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혹시 ‘몬스터’와 ‘황제를 위하여’, 두 작품을 비슷한 시기에 선택했나. 장르나 캐릭터는 다르지만, 연이어 피를 보는 인물이다. 또 표면적으론 비슷한 느낌도 있고. 그래서 비슷한 시기에 뭔가에 꽂힌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민기가 매서워졌다. 눈빛엔 살기가 이글거린다. 사람 한두 명 죽이는 건 예삿일이다. ‘몬스터’에서도, ‘황제를 위하여’에서도 마찬가지다. ‘해운대’ ‘퀵’ ‘오싹한 연애’ ‘연애의 온도’ 등 최근 그의 출연작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강렬함을 연이어 뿜어내고 있다. 귀여운 모습으로 수많은 여성의 마음을 훔쳤던 그가 이제는 남자들의 마음마저 훔칠 요량이다. 그만큼 멋진 남자로 돌아왔다.
사실 ‘몬스터’에서 맡았던 냉혈한 살인마 태수는 대중의 공감을 사기엔 다소 어려운 캐릭터였다. 반면 ‘황제를 위하여’의 이환은 다르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욕망의 끝을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이환의 모습에서 얼핏 우리 자신을 볼 수도 있다. 욕망, 누구한테나 있는 존재 아니던가. 욕망의 끝은 허망하다. 이환은 그 허망함을 알면서도 뛰어드는, 마치 불을 보고 달려드는 부나방 같다. 이민기, 그는 이환을 통해 어떤 욕망을 그렸을까.
이민기 : ‘몬스터’ 촬영 중에 ‘황제를 위하여’ 시나리오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특별히 꽂혔다기보다 작품과 인연이 됐던 것 같다. 매번 장르 변화를 주고 싶었는데, ‘연애의 온도’ 이후 스릴러 장르인 ‘몬스터’를 했고, 스릴러 하다가 누아르 장르를 받게 된 거다. 그래서 큰 고민은 없었다.
Q. 캐릭터만 봤을 땐 잔인하고, 강렬한 느낌은 분명 비슷하다. 살기 가득한 눈빛도 그렇고.
이민기 : 큰 카테고리로 봤을 때 강한 역이란 건 비슷하다. 여기에서 구체적으로 나누면, ‘몬스터’ 태수란 인물은 비인간적인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크게 공감하거나 몰입될 수 없는 감정을 쓴다. 차가운 감정에 가까운데 한 번씩 폭발적인 광기나 살기가 나오는 인물이다. ‘황제를 위하여’ 이환은 욕망을 향해가고, 욕망에 차 있는 사람이다. 감정을 표현하는 게 다르다. 또 이환의 표정에서는 욕망도 보이지만, 아련함이나 허망함 등이 있다. 그런 복합적인 감정들이 인간적으로 공유,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Q. 두 작품에서 모두 눈에 살기가 이글거리지 않나. 가까운 시기에 연속 2편 그런 작품을 하다 보니 전과 달리 이민기란 배우가 조금은 무섭게 느껴졌다.
이민기 : 그런 생각은 안 해봤다. 만약 다른 작품에서 그런 모습이 비친다면 문제인데, 그게 아니라면 큰 상관이 없다. 평소에 내가 칼 들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Q. 뭔가 귀여운 매력에 스스로 싫증 난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다.
이민기 : 물론 변화는 계속 하고 싶었다. 캐릭터 자체로서는 크게 변화할 게 많지 않다. 그래서 장르의 변화를 고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변화의 폭이 큰 작품을 갑자기 하게 된 거다. 예를 들어, ‘연애의 온도’를 하다가 냉혈한 형사 같은 역을 한 다음에 ‘몬스터’를 했으면 변화의 보폭이 작을 텐데, 은행원에서 갑자기 살인마로 가니까 그 폭이 컸던 것 같다. 그래서 좋았던 면도 많다. 작품에 더 몰입할 수 있기도 했다. 여느 배우도 그렇겠지만, 비슷한 작품을 연이어 하는 건 너무 힘들다. 계속 변화한다는 건 좋은 거다.
Q. 필모그래피를 보면, 나이에 비해 출연 작품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이민기 : 20대 초중반에는 정말 쉬지 않고 계속 했고, 영화를 한 다음에는 그래도 여유로운 편이다. 영화 작업 자체가 캐스팅됐다고 해서 바로 촬영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서 오히려 내 호흡은 느려졌다. 분명 또래 누구보다 필모는 많은 것 같다. 아무래도 걸러내는 게 덜한 것도 있다. 일단 변화에 대해서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은 하겠지만, 겁은 내지 않는다. 배우를 선택했으면, 해야 하는 거니까. 그게 내 색깔인 것 같기도 하다.
Q. 걸러내는 게 덜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작품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가.
이민기 : 다분히 주관적이지만, 그래도 일단 좋은 책이 우선이다. 그리고 감독님이든, 제작사든 좋은 사람이다. 영화라는 게 혼자 하는 게 아니므로 좋은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도 중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었으면 좋겠다.
Q. 이번 작품은 그런 조건에 딱 맞아떨어져서 선택한 건가.
이민기 :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지는 작품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아주 긍정적인 게 많았다. 대화가 통화는 사람과 작업하게 됐고, 누아르지만 그 안에 다른 지점들이 있고, 스타일리시한 면도 있다. 내놨을 때 새로운 지점이 있는, 덜 식상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었다.
Q. 이번에 맡은 역할이 이환이다. 어릴 때 아버지가 죽었다곤 하지만, 야구선수로 잘 나가던 사람이다. 또 부상이 있었다곤 하지만, 승부조작을 완벽하게 할 정도로 여전히 실력이 녹슬지 않았고. 그렇다면 과연 이환은 어디서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을까.
이민기 : 태생이 꼬인 아이다. 2군에 있지만, 1군에 있고 싶으니까 불법 게임을 해서라도 1군에 들어간다. 목적이 뭐든 항상 그런 선택을 하는 아이다. 초고에선 안 그랬다. 초고에는 누아르 장르에 규격화된 느낌이었다. 야구만 인생이 목표로 살던 아이가 피할 수 없는 이유로 불법게임에 연루되고, 결국 야구를 못하게 되고 폭력 세계에 들어오는.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할 이야기가 욕망에 강한 이야기면 애초부터 꼬인 아이로 가자고 얘기를 했다. 그러면 똑같은 누아르 구조지만, 다른 감성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Q. 이환과 차연수(이태임)의 관계도 묘하다. 첫눈에 빠지는 것 같은데 그게 곧 절절한 사랑처럼 보이진 않았다. 후반부로 갈수록 둘의 관계는 더 알 수 없게 된다. 사랑인지, 아닌지.
이민기 : 그건 의도였다. 두 사람의 사이를 ‘멜로’라고 정해놓고 싶지 않았다. 누아르 장르에서 공식처럼 볼 수 있는 멜로 라인이 있다. 한 여자와의 사랑으로 결국 파국에 이르게 되는 그런 거 말이다. 그런 식상한 설정은 하지 말자고 했다. 또 편집 과정에서 빠진 것도 있는데 사실 첫 만남이 대교 위에서다. 여하튼 첫 시작은 사랑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데 점점 애매하게 보인다. 아마 이환은 그게 사랑일지언정 사랑으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자조차 내가 소유해야 할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연수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라는 건 각자 인생에서 어울리지 않는 거다. 환이 연수를 잡으러 가지만, 바라만 보고 오는 게 결과를 알았기 때문이다. 욕망의 끝이 허망하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연수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거다. 어느 한쪽이라도 치유를 한다면 만나는 건데 그게 아니니까.
Q. 대중들이 봤을 땐 두 사람의 관계가 쉽게 와 닿진 않을 것 같다.
이민기 :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으니까 그런 것 같다. 욕망이면 욕망, 사랑이면 사랑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은 결국 허망함을 이야기하는데, 환과 연수의 관계도 그런 결말을 주고자 했던 것 같다. 뜨겁게 불태웠지만, 욕망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을 나눴지만, 그 또한 실체가 없는 느낌말이다.
Q. 두 번의 베드신이 나오는데, 처음과 두 번째 베드신의 느낌이 다르다. 그 역시 이 같은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 건가.
이민기 : 그렇다. 극 흐름상 감정을 깨트리는 베드신이 되면 안 됐고, 따로 분리해서 보는 시선이 생기면 안 됐다. 원래 환과 연수가 두 번째로 베드신을 할 때 한득(김종구)과 상하(박성웅)가 작두(정흥채) 패거리한테 당한다. 그걸 교차로 편집하는 거였다. 한쪽에선 전투를, 한쪽에선 전투 같은 욕망을 분출하는 식으로. 그런데 그게 편집 과정에서 나뉘게 됐다. 그거 빼곤 의도했던 감정이다.
Q. 베드신이란 게 아무래도 여배우에게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매번 물어보면 남자배우들도 고충이 있더라. 이런 진득한 베드신은 처음인 걸로 기억하는데 가장 힘들었던 점은 무엇인가. 뭔가 마음가짐도 있었을 거고.
이민기 : 여배우의 감성상태나 컨디션이 중요한 신이다. 배려를 많이 한다고 하는데 여성 감정이 워낙 섬세하니까. 오히려 나는 힘들고 긴장할 여력이 없었다. 이 신이 해내야 할 몫이 있다. 그 몫을 가장 효과적으로 뽑아낼 수 있는 현장을 만들려고 다 같이 신중하게 노력했다. 카메라, 조명, 색감, 배우들 동선 등을 선명하게 작업하려고 했던 것 같다. 사실 그랬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는데 요즘 좀 생긴다. 기사들이 자극적으로 나가다 보니까.
Q. 이태임과 호흡은 어땠나.
이민기 : 많이 풀어주려고 노력했다. 긴장하면 안 되니까. 물론 그럼에도 긴장을 안 할 수 없다. 그래서 촬영에 더 집중하는 환경을 만들려고 했다. 이것은 연기고, 일이란 분위기를 만드는 게 여배우로서 부담이 덜 할 것 같았다. 실제 남녀의 정사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면 얼마나 부담되겠나. 이보다 장면을 만들어가는 배우 대 배우로서 임할 수 있게 만들었다.
Q. 절절한 멜로 속 베드신 찍을 때와 전혀 다른 느낌이긴 하겠다.
이민기 : 그렇다. 목적이 다른 거니까.
Q. 기존에는 여배우와 앙상블이 많았다. 물론 이번에도 이태임과 앙상블도 있지만, 사실 그보다 박성웅과 호흡이 더 중요한 작품이다. 쉽게 말해 ‘남남’ 호흡을 맞추게 된 건데 뭔가 좀 다른 게 있나.
이민기 : 사람 욕심이 끝도 없는 게 여자와 할 때는 남자가 그립고, 남자랑 할 때는 여자와 하고 싶다. 남자라서 좋은 점은 스스럼이 없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끝나고 하루의 피로를 소주로 풀 수 있다는 것. 지금 연달아 두 작품 남자랑 하고 있다. 분명 좋은데 다음 작품은 어떤 배우와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여배우가 그립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본질적으로 남자랑 할 때 즐거움과 여자랑 할 때 즐거움은 다르다. 그동안 여배우와 같이해서 못 느꼈던 건데, 지금 촬영 중인 ‘내 심장을 쏴라’를 하면서 느끼고 있다. 여배우가 현장에 오면 분위기가 너무 달라진다.
Q. 영화 속 이민기와 박성웅, 즉 이환과 상하는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민기 : 이환은 어떤 환경이나 계기로 변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욕심 많은 사람이 있고, 낙천적인 사람도 있다. 그런 타고 나는 게 있는데 이환은 욕망을 타고 난 사람이다.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안전한 길과 그렇지 않은 길이 있을 때 후자를 선택하는 게 이환이다. 그런 관점에서 상하는 처음에는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어느 순간 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는 거다. 상하가 뭘 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다. 또 상하와 이환은 서로 다른 황제를 꿈꾸는데 상하는 현재 황제인 한득 이후를 생각하고, 이환은 기다리지 않고 기회가 왔을 때 잡으려고 하는 거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아이인 거다.
Q. 궁금했던 게 상하를 대하는 이환의 마음이다. 처음에는 분명 동경하고, 믿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뒤로 갈수록 애매해진다. 배신할 것만 같았는데 결국 그건 아니더라.
이민기 : 어떻게 보면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다. 보통 아버지와 아들은 별로 안 친하지 않나. 그런 느낌의 감정선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너무나 동경하고, 내가 인정하는 사람인데, 어떻게 보면 그 뒤를 따라야 하는 게 맞는데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는 거다. 상하도 분명 과거에 환과 같은 순간이 있었을 거다. 그때 안전한 길을 택한 상하는 과거의 자신을 생각하면서 ‘숟가락 쥐어주겠다’고 하는 거다. 너무나 닮아 있지만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른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 아닐까 싶다.
Q. 마지막에 상하와 이환의 과거 인연이 드러난다. 무슨 의도인지 알겠으나 굳이 필요했을까 싶다. (참고, 극 중 상하는 이환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어린 이환을 만나게 된다.)
이민기 : 영화 자체가 야구로 치면 직구다. 변화구를 던진 게 없는데 그 신만 유독 그런 느낌이다. 나 역시 처음에는 꼭 필요했을까 생각했는데 상하가 환을 왜 그렇게까지 생각하는지에 대한 일말의 친절함일 수 있다.
Q. 액션에도 꽤 공을 들인 것 같다. 이런 액션은 처음인 것 같은데. 그리고 많이 때리기도 하고, 많이 맞기도 하고. 남다른 소감이 있을 것 같다.
이민기 : 그에 대한 특별한 감흥은 없다. 일단 물리적으로 긴 시간이 든다는 것 정도. 감정 쓰는 건 터트리고 보이면 끝인데 액션은 긴 시간을 써야 한다. 모텔 액션신은 인원도 많이 나오고, 너무 오래 찍기도 했다. 또 작두와 액션신도 36시간을 무박으로 찍었다. 걸으면서 사람이 잘 수 있다는 걸 처음 봤다. 아르바이트 식으로 처음 영화 현장에 온 친군데 하필 그날 온 거다. 그 친구가 걸으면서 잤더라. 그리고 그 신 이후로 안 보였다.
Q. 36시간을 무박으로 찍다 보면 위험한 순간도 있었을 것 같다.
이민기 : 다행인 건 작두와 맞붙는 신에선 둘 만 집중하면 큰 사고는 나지 않는다. 만약 모텔 액션신에서 그랬으면 부상이 생겼을 수도 있다. 그런 사고 없어서 다행이다.
Q. 영화 시작과 함께 모텔 액션신과 베드신이 겹치게 등장한다. 좀 놀라긴 했는데, 그 의도는 무엇인가.
이민기 : 두 글자로 ‘욕망’인 것 같다. 우리 영화 ‘이런 영화입니다’라고 도장 쾅 찍고 시작하는 느낌이다. 어차피 설명을 잘 안 한다. 그래도 이 영화의 길잡이가 있어야 하지 않나. 그래서 선택한 방식이 아닐까 싶다. 관객들이 놀랐다고 하더라.
Q. 지금 ‘내 심장을 쏴라’ 촬영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영화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 부탁한다.
이민기 : 순수한 열정을 지닌 25살 소년이다. 지금 3분의 1 정도 촬영했다. 성장영화일 수도 있고, 어른들을 위한 동화일 수도 있다. 그리고 청소년을 위한 길라잡이 같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어두운 면이 많은 영화이기도 한데, 쓰는 에너지는 굉장히 긍정적인 에너지다. 또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꿈과 희망, 자신의 인생을 위해 맞선다는 이야기다. 주위에서 흔히 보고 듣게 되는 것이지만, 그런 걸 이 영화만의 전달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원작에 아주 좋은 대사들이 있는데 대본에는 없어서 넣자고 감독과 이야기 중인 것도 있다. 그런 이야기를 25살 청년 입장에서 보여줄 수 있다는 게 좋은 것 같아서 뜻깊게 생각하고 있다.
Q. 근데 여진구하고 그렇게 닮았나. 솔직히 잘 모르겠던데.
이민기 : 엄청나게 닮았다. 잃어버린 동생인 것 같았다. 실제로 보면 느낌이 있다. 진구도 종종 그런 이야기 들었다고 하더라.
글. 황성운 jabongdo@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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