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승원은 “니마이와 산마이를 오갈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고 했다. 가부키의 배역 구분에서 비롯된 단어인 전형적인 미남 니마이메(二枚目)와 익살스러운 광대 산마이메(三枚目)를 아우르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배우상이다. 생각은 말에 그치지 않는다. 차승원은 자신의 생각을 실제로 실천하며 산다. 스무 편에 가까운 그의 필모그래피가 이를 증명한다. ‘신라의 달밤’ ‘광복절특사’ ‘이장과 군수’ 등에서의 차승원은 자신의 조각 같은 외모를 일그러뜨리는 방법으로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갔다. 반면 ‘혈의 누’ ‘시크릿’ ‘아테나 전쟁의 여신’ ‘최고의 사랑’ 등에서의 차승원은 타고난 모델 DNA를 작정하고 스크린에 투척한다. 액션과 멜로와 느와르와 코미디를 이물감 없이 아우르는 배우. 극과 극의 상반된 캐릭터를 오가면서 그는 충무로의 든든한 허리로 안착했다.

‘하이힐’은 고정된 이미지에 얽매이기를 거부하는 차승원이 선택한 영화다. 그리고 도전을 즐겨온 그에게도 조금은 의미가 남다른 작품이다. 영화에서 그는 강인한 육체 안에 섬세한 여성성을 숨긴 캐릭터를 연기했다. 윤지욱이라는 이름의 그 남자, 아니 여자는 눈빛만으로도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장악해야 하는 인물이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희화화되기 쉬운 인물을 차승원은 미묘하고 섬세하게 조율해 생동감있는 인물로 빚어냈다. ‘하이힐’을 통해 차승원의 필모그래피는 보다 풍부해지고 깊어졌다. 앞으로 ‘하이힐’은 차승원이란 배우를 논하는 자리에 빠지지 않고 호출될 것이다.

Q. 많이 바쁘다고 들었다.
차승원: 이번 주는 그나마 괜찮다. 지난주에는 사흘 밤을 홀딱 샐 정도로 바빴다. 새벽 1시에 끝날 줄 알았던 드라마 촬영이 새벽 5시까지 이어졌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KBS ‘해피투게더’ 녹화였다. 녹화 끝나고는 또 부산 스케줄이 있어서 새벽에 곧장 부산으로 달려야 했다. 더 공교롭게도 그 날이 ‘하이힐’ 언론시사회였고. 정말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던 것 같다.

Q. 정신 없는 와중에 감상한 완성된 ‘하이힐’은 어떻던가.
차승원: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않았나 싶다. 양날의 검이라고 해야 하나.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는 모습을 섬세하고 표현해내고 싶었는데, 구상했던 것들은 잘 표현된 것 같다.

Q. 장진 감독 특성상, 유희적으로 비틀 수 있는 장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유머를 누른 흔적이 엿보였다. 시나리오 상에서도 그랬나.
차승원: 처음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안하겠다고 했다. 일단 주인공이 말이 너무 많았다. 그게 싫었다.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 아닌가. 대사를 최대한도로 줄여 달라고 했다. ‘할 말만 하자!’ 그래서 상징적인 것들 빼고는 대사를 많이 걷어냈다. 주인공이 희화화 되는 것도 피하고 싶었는데, 다행히 그런 것들이 잘 조율된 것 같다.

Q.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 형사. 배우로서 한번 도전해 보고 싶은 캐릭터였을 게다.
차승원: 지욱의 겉모습을 표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기존 차승원이 가지고 있는 남성성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 반대의 지점, 여성적인 부분에 대한 고민이 컸다. 장진 감독도 차승원 안의 여성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제안을 했을 텐데, 그걸 내가 얼마나 잘 표현해 낼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그렇다고 성향이 그런 건 아니니까 이상한 쪽으로는 몰지는 말고. 하하하.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라고 해서 교태를 부린다거나 하는, 속된 말로 후지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았다. 관객들이 자연스럽게 ‘저 사람 여자 같은데?’ 라고 느꼈으면 했다.

Q. 소위 웰 메이드라고 평가받았던 퀴어영화를 뒤돌아보자. 멀리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키아누 리브스, ‘브로크백 마운틴’의 히스 레저/제이크 질렐한, 가깝게 ‘로드무비’의 황정민, ‘번지점프를 하다’의 이병헌 등 의외로 선 굵은 배우들이 퀴어영화에 많이 도전해 왔다. 그런 걸 보면 감독들이 남성적인 배우를 비틀어보고 싶은 욕망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배우 또한 그런 감독 밑에서 변신해 보고 싶은 욕망이 있는 테고.
차승원: 배우가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들이 분명 있다. 그런 면에서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섬세한 결을 유니크하게 표현해 내고 싶었다. 그런 부분에 있어 최고는 ‘패왕별희’의 장국영이 아닌가싶다.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좋아하는 배우인데, 그의 연기를 보면 뭐랄까. 미묘한 분위기를 표현함에 있어 굉장히 섬세하다. ‘아이다호’의 리버 피닉스도 그렇고. 그들은 눈으로 연기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Q. ‘하이힐’에서의 당신 눈빛도 인상적이었다. 계속 젖어 있었다.
차승원:
그런가? 누가 계속 찌르고 있었나? 하하하. 의식해서 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런 것들은 아주 자연스럽게 나와야 하는 거고. 한때의 나는 테크니컬 한 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계산된 연기, 내비게이션 같은 연기를 선호했었다. 그런데 이 영화는 그렇게 접근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렇게 할 영화가 있고 안 할 영화가 있는데, 사실 너무 안 해도 성의가 없어 보이긴 한다. 그러면 매번 똑같아 보이니까. ‘하이힐’의 경우 테크니컬한 면을 걷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캐릭터 자체가 워낙 강하니까, 최대한 과장하지 않게 표현하려고 했다.

Q. 참고한 영화나 자료가 있나.
차승원:
‘뷰티풀 복서’라는 태국영화 한편을 봤다. 킥복싱계의 스타로 인기를 누리다 성전환 수술을 받고 여자의 삶을 선택한 실존인물의 삶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극중 주인공이 엄마와 대화하는 장면이 있는데 아들과 엄마가 아니라, 딸과 엄마가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보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인물을 표현해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Q. 인간은 누구나 양가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그걸 얼마나 체감하며 살아가느냐의 문제일 뿐.
차승원:
맞다.단지 사회라는 벽,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규격화된 규범에 맞춰 사느라 숨기거나 잊고 살 뿐이다. 장진 감독님이 ‘택시드리벌’이라는 연극 초연할 때의 일화가 생각난다. 장진 감독님 아버님이 실제 택시기사셨는데, 대본을 본 장진 감독 어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넌 아버지를 잘못 알고 있는 거다. 아버지가 얼마나 섬세한 분인지 넌 모르고 있다”고. 나는 남자 안에도 여자가 존재하고, 여자 안에도 남자가 존재한다고 믿는다. 배우는 그걸 발췌해서 쓰는 사람인 거고. 어떤 배우가 횡성한우도령처럼 우악스럽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감성이 없는 건 아닌 거다. 그런 것들에 대해서 요즘 많이 생각한다. 내 안에 누가 사는지, 진짜 내 성격이 뭔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기도 하다. 사실 모르는 게 낫고.


Q. 모르는 게 낫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차승원:
너무 잘 알면 연기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될 것 같다. 모르는 상태에서 튀어나오는 감정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갈 테니까. 연기라는 것이 누군가를 속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럴듯하게 속이기 위해서는 진심이 있어야 한다. 그건 기술적으로는 안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배우는 99% 타고 나는 것 같다. 그 유명한 알파치노도 그런 얘기를 했다. “배우의 유전자는 조금 다른 유전자 같다”고.

Q. 차승원의 배우 유전자는 어떤가. 타고난 것 같나.
차승원:
음… 모르겠다. 탤런트 적 기질은 다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진짜 모르겠다. 아직도 그 부분은 퀘스천이다. 계속 찾아나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앞으로 내 감정의 폭이 얼마나 더 넓어질지는 모르겠는데 깊은 울림이 있는 연기를 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한다. 캐릭터를 통해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그게 내 욕심이다.

Q. 과거의 당신은 멋을 일부러 망가뜨리는 방법으로 대중에게 다가왔다. ‘신라의 달밤’ ‘광복절특사’ ‘이장과 군수’ 등 초반에 코미디에 집중한 것은, 당신 외모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분산시키고 싶은 마음이었나? 아니면 스스로의 연기에 대한 검증이 필요했던 건다.
차승원:
나는 희극을 굉장히 사랑하는 사람이다. 단순 희극을 좋아한다기보다 블랙코미디가 바탕에 깔린 작품이 좋다. 굉장히 웃긴 장면인데, 이상하게 슬픈 그런 거. 그런 틀어지는 연기가 좋다. 희극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 중 하나가 장소 상황 구분 없이 시도 때도 없이 웃기려고 하는 것이다. 웃음이라는 것은 적재적소에 정확하게 들어갔을 때 즐거운 것이지, 자칫 잘못하면 우스꽝스러워지기 십상이다. 그래서 코미디 연기가 어려운 거고. 개인적으로 희극을 못하는 남자 배우는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트와 유머가 없는 남자는 배우로서 치명타가 아닌가 싶다.

Q. 위트와 유머, 그걸 잘 구사하는 남자가 매력 있어 보이긴 하지.
차승원:
내겐 위트와 유머가 돈보다도 중요하다. 그건 남자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극은 희극같이, 희극은 정극까지 하자’는 주위다. 일본연극을 보면 ‘니마이’ 배우와 ‘삼마이’ 배우가 있다. ‘니마이’ 배우는 항상 멋있는 연기를 한다. ‘삼마이’ 배우는 그 반대이고. 그런데 또 ‘니뗀고마이’라는 배우가 있다. 2.5배우쯤 되는데, 이 배우는 ‘니마이’와 ‘삼마이’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고간다. 그런 배우가 나는 좋다.


Q. 그런 배우가 되기 위해, 여자가 되기 싶은 남자를 연기하며 어떤 부분에 특히 신경 썼나.
차승원:
어렵고도 간단한 문제다. 호르몬 주사를 맞는 장면에서 지욱의 거대한 팔이 드러난다. 그런데 아래를 보면 다리를 다소곳이 오므리고 있다. 몸은 남자인데, 자세는 여자인 거다. 그런 디테일들, 비주얼적인 것보다도 행동들을 통해 여성스러움이 묻어나도록 신경 썼다. 분장으로 여성스러움을 드러내는 것에는 애초에 큰 기대를 안 했다.

Q.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하긴 했을 것 같다. 제대로 된 여장을 하고, 처음 거울을 봤을 때 솔직히 어땠나. 극중 스스로의 모습을 보며, “예쁘다”라고 대사를 하는데.
차승원:
그 대사를 내가 그렇게 빼자고 빼자고 했는데, 장진 감독이 계속 해 보라고 해서, 참. 하하하. 여장 분장은 그냥 재미있었다. 하이힐 신는 거나, 걷는 모습은 내가 여자 모델들을 많이 봐와서 그런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Q. 모델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신은 배우로 성공한 1세대 모델로 꼽힌다. 최근…
차승원:
(끼어들며)자꾸 세대, 세대 하지 마~! (일동 웃음) 다들 ‘1세대 차승원 소지섭, 2세대 강동원 조인성, 3세대 누구누구, 마지막 세대 김우빈 안재현, 이러는데 그런 구분들은 안 좋다고 본다. 내가 묵으면 묵을수록 좋은 된장도 아니고 말이야. 아직 현역으로서 내 몫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그런 표현은 지양해야 한다고 본다.

Q. 아, 그럼 표현을 바로 바꿔서 당신은 많은 모델들의 ‘로.망.인.데~’
차승원:
그래~ 그런 거 좋잖아~(일동 폭소)

Q. 당신이 연기를 시작할 때만 해도 모델 출신 배우를 그리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오히려 모델이 배우가 되는 등용문으로 여겨지는 분위기다.
차승원:
드라마 ‘너희들은 포위됐다’에서 재현이와 함께 하며 많이 느낀다. 이 친구가 연기적인 테크닉에서는 아직 부족한 게 많다. 그런데 재현이를 바라보는 우리 감독님이나 카메라 감독님의 시선은 나 때랑은 완전히 다르다. 애정이 듬뿍 있다. 일단 잘하는 것만 시킨다. 어색할 것 같으면 애초에 시키지도 않는다. 그런데 나 때는 어색해도 대본에 있으면 무조건 해야 했다. ‘대본에 나와 있는데 왜 못해!’ 이런 분위기였다. 그러다보니, 더 못해 보일 수밖에 없었고. 그런데 지금은 모델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달라졌으니, 이 친구들이 힘을 더 얻는 것 같다.

Q. 당신은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생각하나? 개인적인 생각에는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정말로 오래도록 기억되는 자는 어떤 길을 개척한 사람…
차승원:
(기어들며)개.척.자, 이런 것도 하지 마~! (일동 웃음) 내가 무슨 구한말에 들어온 선교자도 아니고, 황무지에서 유전을 발견한 사람도 아니고. 하하하하. 아무튼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은 하나다. 후배들 눈에 ‘저 선배는 아직도 끊임없이 뭔가를 하고 있구나. 뭔가 다른 것들을 계속 개척…’ 아이구야~(일동 폭소) 미안해, 미안해~ 이놈의 입이 문제야. 하하하.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구.축.해 나가고 있구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일단 그런 친구들은 애틋하다. 정말로 잘 됐으면 좋겠고, 누군가의 연기를 따라 하기보다는 자신들만의 색으로 연기 했으면 좋겠다.

Q. ‘최고의 사랑’이 끝나고 많은 러브콜이 있었을 텐데, 일본 연극 ‘나에게 불의 전차를’을 선택했다.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인가.
차승원:
그건 그냥 훌쩍 떠난 거다. 일단 그 연극을 기획한 사람들이 일본에서는 엄청난 메이저다. 그리고 내가 너무 너무 좋아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연극이었다. 당대 최고의 배우인 카가와 테루유키가 있었고, 90년대 로망이었던 히로스에 로쿄도 딱 있었고. 하하하.

Q. 10여 년 전 히로스에 로쿄는 정말 최고였다.
차승원: 그러니까. 그러니 그걸 안 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런데 내가 상수가 뭐고, 하수가 뭔지 어떻게 알겠나. 밑바닥에서부터 배웠다. 연극을 하면서 그 엄청난 배우들의 열정과 집요함에 놀랐다. 한국말을 하나도 모르는 카가와 테루유키는 한국말 딕션을 무수하게 듣고 노트하고 되?다. 그 사람, 굉장히 바뿐 사람이거든. 쿠사나기 츠요시도 그렇고. 많은 걸 보고 느낀 즐거운 시간이었다. 덕분에 히료스에 로쿄와도 작업하고. 하하하.

Q. 언젠가 인터뷰서 ‘배우의 덕목 중 하나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라는 얘기를 했다. 그건 지금도 유효한가.차
승원:
그럼. 대부분의 배우들이 자신의 위치를 과대평가한다. ‘이런 위치에 있는 나에게 이런 작품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건 정말 위험하다. 시쳇말로 후진작품이라 할지라고 후진연기는 하면 안 된다. 마음에 안 드는 작품이니까 대충 하겠다? 그런 건 다 들통 나게 돼 있다. 그리고 그런 건 습관이거든. 그런 습관이 한번 몸에 배면 정말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 못한다. 아니, 말론 브란도나 알파치노, 로버트 드니로 같은 배우는 늘 좋은 작품만 했나? 아니거든. 후진 작품도 많이 했거든. 그런데 또 그들의 연기가 후졌냐!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배우가 작품 핑계를 대는 건 아닌 것 같다. 아무리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도 말이 되게끔 해야 하는 게 배우다. 그게 어느 정도 가능하다. 진심으로 연기한다면.

글.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팽현준 pangpang@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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