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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 멀리건은 <셰임>에서 애정결핍과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위대한 개츠비>에서 지상 최고의 사랑을 파멸로 몰고 간다. 시쳇말로 참 ‘나쁜 기집애’다.

특정 패션지에서 유난히 사랑하는 여인들이 있다. 늘 그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파파라치 컷이 도배된다. 그녀들이 아무리 타고난 베스트 드레서라고 해도, 무작정 배우라고 부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다. 만약 작년 말에 혼자 팝콘을 먹으며 비호감 여배우 리스트를 작성했다면, 그 안에 꼭 캐리 멀리건이란 이름을 적었을 거다. 그녀는 배우가 아니라 그저 패셔니스타로만 보였다. 하지만 최근 그녀의 영화 두 편을 연달아 보고 마음을 바꿨다. ‘간만에 영국에서 배우가 하나 나왔구나’, 하는 감동의 탄성을 질렀다. 그녀는 1985년 런던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녀보다 열다섯 많은 레이첼 와이즈도 이곳 태생이다. 그녀의 영화 데뷔작은 키라 나이틀리의 <오만과 편견>(2005)이었다. 누구나 키라에게 신경을 쓰기에 분주했으므로, 캐리가 안중에도 없는 건 당연했다.

(위), <드라이브>, <네버 렛 미 고>(아래 왼쪽부터) 스틸" /><언 애듀케이션>(위), <드라이브>, <네버 렛 미 고>(아래 왼쪽부터) 스틸

사실 <언 애듀케이션>(2009)의 제니 역을 맡을 때까지 그녀는 무명에 불과했다. 1960년대 초, 옥스퍼드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하던 소녀 제니는 연상남 데이빗의 유혹에 빠져 세상의 쾌락을 조금 빨리 맛본다. 안나소피아 롭이 <캐리 다이어리>에서 1980년대 중반의 뉴욕과 사랑에 빠지듯이, 그녀가 연기한 제니도 파리와의 사랑을 격렬하게 즐겼다. 파리의 밀월여행에서 그녀는 오드리 헵번을 연상시키는 번 헤어스타일을 동원하며, 패션에 관심 좀 있는 언니들 사이에서 간지녀로 급부상했다. <월 스트리트: 머니 네버 슬립스>(2010)에선 그냥 샤이아 라보프와 염문을 좀 뿌리는 정도였다. 더욱이 <네버 렛 미 고>에서 키라 나이틀리가 신경 쇠약의 루스를 매혹적으로 표현하는 동안 그녀는 청순한 척하는 게 전부였다. 심지어 백치스럽다는 인상마저 풍겼다. 결정타는 <드라이브>의 아이린이었다. 나쁜 남자의 매력을 무한대로 발산한 라이언 고슬링은 여기서 제2의 스티브 맥퀀으로 등극했지만, 정작 그녀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밋밋했다. 설령 남자들에게 보호 본능을 자극할지는 몰라도, <다크 나이트>의 먹튀 매기 질렌할처럼 존재감이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작년에는 뮤지션 마커스 멈포드와 결혼해서 화제를 모은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갑자기 그녀에 대한 편견을 버리기로 마음먹은 것은, <셰임>과 <위대한 개츠비> 때문이다. 노골적으로 심하게 표현하자면, 그녀 캐릭터는 못 말리는 ‘진상녀’다. 하지만 지금껏 청순미로 일관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셰임>에서 패스벤더의 골칫거리 동생 씨씨로 출연한 그녀는 클럽에서 피아노 반주에 맞춰 ‘뉴욕, 뉴욕’을 부른다. “난 그 도시에서 깨어나고 싶어요”라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에서 어딘가 병적인 기운이 감지됐다. 이미 캐리는 2010년 벨 앤 세바스찬의 노래 ‘write about love’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적이 있지만, 너무 귀엽기만 한 목소리여서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이 영화 속의 노래는 순수하면서도 약간 끈적거리고, 심지어 스스로를 주체할 수 없는 우울한 열정이 솟아났다. 결국 이 애정결핍녀는 손목을 긋는 자살 시도를 하고 피범벅이 된다. 병실에 누워있는 그녀의 휑한 눈에서 드디어 사람의 냄새가 풍겼다. 그녀의 슬픈 노래가 탈출구 없는 미래에 대한 애도였다면, <위대한 개츠비>에서의 그녀의 춤은 속물의 몸짓이었다.

(위), <위대한 개츠비>(아래) 스틸" /><셰임>(위), <위대한 개츠비>(아래) 스틸

<위대한 개츠비>는 한 남자의 헌신적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런 사랑을 쟁취할 용기가 없는 여인의 이야기다. 1920년대 뉴욕에서 유행한 플래퍼 룩과 보브 헤어스타일을 선보인 그녀는 단번에 모던 걸의 아이콘 루이즈 브룩스를 떠올리게 만든다. 캐리가 연기한 데이지는 우유부단함과 사랑스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녀의 망설임은 결국 파국의 씨앗이 된다. 데이지 캐릭터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캐리는 순수와 무개념을 오가며 소화하고 있다. 데이지에 대해 “참 예쁘지만 짜증 돋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캐리에게 최고의 찬사가 될 것이다. 갈대처럼 흔들리는 여인의 초상이란 바로 그런 것이니까. 최근 캐리는 코엔 형제의 60년대 음악영화 <인사이드 르윈 데이비스>에서 청순표 긴 생머리로 등장했다. 하지만 역시 캐리는 짧은 ‘촙(chop)’ 스타일 컷이 어울리는 잇 걸이다. 먼 훗날, 1990년대에 멕 라이언이 있었다면 2010년대엔 캐리 멀리건이 있었다는 말이 나올 거다. 부디, 그녀가 스타일로만 기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글.전종혁 (대중문화평론가) hubul2@naver.com
편집.홍지유 jiyou@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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