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명석의 100퍼센트] <로열 패밀리>, 재벌 드라마가 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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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는 마치 다음회가 없는 것처럼 모든 이야기를 쏟아 붓는다. 2회 만에 여주인공이 그저 착한 여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남녀 주인공 사이의 비밀은 3, 4회에 걸쳐 모든 사람들에게 폭로된다. 그 사이 ‘K’라 불리던 여주인공, 김인숙(염정아)은 시어머니인 JK그룹 오너 공순호(김영애)가 자신을 금치산자로 만들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 주인공의 출발점은 모든 것이 최악이고, 그를 구원하는 것은 오직 60여분 내내 빼곡하게 채워진 에피소드의 힘이다. 첫 회에서 김인숙은 공순호 일가가 사는 정가원의 작은 방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4회에서는 공순호의 딸 조현진(차예련)과 나름의 거래를 한다. 이야기의 전개 속도는 말도 안 되게 빠르고, 위기는 끊임없이 다가오며, 이야기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다. 어쩌면 의 제작진은 시청자에게 게임을 거는 건지도 모른다. 그들은 김인숙처럼 스스로를 해결 불가능한 상황에 던져놓고, 이야기의 힘으로 헤쳐 나간다.

계급의 차이가 인간성의 유무를 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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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초반이기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에피소드가 촘촘한 드라마일수록 제작 스케줄에 쫓기면서 완성도가 급락하는 경우도 있다. 다만 는 단지 초반의 빠른 전개를 위해 에피소드를 짜낸 것은 아니다. 의 모든 에피소드는 결국 정가원 사람들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한지훈(지성)이 JK법무팀의 변호사가 돼 김인숙을 돕는 것은 김인숙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후원했기 때문이다. 한지훈은 조현진에게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으려면 호칭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은 역으로 관계가 곧 호칭을 규정한다는 의미도 된다. K가 김인숙이 되려면 정가원 사람들과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돼야 한다. 이 관계는 또 다른 관계에 의해 성립된다. 김인숙의 동서들은 다른 재벌 그룹이나 정치인의 딸이다. 김인숙은 JK그룹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대권주자의 아내, 진숙향과의 친분 때문에 공순호에게 ‘인간’ 취급 받을 가능성이 생긴다.

정가원에서 한 개인이 스스로 자신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JK그룹에 쓸모 있는 누구의 딸, 누구의 친구여야 JK의 며느리, JK의 올케도 될 수 있다. MBC 은 막대한 부와 권력을 두고 골육상쟁을 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건 재벌의 권력이 ‘왕회장’ 시대에서 그들의 아들들로 넘어가던 시대의 이야기다. 반면 는 총수의 이념이 가문 전체에 내면화된 시대의 재벌 이야기다. 공순호의 남편은 죽었지만, 공순호는 정가원을 통해 JK에 가장 어울리는 인간을 길러낸다. 첫째 며느리 임윤서(전미선)는 남편 조동진(안내상)의 불륜 자체보다 “격 떨어지는” 정가원의 메이드를 대상으로 삼은 것에 분노한다. 조현진은 자신이 한지훈과 김인숙 ‘따위’에게 속았다는 것을 참을 수 없다. 타인과의 관계가 곧 자기 증명이 되는 정가원에서의 삶은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마저 뒤틀어 놓는다.

부터 까지 한국의 재벌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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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드라마의 제목이 원작 을 따오는 대신 를 붙인 건 흥미롭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흔히 로열 패밀리로 불리지만 동시에 우리와 다른, 또는 인간과 다른 어떤 존재다. 유학을 간 딸이 맹장이 터져도 “영어로 얘기해”라고 말하는 어머니. 가슴 모양이 무너지기 때문에 모유수유를 할 수 없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며느리. 정가원이 지향하는 인간상이 내면화 된 사람들이 벌이는 일은 섬뜩하다. 는 한 재벌가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뽑아내고, 그 에피소드는 시청자의 상식을 벗어나지만 작품 내에서 논리적 일관성을 가지면서 시청자에게 충격과 흡인력을 동시에 준다.

에서 묘사되는 재벌 가문의 생활이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건 를 비롯한 일련의 재벌 드라마가 보여주는 어떤 징후다. 25년 전 KBS 에서 한 재벌 총수의 이야기를 다룰 때,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자수성가에 성공한 ‘우리 중의 누군가’였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재벌 2세들은 돈은 많았지만 세상에 어리숙한 모습으로 등장해 평범한 여자와 조건 없는 사랑에 빠졌다. 2000년대 중반부터 SBS 까지 이어진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에서는 재벌 2세와 평범한 여자의 계급문제를 드러냈지만, 결국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지었다. MBC 은 그 모든 역사를 가진 재벌 흥망사를 보여줬다. 그리고 우연스럽게도 이 한국 재벌사를 거의 정리해나간 지금 가 나왔다. 그들은 이제 우리와 재산이 다르고, 계급이 다른 것을 넘어 ‘인간’ 자체가 다르다. 그리고 김인숙과 한지훈은 로열 패밀리의 한가운데 들어가 자신들도 ‘인간’임을 증명하려 한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 그러나 우리도 ‘인간’이다. 재벌에 대한 시청자의 인식이, 그리고 재벌 드라마가 무언가 변하기 시작했다.

사진제공. MBC

글. 강명석 two@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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