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15년을 넘긴, 인생의 절반 가까운 시간을 배우로 살아와 꽤 많은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김흥수에게도 최근작 MBC 월화드라마 ‘야경꾼일지’는 특별하게 남아 있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그간의 선하고 수더분한 마스크를 벗고, 온갖 격정을 담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의 새로운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준 이 작품은 김흥수 스스로도 아직 잘 몰랐던 또 다른 자신을 꺼내게 해준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산군을 정리하는 그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도 개운치 못한 표정이 대답과 함께 떠올랐다. 그것은 혼신의 힘을 다 했으나 아직은 새로운 자신에 낯설어 했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 때문이리라. 지금 이 순간 스스로에게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이 배우는 어쩌면 더욱 강렬하게 폭발할 수 있는 자신의 또 다른 터닝포인트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Q. ‘야경꾼일지’를 최근에 마쳤다. 이 작품은 어떤 의미로 남아 있나.
김흥수 : 아직 감정적으로 많이 남아있는 작품이다. 아쉽고 또 굉장히 힘들었던 작품이었다. 매번 긴장 속에 촬영에 임했고, 정상인이 아닌 캐릭터를 연기하다보니 체력소모도 많았다.

Q. 기산군은 지켜보는 것도 힘들 지경이었다. 거의 매번 정신분열을 겪는 신이 등장했으니, 심적으로 고단했던 연기였을 것이라 짐작했다.
김흥수 : 웃는 신, 화내는 신, 울거나 겁먹는 신, 술에 취한 신, 비열하거나 치졸한 신 등 노멀한 신이 없었다. 한 회에 8번 등장한다고 하면 모든 신이 그랬다. 거의 모든 신이 파안대소, 박장대소인 적도 있었다. 체력적으로 힘들더라. 웃는 것이 체력소모가 크다. 수염 때문에 음식을 씹어먹기 불편해 프로틴 쉐이크를 먹으며 버텼다. 또 내가 촬영한 시간대가 주로 오전 5시부터 준비를 해서 8시나 9시에 슛 들어가는 스케줄이었는데, 아침부터 웃으니까 힘들더라(웃음). 그러니 연기하며 리듬을 탔다가도 다시 엇박이 나더라. 스스로에게는 힘들었던 작품이라 아쉬움도 큰 듯 하다.

Q. 그나마 마지막 회가 가장 정상적인 신이었다. 그 신을 연기할 때는 기산군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을 것 같다.
김흥수 : 감정의 베이스들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는 역할이 아니라 한 신에서 힘있게 보여줘야 하는 인물이라 그랬다. 하지만 나는 엔딩에 만족한다. 마지막 만큼은 기산군이 화해를 청하고 훈훈하게 떠날 수 있어 좋았다. 그동안 형으로서 못할 짓을 많이 했는데 마지막 만큼은 따듯하고 또 외롭지 않은 기산군이었기에, 그 신 마저 없었다면 동생과의 훈훈한 장면은 단 한 장면도 없었을 것이다.

Q. 실제 인간 김흥수의 심리에 그런 복잡한 기산군이 영향을 미치지는 않던가.
김흥수 : 이상하게 이번에는 그게 오더라. 나는 원래 일과 내 개인이 연결이 되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것이 내게 오더라. 독특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그동안은 주로 착하고 따듯한 역할들만 해서 이런 기분을 못느낀 것이 아닐까. 이번엔 실제 겁도 많아지는 것 같고, 생각도 많아지고 그랬다.

Q. 참, 그러보고니 기산군에서 벗어나 오래 기른 수염도 밀었다.
김흥수 : 수염을 며칠 전에 깎았다. 1년 넘게 기르다가 자르니까 망둥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이상하다. 내 얼굴이 아닌 것 같고 어색하다. 아직 거울을 보면 낯설다.


Q. ‘야경꾼일지’는 24부작으로 긴 여정이었던 터라 대부분의 배우들이 체력적으로 힘들었다고 토로하더라. 그 중에서도 기산군의 에너지 소모는 컸을 것이고. 그런 힘든 현장을 견디게 하는 힘은 결국 동료로부터 오는데 기산군은 정일우, 고성희, 정윤호 등 젊은 배우들과 부딪히는 신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더 고독한 현장은 아니었을까.

김흥수 :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대기실에서 만나면 ‘어, 힘들지, 힘내’ 하는 정도였지. 그나마 정윤호 씨와는 자주 마주쳤기에 그의 고민을 듣고 내가 어드바이스를 해준 적은 있었으나, 일우 씨와 성희 씨와는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하지만 나는 김성오 선배, 이재용 선배님과 거의 촬영을 같이 했고 또 무엇보다 이번 작품을 통해 얻은 사람은 윤태영 선배다. 정말 대단한 배우였다.

Q. 어떤 점에서? 물론, 좋은 배우이지만 어떤 점에서 이렇게까지 후배를 매료시켰는지 궁금해진다(웃음).
김흥수 : 젊은 배우들끼리 뭉치게끔 자리를 마련해주시고 단체 대화방도 만들어주시는 등, 어른으로서의 배려가 대단했고. 연기적으로 멘붕(멘탈붕괴)이 온 초반, 태영 형과의 6시간에 걸친 긴 대화 끝에 힘을 받았다. 이번에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 했으나 결과에 대한 만족도가 그리 높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최선의 노력을 했기에 후회는 없다. 그래도 초반에 힘들어했던 적이 있었고, 그것을 스태프를 통해 전해들은 형이 연락이 와서 달환 형, 태영 형과 나, 셋이서 커피를 시켜놓고 밤 12시에 만나 새벽 6시까지 대화를 했다. 남자 셋이 앉으면 여자 이야기라도 나올 법한데 정말 오로지 배우로서의 삶, 작품에 대한 이야기만 나눴다. 배우로서 롤모델처럼 여겨지는 분이다. ‘열심히’라는 개념 자체를 바꿔주셨다. ‘열심히’ 위에 ‘처절히’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 분이지.

Q. 의외다. ‘엄친아’라는 타이틀 탓에 그 배우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것이 사실인데 말이다.
김흥수 : 나 역시 그런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그 선입견에 강렬한 반전을 선사해주더라. 형의 그 열정을 언젠가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형의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듣는 나 역시 안주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 겠다 싶을 정도다. 열정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배우다.

Q. 그렇게 후배를 자극시키다니 현장에서 리더로서의 역할을 해준 것 같다.
김흥수 : 그렇다. 리더 중의 리더였다. 그분이 없었다면 지금쯤 나는 안드로메다에 있었을 지도 모른다. 감사하다. 지금은 가끔 무턱대고 전화해 위안을 받는 멘토가 됐다.

Q. 그렇게 ‘야경꾼일지’ 그리고 멘토 윤태영을 통해 당신이 생각하게 된 배우라는 존재에 대한 새로운 개념정리를 한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김흥수 : 자기 싸움에서 지지 않고 또 타협하지 않는 이가 배우인 것 같다. 모든 업종에서 대단한 사람이 되려면 타협하지 않아야 하고, 또 그 싸움에서 지지 않으려면 강인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런 삶이 연기에 묻어 나와야 되고. 동시에 자기 삶도 충실히 살아 연기에서 따듯함이 느껴져야 좋은 배우가 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Q. ‘야경꾼일지’에서의 당신은 그런 배우였다고 생각하나.

김흥수 : 아직 멀었다. 이번에는 마치 놀이터에 갔는데 맘껏 놀지 못한 기분이다. 내 스스로 만든 틀 안에서만 놀았던 것 같다. 더 넓은 놀이터였는데 말이지. 더 맘껏 더 하고 싶은대로 해봤으면 했는데, 스스로 자기 싸움에서 겁먹고 심리적으로 타협한 부분들이 있다.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스스로 오케이를 내버리는 모습도 후회된다. 더 붙들고 늘어졌어야 했다. 하, 지나간 것은 늘 아쉬움 투성이지만, 이번에는 내 스스로 50점 이상을 줄 수 없다.

Q. 하지만 확실히 기산군으로의 변신은 당신에게 중요한 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김흥수 :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했으나 노력한 과정이 있기에 주변에서는 좋게 봐주신 것 같다. 내 연기 자체는 성장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위안 삼고 있다.

Q. 차기작(KBS2 일일드라마 ‘달콤한 비밀’)에서는 기산군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김흥수 : 귀여운 시크남이다. 사실 쉬지 못하고 들어가 불안한 마음도 있다.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면 마음을 재정비하고 기산군의 여운도 다 정리했을텐데 급하게 들어가게 ?다. 하지만 최선을 다 할 것이다.

Q. 촬영은 들어갔나.
김흥수 : 실은 좋지 않은 컨디션 속에 첫 촬영에 임해 아쉽다. 하지만 5개월의 긴 여정은 시작됐고, 의욕은 충만하다. 목표는 이번 작품을 통해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해지는 것이다. 그동안 너무 예민하게 지냈지만 이번 캐릭터는 여유있고 당당한 이라, 심약의 아이콘, 기산군에서 벗어나보겠다.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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