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아라를 처음 본 순간, “성나정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나는 사랑하고 있을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tvN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의 나정이(고아라)를 보면서, 미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이 말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어려서부터 스무살 대학의 문턱에 들어설 때까지 너무도 긴 시간을 함께 피붙이처럼 자라온 쓰레기(정우) 오빠를 짝사랑하는 소녀까지는 이해했으나, 그 첫사랑이 그토록 비현실적으로 이루어지고 만 그림에 공감을 하지 못했기 때문 아니었을까. 아니, 어쩌면 ‘어깨 100평’ 칠봉이(유연석)의 마음을 받아주기는 커녕 친구로만 선을 그어버린 나정의 대쪽같은 마음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그렇지만, ‘응사’의 문이 닫히는 바로 그 순간 깨달았다. 쓰레기가 나정이의 남편이어서 참 다행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신촌하숙집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1990년대라는 시간 속에서는 모두의 첫사랑이 거짓말처럼 일어나는 기적도 있을 수 있다는 결말이 주는 위안의 힘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떠오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대사. “나는 사랑하고 있을까? 그래, 기다리고 있으니까!” 비록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기적과 희망일지라도, 늘 기다리고 있다면 그 기적은 이미 이루어진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정이 긴 시간의 기다림 끝에 얻은 첫사랑은 그런 나정을 연기한 배우 고아라의 인생과도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 엘프를 떠올리게 하는 외모의 이 소녀는 2003년 데뷔해 청소년드라마 ‘반올림’으로 순식간에 전국민이 다 아는 스타가 됐지만, 이후 배우로서의 행보는 기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의 지난 필모그래피를 떠올려보면 기억에 남는 작품이 없을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기를 10년 째, 전작 ‘응답하라 1997′의 열성팬이었던 그가 먼저 열정을 보여 만나게 된 ‘응사’ 속 성나정을 통해 고아라는 마침내 배우로 응답받는다. 모든 이들이 이제서야 그녀에게 묻기 시작했다. “그 10년 동안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왔냐”라고. 세상이 몰라줘도 스스로를 믿고 기다리지 못했다면 결코 꾸준히 걷지 못했을 지난 10년이라는 시간에 대해 그녀는 덤덤하게 말한다. “내 마음은 같았어요, 늘.”
고아라는 말투도 행동도 손짓도 아직 성나정 그 자체였다.
Q. (얼굴을 보자마자) “성나정이다!” 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고아라 : 하하하하.
Q. ‘응사’ 방송을 다시 볼 시간은 좀 있었나?
고아라 : 없었다. 끝나자마자 인터뷰를 하느라 바빴다. 잠자고 일어나서 인터뷰 하는 식이다(웃음). 방송은 정말 다시 보고 싶다. 꼭 볼거다. 공약이행까지 하고나면 다시 모니터 할 것이다. 사실 찍으면서도 초반에만 보고 나중에는 풀(full)로 보지 못했다.
Q. 하는 동안 사람들이 ‘정말 나정의 남편이 누구야?’라는 질문을 많이 했을텐데, 결국 남편이 쓰레기로 밝혀지고 말았다. 실제 고아라였어도 쓰레기를 선택했을까?
고아라 : 아마 나 역시도 첫사랑, 첫 느낌이 왔던 사람에게 올인하지 않았을까 싶다. 칠봉이는 참 매력적인 남자이지만, 그래도 처음 두근거렸던 사람의 매력이 더 크지 않을까.
Q. 첫 회를 보면 성나정과 쓰레기는 정말 완벽한 남매다. 그러다 차츰차츰 감정을 쌓아가고 결국 연인에서 부부가 되고 마는데,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그 미묘한 차이를 조절해가는 것에 신경이 쓰였을 것 같다.
고아라 : 비록 쓰레기가 어렸을 때부터 친오빠처럼 지내왔던 오빠이지만, 나정은 남모르게 아주 오래전부터 짝사랑을 시작해왔을 것이라 생각했다. 물론 그 오빠가 너무 격하게 볼따구를 잡아 당기거나 하니까, 아무리 그 사람이 좋아도 맞고만 있을 수 없으니 같이 치고박고 했을 것이다(웃음). 그리고 2회 초반부터 나정의 감정이 차근차근 설명이 되기도 했다. 어려움은 크게 없었다.
Q. 그렇다면 나정이 쓰레기를 완전히 남자로 바라보게 된 순간은 언제라고 생각했나.
고아라 : 음.. 아마도 첫 입맞춤 이후! 그 전에는 마치 ‘응칠’의 시원처럼 순간순간 (윤제가) 좋다가도 다시 ‘아니지’ 하고, 또 다시 이상하게 좋아지고 하면서 그 마음을 차츰차츰 키워오는 정도의 풋사랑이었을 것 같다. 그러다 입맞춤 이후 본격적으로 세게 앓이를 시작하게 된 것 아닐까.
Q. 이번 작품으로 고아라라는 배우를 새롭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그런데 지난 10년이란 시간 서운할 정도의 평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하다.
고아라 : 나는 여전히 부족하다. ‘응사’로 많은 분들이 과찬을 해주시지만 스스로는 아쉬운 부분이 많다. 여전히 배우라는 타이틀도 부끄럽다. 그렇지만, 지난 10년 동안 흔들리는 순간 같은 것은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10년이라는 시간이 너무나 훌쩍 지나가버려서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인데, 그렇지 않나? 10이라는 숫자는 1과2, 3과4가 다 합쳐져 만들어지는 숫자니까!
Q. 사실 ‘페이스메이커’나 ‘파파’에서 보여준 연기는 소문(?)처럼 부족한 정도는 아니었다.
고아라 : 아이휴, 감사드린다. 흠, 사실 ‘페이스메이커’라는 영화가 내 나름의 기점이 됐던 작품이었다. 그 전까지는 즐겁게 재미있게 하는 것에 더 방점을 두며 살았다. 청소년 시절, 사춘기 시절, 중고등학교 대학교 시절을 지나왔는데, 보통의 20대분들과 비슷한 마음이었다. 마음 한 편에는 진로나 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면서도 재미있게 살고 싶었던 것 말이다. 학업을 병행하고 외국활동도 사이사이 했었는데, 그러다 조금 더 진중하게 다시 한 번 내 인생의 꿈을 생각하게 됐던 순간이 바로 ‘페이스 메이커’였다.
고아라와 주어진 시간은 고작 30분, 조금이라도 더 많은 답을 내놓으려 그녀는 쉴새없이 조잘조잘 말을 이었다
Q. 그렇지만 대다수는 ‘응사’가 고아라의 터닝포인트라고 생각할 것이다.고아라 : 아마 외적으로 변화가 많아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것 같다. 다시 마음 먹은 것 같다고 말씀해주시는데 하지만 늘 같은 마음이었다. 과거에 여신이라고 불러주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내가 여신은 무슨 여신이야, 아유.(고아라의 말투는 성나정의 말투와 완전히 똑같았다. 팔을 휘휘 내젓는 동작도 성나정을 닮아있었다) 뼛속부터 시골의 피가 흐른다. 소똥 냄새 맡으면서 살았는데, 물론 그런 호칭은 굉장히 기뻤고 감사했지만 와닿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나는 ‘응사’의 나정이 보다 더 내려놓을 수 있다. 여러분이 아직 모르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 차기작은 더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이 될지 모른다는(웃음).
Q. 들어오는 작품의 장르나 캐릭터의 범위가 많이 넓어졌을 것 같다.
고아라 : 폭이 넓어졌다. 장르 불문하고 현재 영화나 드라마 모두 검토 하고 있다. 감사하게도 다리 인대가 끊어져서(그녀는 ‘응사’ 마지막 촬영, 달리는 신을 찍다 부상을 입었고 1월 중 수술을 할 예정이다) 입원실에서 충분히 볼 시간이 생겼다. 대본과 밀렸던 책을 병실에서 많이 읽을 것이다.
Q. 데뷔 이후 10년 이야기 다시 해보자. ‘응사’ 배우들이 말이지, 고아라와 웃고 떠드는 순간은 다 같은 또래 친구 같은데 어느 순간 ‘헉! 데뷔 10년의 관록의 여배우구나’라고 느끼는 대목이 있었다고 말하더라.
고아라 : 아니, 노인네 취급하는 건가? 현장 분위기 좋았는데 다들 속으로는 노인네라고 생각했던 거였나(웃음). 그런데 뭐, 아마 그런 것 같다. 내 지나온 세월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테니까 현장에서 있었던 재미난 이야기들을 하다보면 그렇게 생각이 들 수도 있겠다. 영화 ‘파파’의 경우에는 외국에서 2달 만에 후다닥 영화를 찍기도 했고, 몽골에서도 한달 정도 있어보았다. 그래서 나름 현장에서의 노하우를 체득한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이번 촬영장에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정신줄을 놓고 살았다. 괴롭히고 장난치고 대본에 우선 육두문자들이 나오니까 서로 주고받으면서 허물없이 지냈다. 지금도 너무 보고싶다. 다들 너무 잘 되어서 바빠 서로 못보지만, 아마 그러지 않았더라면 매일 밥 먹었을 정도다. 참, NG내면 밥쏘기 내기를 했었는데 호준 오빠가 7번 NG를 낸 적이 있어서 밥쏘기 7차까지 간 적이 있다(웃음).
Q. 나중에는 거의 생방 수준이라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분위기가 들끓었나보다.
고아라 : 12월 1일부터 잠을 거의 못잤다. 그래서 NG가 많이 났다. 허무맹랑하게 발음이 꼬이거나 대사가 기억 안나거나 이런 일들이 허다했으니까. 막판에는 막장이었다(웃음). 대사도 마음대로 만들고, 애드리브가 반 이상이었다.
Q. 그만큼, 호흡이 잘 맞았다는 증거다.
고아라 : 핑퐁이었다, 핑퐁! 받아치고 뱉어내고, 그러다보니 힘들어도 현장의 재미가 배가 됐다. 아마 그런 리얼감에 시청자들이 더 좋아해주신 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Q. 기억에 남는 애드리브는 무엇인가.
고아라 : 음. 예를 들어 ‘오이같은 자식’이라고 대본에 있으면 ‘오이 소박이 같은 자식’이라는 식으로 덧붙이는 거다. 아무래도 사투리이다 보니 뭔가를 더 갖다붙였을 때 재미있고 자연스럽더라. ‘까리하다’를 ‘까리뽕삼하다’ 이런 식. 아, 그리고 영어! 호주에서 일하는 나정이 전화통화로 영어하는 거, 그거 진짜 대본에도 없었고 오디오가 안 들어가는 거라서 대충 마음대로 말한 거다. 새벽에 밤새며 찍었던 분량이라 웃기려고 막 한 건데 나중에 방송보니까 다 들어가있더라. 흐흐흐. 비방용인데 말이다. 감독님이 현장감을 너무 살리셨다(웃음).
Q. 알고보면 은근히 외국어를 참 잘한다. ‘파파’에서 영어대사도 꽤 수준급이었고, 일본어도 잘 하고.
고아라 : 조기교육의 힘, 그리고 SM의 스파르타식 교육의 힘이다. 특히 일본어는 회사를 통해 제대로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한국어와 영어가 전혀 안 통하는 선생님과 함께 3개월 동안 박혀서 주말 없이 하루 4시간을 공부해야 했었으니까, SM이라 가능한 교육이다. ‘민나노니욘고’라는 책, 아직도 강렬하게 기억한다(웃음).
고아라는 다음 작품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게 될까
Q. 이번에는 사투리 실력까지 증명했다.고아라 : 사실 어머니는 서울분이고 아버지는 전라도분이다. 진주에서 태어났지만, 대전, 사천에도 살았던터라 여러 사투리가 섞여 있다. 하지만 경상도의 피는 어디 가지 않나보다. 부산에 사는 사촌동생과 되새김질을 했다. 기억에 되살아나니 자연스럽게 되더라. 또 정우 오빠도 부산출신이고 마산출신 작가님들도 계시고 도움을 받았다. 그런데 사투리란 참으로 묘하다. 솔이 아니고 도도 아니고 미도 아닌 플랫이 들어간 미묘한 음. ‘그랬다카대’를 한다고 하면 그 미묘한 음으로 해야한다. 그게 포인트다. 정확한 음을 낼 수 있다면 사투리는 끝이다.
Q. 참, ‘응사’ 첫 대본 리딩할 때 머리카락을 자르고 왔었다. 심기일전의 의미였을까.
고아라 : 감독님께 내가 먼저 ‘머리카락 잘라도 되겠냐’ 물어보았다. 대본을 통해 만난 나정이는 개구지고 선머슴같은 아이었기에 그런 이미지를 헤어로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응칠’의 열렬한 팬이었는데 극중에 시원이가 일자머리 가발을 쓴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게 너무 귀여웠다. 거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나정의 헤어를 떠올렸다. 변신을 위해서는 아니었고, 나정의 이미지에 더 어울린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부러 면도칼로 자른 층머리처럼 거친 느낌이 나게 잘랐다.
Q. 살도 찌웠고!
고아라 : 맞다. 촬영 전에 5kg를 찌웠고, 촬영 하면서는 2~3kg를 찌웠다. (Q. 그래서 지금 몇키로?) 에이, 거기까지(웃음).
Q. 신촌하숙집 밥이 그렇게 맛있었다 소문이 자자하던데, 특히 뭐가 맛있었나.
고아라 : 볼락구이, 제주도 특산품이었다. 생선 색깔이 붉었다. 인상이 깊었다. 되게 맛있어서 그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던 기억이.
Q. SM 구내식당은 없나.
고아라 : 아(탄식하며) 없다. YG 식당이 그렇게 맛있다고 하던데.
Q. 화제의 결혼식 장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묻겠다. 대역과 함께 찍었다고 하던데, 그 분량은 몰아서 한꺼번에 찍은건가.
고아라 : 아니다. 그 분이 매번 오셔서 매회 찍었다. 그러니까 난 결혼신을 거의 21번 찍은 거다. 그렇게 21번 웨딩드레스를 입고 마지막 순간 쓰레기 오빠를 보니 마음이 참 남다르더라.
Q. 남편의 존재를 안 건 언제였나.
고아라 : 방영 4일전. 너무 궁금했고, 쓰레기 오빠가 아닐까봐 조마조마했다. 막장이거나 아니거나, 나정의 입장에서는 첫사랑이 이뤄지느냐 아니야의 문제였다. 나정의 마음은 흔들린 적도 없었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쓰레기이길 바랐다.
Q. 엔딩에 무척 만족하는 것 같다.
고아라 : 그렇다. 해피엔딩이다(웃음).
Q. 배우 고아라의 엔딩도 해피엔딩이길 바란다.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나.
고아라 : 믿음을 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앞으로 조금씩이라도 더 발전하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글. 배선영 sypova@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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