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돼지의 왕’이 등장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실사영화를 압도하는 애니메이션’, ‘올해의 발견’, ‘한국 애니메이션의 진화’와 같은 찬사가 ‘돼지의 왕’을 수식했다. 각종 국제영화제들이 한국에서 날아든 이 뜨거운 애니메이션에 환호하기도 했다. 그래서 궁금했다. ‘돼지의 왕’처럼 밀도 높은 영화를 첫 작품으로 만든 감독은 어떤 차기작을 내놓을지. 반갑게도 연상호의 신작 ‘사이비’는 기대를 배신하지 않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살핀 풍부한 은유는 전작의 성과를 이어가고 있으며, 그림의 완성도와 사운드는 보다 탄탄해졌다. “당신이 믿는 믿음”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사이비’는 우리가 연상호에게 품었던 믿음을 돌려주는 영화이기도 한 셈이다.Q. 누군가 ‘사이비’의 힘이 강력한 것은 순전히 비정한 한국사회 덕분,이라고 했더라. 영화제 초청으로 해외에 나갈 일이 많을 텐데 외부인들이 바라보는 ‘사이비’는 어떻던가.
연상호: 굉장히 다양한 시선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분위기다. 정치적인 상황, 환경적인 상황으로 보시는 분도 있고, 사회의 거대한 은유로 보는 분도 있고.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이 분다’와 함께 초청되는 일이 많았는데, 두 작품이 오스카 예비후보로 지명되다보니 많이들 비교해서 보더라. 하루는 ‘사이비’ 해외 배급팀 팀장이 미디어 센터에서 있는데, 외신기자들끼리 두 작품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사이비’ 관계자가 바로 옆에 있다는 걸 모르고 얘기를 나눈 거지.(웃음) ‘바람은 분다’는 그림은 너무 예쁜데 지루하다. ‘사이비’는 흥미진진한데 종교적인 게 불편하다는 등의 의견이 오고 갔다고 들었다.
Q. 외신기자들에게도 ‘사이비’가 종교적인 색채의 영화로 크게 다가가나 보나.
연상호: 그런 것 같다. 아직 미국 배급사가 정해지진 않았는데 오스카 출품 요건에 맞추려면 12월 2일 전에는 미국에서 개봉을 해야 한다. 그래서 정식은 아니고 11월 15일에 LA CGV에서 약식 개봉을 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예수 탄생일이 있는 12월에 이런 영화를 찾을 리 없다”는 반응이었다. 외국에서도 종교적으로 보는 시선이 확실히 있는 거다.
Q. 교실을 통해 사회를 은유한 전작 ‘돼지의 왕’처럼, ‘사이비’ 역시 상징적인 은유 아닌가.
연상호: 자칫 종교에 대한 영화로 오해하기 쉽지만 결코 종교를 겨냥한 영화가 아니다. 믿음이라는 것이 종교에만 국한된 건 아니지 않나. 일상에서 겪게 되는 다양한 가치와 신념에 대해 얘기해 보고 싶었다. 사람들은 힘들 때 무언가에 기대려는 경향이 있는데, 한동안 열풍처럼 불었던 힐링(Healing)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Q. 오스카 진출은 가능할 것 같나?(웃음) 픽사의 ‘몬스터 대학교’부터 ‘크루즈 패밀리’,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2’, ‘슈퍼배드2’, ‘스머프2’ 등 예비후보들이 쟁쟁하던데.
연상호: 오스카가 전통적으로 장편애니메이션 후보를 자국 영화로만 채우지 않는다. 지금 비할리우드권 영화는 일본의 ‘바람이 분다’,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 프랑스의 ‘어니스트와 셀레스틴’, 브라질의 ‘리오 2096’ 등이 예비후보로 올라있는데, 최종 후보 지명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고 본다. ‘어니스트와 셀레스틴’의 경우 아카데미가 좋아할 가족영화지만 연식이 오래 됐고. ‘바람이 분다’는 미국을 폭격한 제로센 설계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미국인이 보기에 불편함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사이비’도 종교적인 걸 건드리니까 껄끄러울 수 있을 테지만.
Q. 오스카 최종 후보는 솔직히 욕심이 날 것 같다.
연상호: 난다.(웃음) 한국은 아직 애니메이션 시장이 열악하다. 성인 애니메이션의 경우 더욱 심한데, 애니메이션은 어린이용이라는 인식이 강하다보니 일을 하는데 힘이 부치는 게 사실이다. 애니 시장을 활성화시키고 대중의 고정관념을 바꾸려면 결국 두 가지 방법 밖에 없다고 본다.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든가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가 되든가. 그러면 성인 애니메이션이 몇 단계 휙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욕심이 나는 거지, 다른 큰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주목을 받는 게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고 말이다.
Q. 기대에 따른 부담을 말하는 건가?
연상호: ‘돼지의 왕’ 때는 ‘특이한 애니메이션이 나왔다’는 놀라운 분위기가 많았다. ‘사이비’는 그냥 ‘연상호 작품이 나왔다’ 정도지 ‘돼지의 왕’ 때의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웃음)
Q. ‘돼지의 왕’이어 또 한 번 강한 놈이 나왔다는 평가가 많은데, 괜한 걱정을!(웃음) ‘돼지의 왕’이 2만 관객을 모았나?
연상호: 맞다. 20개관 조금 넘는 상영관에서 2만 명을 기록했으니 엄청나게 많이 본 거다. 당시 2만 가까이 든 영화가 ‘파수꾼’과 ‘돼지의 왕’ 두개 밖에 없었다. 요즘 그 수치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새삼 느낀다. 부담도 되고. 왜 소포모어징크스라는 게 있지 않나. 어제도 동료들과 술 마시면서 그런 얘기를 했는데, 2-3년 전에 주목 받은 젊은 신인감독들이 많다. ‘무산일기’의 박정범부터 ‘똥파리’의 양익준, ‘파수꾼’의 윤성현 등… 첫 번째 작품에서 인정받은 감독은 두 번째로 넘어가는 게 쉽지 않은데 권칠인 감독님이 ‘사이비’를 보고 그런 얘기를 해 주셨다. “두 번째 작품을 아주 부드럽게 별 탈 없이 해치워 버렸다!”고. 힘이 되는 말이었다.
Q. 그러고 보니 그때 주목받은 신인 감독들 중에 장편으로는 거의 처음으로 두 번째 포문을 연 셈이다.
연상호: ‘낮술’의 노영석 감독이 ‘조난자들’을 내놓기는 했는데, 정식개봉으로 따지면 내가 처음인 것 같다.
Q. 오래 전 인터뷰에서 실사 시나리오를 쓰다가 안 풀리면 ‘돼지의 왕’ 작업을 했다고 했는데, 그 실사 시나리오가 ‘사이비’인가.
연상호: 맞다. ‘사이비’는 실사로 먼저 시작한 작품인데, ‘돼지의 왕’이 나오면서 자연스럽게 애니메이션으로 바뀐 경우다. 애니메이션으로 바뀌면서 더 좋아진 부분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기자시사회 후, 영화에 대한 반응을 살펴봤는데 누군가 그런 얘기를 했더라. ‘돼지의 왕’도 그렇고 ‘사이비’도 그렇고 극적인 상황에서 주인공이 자아내는 특유의 정서가 있는데, 그걸 실사로 했더라면 이런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을 것 같다고. 그걸 보고 굉장히 반가웠다. 사실 ‘돼지의 왕’ 때부터 “실사로 만들지 왜 ‘핫’하지 않은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했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왔거든. 그런 것들을 조금이나마 인정받기 시작했다고 생각하니까 기분이 좋았다.
Q. 애니메이션 장르만의 장점이 분명히 있다고 본다. 관객 입장에서는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를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보다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도 하니까.
연상호: 사람들은 배우들의 연기를 굉장히 세분화해서 바라본다. 연기의 결을 세세하게 나눠서 그걸 가지고 상을 주기도 하고. 그에 비해 그림에 대해서는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림의 질감이라는 게 굉장히 풍부한데도 말이다. 그림이 지니는 장점을 사람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앞으로 애니 작업을 해 나가는데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Q. 사실 ‘돼지의 왕’ 때는 당신이 만든 실사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사이비’를 보고 나서 생각이 변했다. ‘연상호는 쭉 만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 쪽으로.
연상호: (웃음) 그 부분에 있어서는 나도 여러 생각을 한다. 어느 날은 ‘팀 버튼처럼 만화도 하고 극영화도 하면 좋지 않을까’ 하다가, 또 어느 날은 ‘아니지.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외길을 걷는 게 맞지’ 하다가. 아직 잘 모르겠다. 상황이 자연스럽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싶다. 확실한 건, 돈 때문에 흔들리지는 않을 거라는 거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신할 수 있다.
Q. 애니메이션으로 염두하고 ‘사이비’ 시나리오를 썼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랐을까.
연상호: 달랐을 거다. 대사 톤이라든가 방식이라든가. 가령 만화 ‘내일의 죠’를 보면 죠가 권투를 하면서 대사를 하잖아. 주먹을 날리면서 대사를 술술술~.(웃음) 그걸 똑같이 실사로 찍으면 굉장히 이상할거다. 만화이기에 허용되는 폭이 넓은 거지. ‘돼지의 왕’은 그걸 최대한 이용한 케이스다. 설명적인 대사를 유치하다고 느낄 관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애니메이션의 속성을 최대한 이용하려고 했었다. ‘사이비’의 경우 극영화를 염두에 두고 썼기 때문에 대사나 상황이 리얼하게 나왔다. 막상 애니메이션으로 하려고 보니까 자칫 잘못하면 실사를 애니메이션으로 옮겨놓은 느낌이 들 것 같더라. 그래서 마을 배경이나 분위기 등 그림이 줄 수 있는 느낌을 최대한 살리려고 했다.
Q 배경 취재는 어떻게 했나.
연상호: 인터넷!(웃음) 몇 군데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별 거 없더라고. 하하. 그래서 인터넷의 힘을 조금 빌렸다. 내가 금천에서 군 생활을 했는데, 그 곳 이미지도 많이 참고했고. 수몰설정은 최규석 작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최 작가와는 여러 작품을 함께 하다 보니 손발이 잘 맞는다. 시나리오가 나오면 일단 규석이를 주는데, 시나리오 단계보다 규석이로부터 스케치가 왔을 때 오히려 더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편이다.
Q 최규석 작가와는 막역한 친구사이다. 서로에 대한 평가도 거침없이 하는 걸로 아는데 ‘사이비’를 보고 뭐라고 하던가?
연상호: 최 작가도 완성본은 VIP 시사회 때 봤다. 알고 봐도 재미있다고 했다. ‘도그빌’ 같은 느낌이라고도 했고.
Q. 아, 듣고 보니 그렇네. 혹시 덴마크 영화 ‘더 헌트’ 봤나? 거짓이 진실을 압도하는 순간들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더 헌트’가 많이 떠올랐다.
연상호: ‘도그빌’도 그렇고 ‘더 헌트’도 그렇고 좋아하는 류의 영화들이다. 그런데 이미지 적으로 원했던 건 시골을 배경으로 한 데이빗 린치의 ‘트윈픽스’다. 어릴 때부터 ‘트윈픽스’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언제고 저런 느낌의 영화를 한국에서 만들어보고 싶다’ 생각했는데, 그 사이에 몇 번 나왔다.(웃음) ‘살인의 추억’이라든지, ‘이끼’라든지.
Q. 전작 ‘돼지의 왕’은 당신이 어린 시절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이다. ‘사이비’는 어디에서 출발한 건가.
연상호: 계기가 됐던 건 노무현 정부 시절 FTA(자유무역협정)였다. 그때 FTA 반대 시위가 일어났는데, 당시만 해도 시위에 대한 시선이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에 들어서서 FTA에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일어났는데,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사안에 대해 정의를 부르짖고 있었다. 거기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100분 토론’도 이야기 착상에 영향을 미쳤다.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나긋나긋하게 하는 사람과 상식적인 주장을 거칠게 얘기하는 패널의 논쟁을 본 적이 있다. 이성적으로는 후자가 맞는데 괜히 전자를 더 믿고 싶었다. 보여 지는 것 때문에 우리는 핵심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해 보며 좋겠다 싶었다.
Q. 믿음을 무기로 마을 사람들을 속이는 이야기로만 짜여 졌다면 ‘사이비’는 단순한 선악구도의 영화에 그쳤을 거다. 그런데 여기에 ‘진실을 아는 자가 마을 사람들이 가장 불신하는 사람’이라는 설정이 들어오면서 영화가 한층 풍부해진다. 여기에 성철우(오정세) 목사의 과거를 삽입하면서 한 번 더 나아가고. ‘돼지의 왕’ 때도 느꼈지만 당신 이야기의 장점은 층위가 굉장히 두텁다는 거다.
연상호: 시나리오 쓸 때 그런 부분에 특히 신경을 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참과 거짓의 단순 논리로 움직이는 것 같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복잡하다. 누군가에게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납득이 갈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우리 대다수는 상황을 단순화해서 바라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타인이 왜 그런 믿음을 갖게 됐는지 혹은 그런 행동을 하는지에 대해 깊게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세상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Q. 김민철(양익준) 캐릭터가 조금만 더 착하게 그려졌더라도 관객이 김민철에게 감정이입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김민철의 행동이 그걸 계속 가로막는다. 김민철을 막장까지 간 인간으로 묘사한 것은 의도한 바였나?(다음 답변에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연상호: ‘사이비’를 쓰면서 구성적으로는 생각한 건 크게 두 개였다. 마을 사람들이 속는 쇼가 허접해야 한다는 게 첫 번째였다. 그래야 관객들이 마을 사람들이 속는 걸 보면서 실컷 비웃을 수 있을 테니까. 두 번째는 김민철이 우는 순간 관객들이 ‘아 저 사람이 개과천선하나보다’라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받을 수 있게 하는 게 목표였다. 관객들은 영화를 보러갈 때 주인공이 착해지길 원하는 관성이 있다. 김민철이 우는 순간 ‘드디어 착해지는 구나’ 하는데, 그걸 영화가 뒤집는다. 관성과 믿음을 들어주는 것처럼 하다가 깨버려서 충격을 주는 거지. 거기에서 관객이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길 원했다. 마을 사람들이 허접한 쇼를 믿는 건 바보라서가 아니거든. 그것 역시 믿고 싶어 하는 관성 때문이거든. 그게 처음 구성할 때의 주요 콘셉트였다.
Q.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있다고 본다.(웃음)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인물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
연상호: 민철과 유일하게 소통하는 후배 칠성! 어떻게 보면 칠성은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캐릭터다. 최경석(권해효)이 사기꾼이라는 것부터 해서 여러 가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데도 묵묵히 사건을 바라본다. 그것이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니까. 사실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진실과 거짓은 아주 1차원적인 문제다. 그런데 칠성이 등장하면서 단순히 ‘진짜냐 거짓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믿고 받아드리는가’ 하는 보다 깊은 층위로 이야기가 발전한다. 그 포인트를 제시해 주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칠성에게 가장 애착이 간다.
Q. 민철이 딸 영선(박희본)에게 “그게 네 팔자”라고 내뱉는 대사가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다. 보면서 ‘와, 정말 비정하구나. 극한까지 집요하게 파고드는 구나’ 싶었다.
연상호: 고심해서 쓴 대사다.(웃음) 방금 얘기했듯 칠성이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1차원에서 3차원으로 넘어간다. 민철도 그것을 모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상황이 단순하지 않다는 걸 느낄 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철은 계속 1차원적인 것만 주장한다. 왜?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그 이상으로 생각하는 법을 모르니까. 그러니 영선의 질문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영선이 묻는 건 “사기냐 아니냐?”가 아니잖아. “내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그게 가짜냐?”고 묻잖아. 너무 어려운 질문이니까 막히는 거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얘기해 버리는 거다. “그게 네 팔자다!”라고.
Q. 마지막 김민철의 울부짖음에 대해 많이들 궁금해 하는 것 같다.
연상호: 시나리오 상에 써 놓았던 건 ‘저주인지 기도인지 모를 말을 중얼 거린다’다.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건 원시적인 형태의 종교였다. ‘사이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불행을 동력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경우인데, 민철 역시 원초적인 상태에서 믿음을 갖게 된 것처럼 보였으면 했다. 그것이 타인에 대한 저주일 수도 있고, 속죄일 수도 있고, 기원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모든 게 합쳐진 뭔가 일수도 있고. 그 부분을 상상하며 엔딩을 만들었다.
‘돼지의 왕’과 ‘사이비’
Q. ‘사이비’를 통해 믿음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 보고 싶다고 했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이 믿었던 가치의 근거가 흔들렸던 경험이 있나?연상호: 너무나 많다. 당장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것부터 해서 수두룩하다. 아침 몇 시까지 일어나기로 했는데 못 일어났다든지 하는 소소한 것들도 어떻게 보면 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린 거니까.(웃음) 조금 다른 얘기일 수 있는데 감독으로서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돼지의 왕’ 과 ‘사이비’를 거치면서 주변의 여러 상황이 복잡해졌다. 투자배급사와 주변 지인들과 기자들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많아졌는데, 그 원하는 것들이 모두 다르다. 나를 좋아하기 때문에 갖는 기대라는 걸 알지만, 각기 다른 기대를 하나로 묶어서 보여 줘야 한다고 생각하면 공포스럽기도 한 게 사실이다. 다행이라면 이걸 묶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는 거다. 사람들의 믿음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Q. ‘돼지의 왕’ 때 ‘인물들의 움직임이 조금 더 자연스러웠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토로한 바 있다. 이번에는 어떤가? 만듦새가 전보다 좋아졌다는 평가가 많은데.
연상호: 만족한다. 내가 원하는 그림체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웃음)
Q. 어떤 그림체?
연상호: 오키우라 히로유키 감독의 ‘인랑’(1999). 내가 완성형으로 보는 그림체다. ‘인랑’을 목표로 달려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삽화체 만화의 정점이니까. 가끔 “그림이 점점 ‘인랑’스러워네지요?” 하는 말을 듣는데, 그러면 너무 기분이 좋다. 그런 그림으로 영화를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인랑’은 제작비가 60억 원이나 들어간 영화라는 게 함정이지만.(웃음) ‘돼지의 왕’은 1억 5,000만원, ‘사이비’는 3억 8,000만원이 들었다.
Q, 관객들이 ‘사이비’를 보고 어떤 느낌을 가지고 갔으면 좋겠나.
연상호: 보고 나서 계속 곱씹게 되는 영화가 됐으면 좋겠다. 여운이 남는 영화, 자꾸만 생각나는 영화. 그랬으면 좋겠다.
Q. 그런 영화가 될 것 같다. 아카데미 시상식(최종 후보 발표는 1월 16일이다)에서도 꼭 봤으며 좋겠고!(웃음)
연상호: 하하. 큰 욕심은 없다. 만약 운이 좋아서 가게 된다면 인생에 주어진 보너스라고 생각하려고.
글,편집. 정시우 siwoorain@tenasia.co.kr
사진. 구혜정 photonin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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