뭔가를 크게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반응이 심심할 때가 있다.
이승기: 진짜 그런 것 같다. 의도한다고 해서 되는 건 없다. 오히려 옛날 전성기 때, 그러니까 ‘예능’과 ‘드라마’와 ‘가수’를 트리플로 할 땐 생각 이상으로 나를 높게 평가해 주셨다. 작은 거 하나에도 ‘이승기 대단하다’고 해줬고 나름의 성과를 찬양해 줬다. 반면 실제로 무언가를 정말 이뤘는데 반응이 없다. 그게 참 재미있는 것 같다.
Q. 방금 전성기라고 했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전성기의 기준은 뭐가.
이승기: 가장 ‘핫’ 할 때. 태양이 떠오를 때 이글이글 가장 뜨거워 보이지 않나. 그때가 전성기인 것 같다
Q. 그럼 지금은 어디에 있는 건가. 떠 있는 상태?
이승기: 음… 떠 있다가 2시 정도로 넘어간 상태? 내 입으로 전성기가 지났다고 말하기 그렇긴 한데, 2시가 오래가길 바라고 있는 그런 상태다.
승기: 내 성격 때문인 것 같다. 나 자신에 대해 가급적 냉정하게 평가하려고 하는 편이다.
Q.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냉정한 편이가.
이승기: 진짜 아끼는 사람에게는 냉정하다. 그런데 저희 회사도 그렇고 이선희 선생님도 나에게 그러신다. 아끼는 제자가 헛된 희망에 부푸는 걸 원치 않으셔서인지, 비수 꽂히는 말들을 종종 하신다.
Q. 진심을 가지고 얘기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다. ‘오늘의 연애’에서도 준수(이승기)가 진짜 조언을 하는 순간, 그녀(문채원)가 돌아서 버리지 않나.
이승기: 그게 조언하는 사람의 아픔이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놈 매 한 대 더 때린다’는 말. 예전에는 그 뜻을 이해 못했는데, 나에게도 아끼는 후배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 그 말에 담긴 의미를 알게 됐다. Q. 당시엔 기분 나빴는데, 뒤늦게 뒤돌아보니 ‘나에게 도움이 됐구나’ 싶은 조언이 있나.
이승기: 굉장히 많다. 나를 강하게 키우고 싶어 하는 회사로부터 상처받는 말을 늘~!(웃음) 드라마 ‘찬란한 유산’ 시청률이 40%를 넘었을 때 예능 ‘1박 2일’도 잘 돼서 내가 살짝 취해 있었다. 내 딴에는 겸손하다고 했는데 그 겸손을 뚫고 나오는 자신감이 나를 아끼는 사람들 눈에는 보인 거다. 어느 날 밤 사장님이 날 부르시더니 그러시더라. “나는 시청률 40%가 넘어가면 이승기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더 ‘핫’ 하고 멋있는 배우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별 반응이 없다. 가령 이 정도면 휴대폰 광고도 찍고 해야 하는데, 냉정하게 말해서 비슷한 또래가 성공했을 때보다 그렇게 뜨거운 것 같지는 않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상당히 당황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멍 했다. 당시엔 또 어리니까 ‘그만 하라는 건가?’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런 뜻으로 한 말씀이 아닌데 말이다.
Q. 자존감으로 사는 스타가 가장 아파할 수 있는 부분을 정곡으로 찌르셨구나.이
승기: 그러니까. 그 말을 듣고 ‘맞다. 내가 소위 스타들의 산물이라고 하는 핸드폰·통신·커피 이런 광고를 찍은 것도 아니고, 아직 증명해야 할 게 많구나. 취해있을 때가 아니 구나’하는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때 그 조언이 정말 중요한 시기에 큰 도움이 됐다. 돌이켜보면 사장님도 큰 모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잘 되고 있는 연예인에게 그렇게 얘기하면 자칫 엇나갈 수 있거든. 그럼에도 나를 진짜 아꼈기 때문에 건넨 말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항상 감사하다.
Q. 영화 ‘오늘의 연애’ 얘기를 해보자. 브라운관 스타가 스크린으로 넘어오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 같다. 기존 이미지를 최대한 활용하거나, 변신을 시도하거나. 당신은 엄밀히 말하면 전자다. 10년간 지니고 싶은 이미지에서 탈피해 보고 싶은, 그러니까 모험을 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텐데.
이승기: 사실 나는 둘 다 상관없다는 주의다. 이미지도 이미지지만,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그리고 일단 ‘변신을 위한 변신은 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확실하게 가지고 있다. 몇 년 전에도 그런 이야기가 나오긴 했다. 이승기도 이젠 조금 남자다운 걸 보여줘야 하지 않나 하는 얘기들. 그래서 한동안 그런 캐릭터만 봤다. 멋있는 걸 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선택한 것이 ‘더킹 투하츠’였다. ‘구가의 서’도 남성적인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한 거고. ‘너희들은 포위됐다’도 어떻게 보면 그 연장선이었다. 그런데 대중은 이승기가 이미지를 변신했다고 봐주지 않았다. 드라마 ‘더킹 투하츠’ ‘구가의 서’, ‘너희들은 포위됐다’ 모두 진지한 정극이다. 진짜 로코는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밖에 없는데, 이전 이미지가 워낙 강하게 박혀 있어서 그런지 달달한 이미지로만 바라봤다. 그때 경험에서 ‘의도한다고 해서 내가 남자처럼 보이는 건 아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예능 속 의도치 않은 장면에서 “네가 그렇게 하니까 남자처럼 보어더라” 라는 말을 들었다.
Q. 방금 ‘더킹 투하츠’ ‘구가의 서’가 진지한 정극이라고 했는데, 개인적인 생각은 다르다. 넓은 범위에서는 로맨스라고 보거든. 로맨스 안에 다른 장르를 품었기에 시청자 입장에서는 당신이 의도한 바가 안 보이지 않았나 싶다. ‘미생’처럼 로맨스가 거세된 작품들이 아니라, 남녀 주인공의 케미가 중요한 드라마들이었으니까.
이승기: 아…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런데 또 로코라고 하기엔 너무 진지하고. ‘정통’ 로코라고 하는 건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 하나였고, 이번 ‘오늘의 연애’가 두 번째다. 그래서 마음껏 해 보고 싶었다. 유쾌한 모습을 한껏 보여주고 싶었다. Q. 박진표 감독님이 ‘썸’을 통해 오늘날의 연애에 다가가고 싶었다고 했다. ‘썸’타는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이승기: 긍정적으로 안 본다. 나는 사랑에 대한 판타지가 중요한 사람이다. 사실 대중문화예술 전반적으로 가장 오래된 주제가 사랑 아닌가. 그걸로 다 예술을 하고 있는데, ‘썸’이라고 하며 사랑이 가볍게 퇴색되는 느낌이라 별로 안 좋아한다. 그리고 내가 실제로 ‘썸’을 탄다면, 진짜 사랑이 왔을 때 무뎌져 있을 것 같다. ‘썸’이라는 게 결과적으로 봤을 때 여러 명을 만나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인 건데, 그런 과정을 거치다보면 진짜 사랑이 왔을 때 상대의 단점을 찾으며 다른 연애의 기회를 엿보게 될 것 같다.
Q. 짚고 넘어가고 싶은 건, ‘오늘의 연애’에서 두 남녀의 관계는 엄밀히 말해 ‘썸’은 아니다.이
승기: 동의한다. ‘썸’이라는 장치를 쓴 것일 뿐.
Q. 준수가 근무하는 초등학교가 실제 당신의 모교라고 들었다.
이승기: 깜짝 놀랐다. 촬영 날 “학교 어디에요?” 물어보니까 내가 나온 학교더라. 가보니, 아는 선생님이 한 분 계셨다. 내가 졸업한지 20년이 돼 가는데, 진짜 오래 계신 거다. 기분이 묘했다. ‘교실이 이렇게 작았었나’ 싶기도 했고.
Q. 초등학생 이승기는 어땠나.
이승기: 아주 말썽꾸러기였던 걸로 기억한다. 구기 종목을 좋아했는데, 덕분에 유리창을 참 많이 깨 먹었다. 당시 유리 한 장에 3,000-4,000원 정도 했나? 엄마가 매일 깨진 창문 값을 갚기 위해 학교에 오시곤 했다. 반성문도 많이 썼는데, 그로 인해 글 실력이 늘었다. ‘죄송합니다’ 한 마디로 반성문을 다 채우긴 힘들거든.(웃음)
Q. 극 중 준수네 반 학생이 이런 말을 한다. “샘! ‘건축학개론’ 보셨어요? 그럼 샘 여친도 그 ‘썅년’이에요?”라고. 그래서 묻는 질문. 남자들에게 있어, 실패한 과거의 여자는 모두 ‘썅년’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인가.
이승기: 하하하. 상황과 강도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배신감을 줬다면…(잠시 생각)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르는데 주변 친구들의 경험으로 봤을 때 남자들 기억엔 ‘추억’보다 ‘쌍년’ 쪽이 아닌가 싶다.(일동 폭소) 남자는 단순하다. 그 여자가 자신에게 왜 그랬나보다는, “나에게 상처를 줬어!” “나, 아팠어!” 그게 더 크다.
Q. 그럼 반대로 상처를 준 여자는 어떻게 기억하나. 남자들은.
이승기: 그건 끝까지 미안함으로 남지. 정말 끝까지.
Q. 당신은 여자의 마음을 안다고 생각하나.
이승기: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돌이켜 보면 잘 안 게 아닌 경우가 많았다.(웃음) 남과 여는 결국 화법의 차이로 부딪치는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영화에서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첫 키스를 한 후다. 왜, 현우(문채원)가 그러잖아. “어때? 18년 만에 나와 키스하니까 떨렸어? 난 하나도 안 떨렸는데”라고. 나는 그게 전형적인 여자의 화법이라고 생각한다. Q. 어떤 면에서?
이승기: 여자는 사랑받고 싶은 존재다. 남자가 먼저 사랑한다 말해줬으면 좋겠는 거지. 그런데 소심한 준수는 그걸 자존심의 상처로 받아들여서 “야, 나도 안 떨렸어!” 그런다. 굉장히 유치한 건데, 그런 것들에서 남녀의 어긋남이 생기지 않나 싶다. 젊은 친구들이 그런 부분에서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Q. 당신이라면, 현우의 마음을 캐치 했을까.
이승기: 50프로 정도는?(웃음) 그런데 나도 자존심이 있어서 “그래?”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준수처럼 “나도 안 떨려” 이러지는 않을 것 같다.
Q. 드라마 ‘찬란한 유산’에서는 문채원이 당신을 짝사랑하는 역할이었는데, 이번엔 입장이 바뀌었다. 이걸 연애로 확대해서 보면, 연애가 결국은 타이밍이란 생각이 든다. 한쪽이 먼저 달아오르거나, 먼저 식거나 하는 것들. 이런 타이밍의 어긋남에서 ‘사랑의 묘’가 생기지 않나 싶은데, 사랑은 도대체 뭘까?
이승기: 사랑의 정의? 사랑은 정의가 없지 않을까. 사랑은 느껴지는 것 그대로인 것 같다.
Q. 구체적으로 그게, 무슨 의미인가.
이승기: 계산하지 않아도 마음이 간다는 게 느껴지는 게 아닐까. 뭔가 하려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미친 듯이 마음이 가는 그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기꺼이 희생해 줄 수 있는 어떤 마음. 그게 사랑이 아닐까 싶다.
Q. 그나저나 진짜 ‘연애의 끝’은 뭘까. 감정이라는 게 무 자르듯 확 끝나는 게 아니지 않나. 한 쪽에 연인이 생기면 연애가 진짜 끝나는 걸까.
이승기: 그게 아닐 수도 있다고 본다. 새로운 연인이 생겼는데, 이전 연애와 비교해서 오히려 더 사랑이 싹 틀 수도 있으니까. 내 생각엔, 상대와 연락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완전히 다 끊어났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때 진짜 연애도 끝나지 않을까 싶다.
Q. 마지막으로 이 시대 ‘연애 숙맥’들에게 조언을 한마디 하자면.
이승기: 과감하게 던져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생각하고 주저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건 아니니까. 상대에 대한 진정성만 있다면, 던져라! 설령 차일지라도. 그러고 나면 그 뒤에 뭔가가 생긴다. 상대가 후회해서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말이다.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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