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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여름 경기도 용문산에서 열린 재즈 색소포니스트 대니 정의 콘서트에서 호일펌을 해 머리가 부스스한 건반 연주자를 한 명 봤던 기억이 난다. 그 밴드는 대니 정과 기타리스트 샘 리, ‘호일펌 남’을 제외하고 모두 미국의 베테랑 재즈 연주자로 구성돼 있었다. 같이 공연을 보러 간 친구는 세컨드 건반을 연주하던 ‘호일펌 남’을 보고 연신 감탄사를 던졌다. 서울대만큼 가기 어렵다는 서울예대 실용음악과에서 건반을 전공하는 친구였다. 그 친구는 당시 그 ‘호일펌 남’이 자기 학교 선배인지는 몰랐던 모양이다. 흑인 연주자들 사이에서 건반을 연주하던 그 ‘호일펌 남’이 바로 조커(본명 이효석)였다.

신승훈, 이소라, 김범수, 바비킴, 임재범, 비 등 유명 가수들의 앨범 및 라이브 건반 세션으로 활동해온 조커는 지난 7월 자신의 이름을 건 앨범 ‘칼레이도스코프(Kaleidoscope)’를 발표하고 아티스트로서 출사표를 던졌다. 이 앨범을 운 좋게 미리 들어보고 상당히 놀랐다. 앨범 제목인 ‘만화경’처럼 대중음악의 여러 어법이 뒤섞여 있으면서도 가요의 미덕을 잃지 않는, 아슬아슬 외줄타기를 하는 음악이었다. 한마디로 가요계에서 쉽게 만나볼 수 없는 음악이었다. 이 정도로 과감한 어법을 지닌 가요 앨범을 내기까지는 음악적 테크닉 외에 용기도 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라. 대중이 쉽게 즐길 만한 음악이라고 보긴 어려웠지만, 한편으로는 조커가 팝스타 스팅처럼 미남에다가 명창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도 해봤다. 조커를 만났다.

Q.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을 봤다. 오랫동안 세션 연주자로 활동했는데 본인이 직접 무대에 올라가 호스트가 돼 공연을 하니 어떻던가?
조커: 첫 공연이라 의욕이 넘쳐서 인트로 곡을 따로 만들었다. 곡을 좀 어렵게 만들어서 연습을 여섯 번 하면 세 번 맞고 세 번 틀리더라. 본 공연 때 잘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 속상했다. ‘어려운 곡이라 관객은 모르겠지’ 이렇게 안 되더라. 그런 아쉬움을 추스르기 위해 멘트도 자주 하고 많이 웃었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서너 곡 넘어가니 술술 풀리더라.

Q. 앨범을 듣고 심각한 사람이 아닐까 예상했는데 공연에선 유머러스하더라.
조커: 내가 워낙에 긍정적이고 천하태평이다.

Q. 이름은 왜 조커인가? 프로필 사진에는 얼굴에 ‘조커’처럼 분장도 했더라.
조커: 내 본명인 이효석이 소설가로 워낙 유명하고, 뮤지션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라고 했다. 예명은 원래 삐에로를 생각했다. 광대부터 아티스트까지 광범위한 이미지를 함축하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삐에로보다는 조커가 더 나은 것 같아서 그걸로 결정했다. 분장을 한 것은 데이빗 보위의 글램 록 풍의 메이크업 정도를 해보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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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교회에서 처음 음악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조커: 정식으로 배운 것은 아니고 교회를 다니면서 통기타, 드럼 같은 악기를 처음 접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교회 형이 기타 치는 것을 보고 따라하다가 찬양 팀에 들어가서 베이스, 드럼을 연주했다.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운 것은 서울예대를 간 다음이다. 원래 음악 전공할 생각도 전혀 없었다. 교회에서 악기 만지고 노는 것을 워낙에 좋아했는데, 어머니가 ‘너 그러면 음악을 해봐라’라고 하시더라. 그때는 실용음악과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서 클래식과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초등학생들이 다니는 동네 교습소에서 피아노를 처음 배웠다. 그 나이에 피아노를 시작해서는 음대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음악계에 무지했던 것이다. 하하. 그 교습소에서 배운 건 별로 없고, 아이들하고 매일 놀았다. 내 나름대로 조지 마이클의 ‘Kissing a Fool’ 같은 거 듣고 좋으면 뚱땅거리는 정도?

Q. 그러면 실용음악과는 어떻게 가게 됐나?
조커: 내가 피아노를 뚱땅거리며 치는 것을 보신 성가대 누나가 “넌 클래식보다는 영화, 드라마 음악을 하면 잘 하겠다”라며 서울예전을 추천해줬다.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모르고 따로 레슨도 안 받고 시험을 봤는데 덜컥 붙어버렸다.

Q. 서울예대 실용음악과는 한국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은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식으로 합격을 하다니 믿기지 않는다.
조커: 감사하게도 내가 혼자 뚱땅거리며 놀던 음악들이 학교 커리큘럼들과 딱 맞더라.

Q. 어떤 음악들을 좋아했나?
조커: 중고등학교 때는 블랙사바스, 레드 제플린와 같은 록밴드를 좋아했다. 딥 퍼플은 별로 안 좋아했고. 데스메탈, 둠 메탈 등 어두운 음악도 좋아했다. 베놈(Venom)에 집착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포플레이와 같은 퓨전재즈, 팻 메시니 그룹 등의 음악을 좋아하게 됐다. 팻 메시니 그룹의 피아니스트 라일 메이스를 많이 좋아했다. 취향이 바뀐 것인데 당시 서울예대 포커스가 거기에 맞춰져 있었다.

Q. 스무드재즈, 컨템퍼러리 재즈와 같은 음악은 찾아듣기 힘든 음악 아닌가?
조커: 예전에 라디오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에서 여름방학이 되면 빌보드차트 1위부터 100위까지 다 들려주곤 했는데 그걸 테이프로 녹음해서 전부 들을 정도로 팝을 좋아했다. 어느 날 KBS 라디오에서 김광민 교수님이 재즈를 틀어주더라. 거기에 정원영 교수님이 패널로 나오셔서 함께 키스 자렛, 허비 행콕, 칙 코리아에 대한 이야기와 음악을 들려주셨다. 그때부터 GRP, 팻 메스니, 오레곤 등을 듣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니 정원영, 한상원, 한충완 등 동경하던 분들이 다 계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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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대학교에서는 기타리스트 박주원과 함께 밴드를 했다고 들었다.
조커: 주원이와 시리우스라는 스피드 멜로딕 메탈 밴드를 했었다. 졸업 후 군대를 다녀와서는 함께 ‘리 앤 박(Lee and Park)’이란 밴드로 서로의 자작곡을 했다.

Q. 박주원과 마찬가지로 조커도 세션을 활발히 했다. 하지만 본인의 이름을 걸고 앨범을 내는 것이 뮤지션으로서 숙원이 아니었을까?
조커: 사실 오랫동안 내 앨범에 대한 생각을 못 하고 살았다. 얼마 전 고향인 대전 집에 갔다가 어린 시절 낙서를 했던 스케치북을 발견했다. 어렸을 때 공일오비를 좋아했는데 스케치북에 ‘기타 장호일, 신디사이저 정석원, 피아노 이효석’ 이런 식으로 가상 밴드를 만들어 적고 놀았더라. 내가 앨범을 내니까 대학교 친구들이 내가 스무 살 때 앨범을 굉장히 내고 싶어 했다는 말을 해주더라. 난 기억도 안 나는데 말이다.

Q. 앨범 ‘칼레이도스코프’에는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이 담겼다. 마치 조커가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시도한 포트폴리오와 같은 느낌이랄까?
조커: 특별히 장르나 노선을 고민하지 않고 그동안 만들어놓은 음악을 담은 앨범이다. 가장 오래된 곡은 2004년에 만든 ‘에이프릴(April)’, 가장 최근 곡은 재작년에 만든 ‘로미(Romi)’다. 나오는 대로 만들다보니 앨범에 실린 곡들이 제각각이다. 장르적 통일성이 너무 없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했는데 주위에서는 음악의 색이 확실하니 통일성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고 조언해주더라.

Q. 혹시 대중성을 고려해보지는 않았나?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 말이다.
조커: 그런 계산은 전혀 없이 만든 앨범이다. 만들어놓은 노래가 스무 곡정도 있었는데 그 중에 어울리는 것들을 모아서 이번 앨범에 실었다. 지금 생각으로는 나머지 곡들 2집에서 발표할 것 같다. 그게 조커의 음악이니까. 물론 추후에는 콘셉트나 장르적 노선을 정하고 앨범을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잇다.

Q. 세션을 직업으로 하는 연주자들은 바빠서 본인 앨범 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요새는 세션연주자, CF 방송 음악을 하는 이들이 본인의 앨범 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 중 대개는 기존 가요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조커의 음악이 실험적으로 들리는 것 같다.
조커: 동료들은 내 앨범에서 이번보다 훨씬 어려운 음악을 기대했다고 하더라. 내가 뭔가를 보여주려고 작정하고 앨범을 만들었으면 절대로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을 거다. 사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번 앨범의 음악들이 그리 신선하지도, 진보적이지도 않다. 그냥 연주자들에게 많은 자유로움을 주고 틀에 얽매이지 않은 정도다. 이 앨범이 진보적으로 들린다면 그것은 우리나라 음악시장이 빈약하기 때문일 것이다.

Q. 각 곡들에 다양한 연주 섹션들이 들린다. 기타리스트 홍준호 등 국내 정상급 연주자들이 참여했는데, 그들에게 이런저런 주문을 많이 했나?
조커: 전체 틀을 짜놓고, 맞춰야 하는 포인트를 숙지시키고, 나머지는 연주자들의 창의성에 맡겼다. 연주자들의 역량이 워낙 좋아서 믿고 맡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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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커 본인이 노래를 했다. 유희열의 토이와 같이 객원보컬을 쓸 생각은 안 해봤나?
조커: 그건 싫었다. 주위에서 토이처럼 객원보컬을 써보라는 말을 많이 하더라. 하지만 난 내 것을 하고 싶은 생각이 컸다. 최소 한 두 곡은 유명 가수가 피처링한 곡을 넣으라고들 제안했는데 난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노래를 잘하는 보컬리스트는 아닌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노래 잘하는 가수가 내 노래를 불렀을 때 감동을 줄 수 있느냐? 그건 아니다. 내가 만든 곡은 직접 불러야 그 느낌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Q. 공연 때 보니 피아노를 많이 연주하지 않고 노래에 집중하더라.
조커: 피아노 치면서 노래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Q. 여성 관객들은 피아노 치면서 노래하는 것을 좋아할 텐데?
조커: 그런가? 별 상관없다. 난 내 음악에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좋아할만한 포인트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내 음악은 남자들이 좋아할 것 같다.

Q. 왜 본인 음악은 여성보다 남성들이 더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나?
조커: 한국 여성들이 좋아하는 코드 진행이 있다. 내 음악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다. 내가 그 코드진행을 매우 싫어한다. 4도샵마이너세븐플랫파이브에서 4도마이너식스로 내려오는, 발라드에서 많이 나오는 전형적인 코드 진행이 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코드 진행 중 하나다. 음악이 너무 갇히는 느낌이 드니까. 나까지 그런 음악을 할 필요가 없다. 난 그것을 하면 안 된다. 절대로!

Q. 박주원을 비롯해 동료 연주자들이 조커를 천재라고 하는 이유는 뭘까?
조커: 내가 천재라니 말도 안 된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내 일상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평소에 연습을 거의 하지 않는다. 여태껏 혼자 30분 넘게 악기를 연습해본 적이 없다.

Q. 아니, 어떤 연주자건 운동선수처럼 혹독한 수련기를 겪지 않나?
조커: 난 그게 없었다. 그래서 그(천재)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다. 난 그런 수련기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인지 연주자로서 어느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자평하자면 감각이 좋은 정도랄까? 주원이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 “네가 연습을 했으면 브래드 멜다우 같은 사람이 됐을 거야”라고. 좋게 이야기하면 습득이 빠른 것인데, 단점은 한계가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Q. 앞으로는 세션과 본인의 음악을 병행하나?
조커: 앞으로 목표는 앨범을 많이 내는 것이다. 난 먹고 사는 것만 보장이 되면 20집까지도 낼 수 있다. 사실 세션연주자로 활동을 시작하면 매우 바빠지기 때문에 자기 음악을 하기 힘들다. 세션을 하면서 자기 음악을 포기하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나 같은 경우는 내 음악을 하기 위해 세션은 서서히 줄여나가는 중이다. 싱어송라이터가 세션 연주자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난 세션을 통해 음악적으로 배운 것이 많고, 음악적 욕구를 해갈했다. 앨범을 만들어보니 내 정체성은 싱어송라이터가 맞는 것 같다. 누구의 침해도 받지 않고 내 음악을 만드는 것이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일이더라.

글. 권석정 moribe@tenasia.co.kr
사진제공. 엔라이브 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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