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은 계속 될 수 있을 것인가. 10여년 만에 부활한 KBS <전설의 고향>이 올 여름에도 어김없이 안방을 찾는다. 지난해, KBS는 역사 깊은 콘텐츠에 대한 자부심을 내비치며 최수종, 이덕화 등의 스타 배우들과 각 작품의 연출자와 작가들이 대거 제작 발표회에 참석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그러나 시청률 경쟁에서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탓인지, 8월 5일 KBS 신관에서 열린 올해 <전설의 고향> 제작 발표회는 김지석, 이영은, 전혜빈, 정겨운, 조윤희, 장희진, 김태호, 김형미, 지성우 등 작품에 출연한 주요 연기자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 되었다.

“포스터부터 무섭게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

2008년 <전설의 고향>이 표방한 것은 전통적인 소재에 대한 현대적인 해석이었다. 단막극 구성인 탓에 전체적으로 균질한 분위기를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전혀 새로운 줄거리를 구축하고 컴퓨터 그래픽으로 모습을 재현한 ‘구미호’ 등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올해 <전설의 고향>은 ‘여름 특집 공포물’이라는 본령에 더욱 충실하고자 한다. 작품들의 총괄 프로듀서를 맡은 함영훈 감독은 “명색이 <전설의 고향>인데 ‘안 무섭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되겠나. 올해는 특히 ‘공포’에 초점을 맞추었다. 포스터부터 무섭게 보이도록 신경을 썼다”며 프로젝트의 방향을 설명했다. 제작 발표회 현장에서 공개된 하이라이트 영상에서도 예년에 비해 더욱 자극적이고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구현되는 분장을 통해 이러한 성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콘셉트가 분명해진 대신 새로운 방식에 대한 고민과 시도는 다소 소극적으로 변하기도 했다. 지난해 ‘구미호’에 이어 올해 ‘계집종’에 출연하는 김태호는 “올해는 보다 전통적인 요소들이 많아져서 작년과 확실히 다른 느낌이다. 그렇지만 공포의 정도는 확실히 더해졌다고 자신한다”며 전체 드라마의 성격을 정리했다. <선덕여왕>의 귀신보다 무서운 미실을 이기고 진짜 혼령들이 선전할 수 있을까. 8월 10일, 첫 번째 에피소드 ‘혈귀’를 필두로 <전설의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이 시작된다.

혈귀 (이민홍 연출/ 김정숙, 김랑 극본)
MBC <놀러와>에 출연해 ‘사극 최초 남자 흡혈귀’를 연기하는 어려움을 토로했던 김지석은 제작 발표회에서도 “분장에 시간도 많이 걸렸고, 제작된 피를 물고 연기하는 것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참고할 모델이 없어 고민을 많이 했다”며 홍보를 노린 엄살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다른 분이 남자 흡혈귀 역을 맡는다면 내 연기를 찾아보지 않겠나”며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전설의 고향> 사상 최초로 시도되는 남자 흡혈귀기 이야기인 ‘혈귀’는 흡혈 박쥐의 등장, 운명적인 러브 스토리, 흡혈귀 사냥꾼의 위협 등 서구의 흡혈귀 이야기와 유사한 플롯을 보여준다. 그러나 인간으로 환생하기 위하여 숫처녀 아홉 명을 흡혈해야 하는 혈귀(김지석)의 운명이나 그런 혈귀를 위해 희생을 서슴지 않는 연(이영은)의 지고지순함은 분명 전통적인 정서에 기반하고 있다. 따라서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 못지않게 두 주인공의 러브스토리가 주요한 내용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키스신이 두 번이나 있다”는 김지석의 증언은 그러한 예상에 더욱 힘을 싣는다.

죽도의 한 (김정민 연출/ 문은정 극본)
집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개인의 한풀이는 <전설의 고향>의 단골 소재다. ‘죽도의 한’은 정치적인 견해 때문에 희생된 집단의 원한을 배경으로 하면서 신분의 차이 때문에 이별한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정여립(김갑수)은 역모죄인이 되고, 그를 따라 죽도로 모여들었던 섬사람들은 그에게 동조한 죄로 떼죽음을 당한다. 상헌(정겨운)은 비천한 신분을 비관하여 죽도로 떠난 연인 미향(조윤희)을 찾기 위해 죽도 토벌대를 자청한다. 그러나 토벌대원들은 한명씩 죽어가고, 대원들은 공포에 휩싸인다. 기습적인 공포를 조장하기 보다는 분위기로 스산함을 연출하는 작품으로 정겨운은 “영화 <알포인트>와 비슷한 느낌 일 것”이라는 말로 작품을 설명하기도 했다.

계집종 (홍석구 연출/ 박형진 극본)
몰락한 양반 가문의 선비를 사랑한 어린 노비의 집착과 한을 그리는 ‘계집종’의 줄거리는 흡사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연상시킨다. 심지어 양반의 자제인 이랑(김태호)은 멸문 가문의 딸을 짝사랑하고, 그런 이랑의 비밀스러운 태도를 오해하고 사랑을 키우는 수진(장희진)의 엇갈린 감정이나 비천한 계집종의 태도에 분노하여 그녀에게 극단의 조치를 가하는 이랑의 홀어머니(서갑숙)의 위선적인 태도는 더더욱 김기영 감독 풍의 서스펜스를 느끼게 한다. “복수를 하거나 한풀이를 한다기보다는 생전의 철없는 모습이 혼령이 되어서도 이어진다. 사랑했던 사람의 옆에 있고 싶은 마음 때문에 자꾸 나타나서 장난치는 귀신이다”라는 장희진의 설명은 언뜻 귀여운 귀신의 탄생을 예감케 한다.

목각귀 (문영진 연출 / 채혜영, 유승연 극본)
단막극의 부활이 불투명한 가운데, <전설의 고향>은 신진 작가들의 능력을 시험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상황은 배우들에게도 적용된다. 올해 5년 만에 부활한 공채 탤런트 선발에서 배우의 길로 들어선 김형미와 지성우는 ‘목각귀’에서 주연을 맡으며 시청자들에게 연기를 평가받을 수 있는 시험대에 오른다. 내의원 의관댁 며느리 소현(김형미)은 마마에 걸려 몰골이 흉측한 어린 아이를 불쌍히 여겨 몰래 집안에 들인다. 그러나 이후 집안에는 기괴한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이를 계기로 소현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업둥이에 대한 집안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리고 수상한 사건들과 관련한 목각 인형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

구미호 (신현수 연출 / 이은상 극본)
지난해 컴퓨터 그래픽의 도입과 새로운 설정으로 색다른 구미호를 선보였던 것과 달리, 올해 ‘구미호’는 보다 전통적인 내러티브 안에서 구현될 예정이다. 고려시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가져다준다는 여우구슬에 대한 욕심으로 구미호 사냥이 성행하자 대부분의 구미호들이 목숨을 잃는다. 이 와중에 살아남은 구미호(전혜빈)는 인간의 모습으로 둔갑해 순박한 곰보 총각 연돌(안재모)을 만나 평범한 가정을 꾸린다. 구미호 아내를 얻은 후 얼굴의 흉터가 낫는 것은 물론 많은 재물을 얻게 된 연돌은 순수하고 헌신적이던 처음의 마음과 달리 점점 세속에 찌들어 가고, 구미호는 그런 연돌을 보며 크게 실망한다. 백발에 여우 괴물의 모습을 한 전혜빈의 분장은 다소 과거 회귀적이지만 “감독님이 아날로그적인 공포를 원하셨다. 다른 팀 촬영장에 염탐을 갈 정도로 열정적으로 연출을 하셔서 배우들이 고생이 많지만, 그만큼 기대도 크다”는 전혜빈의 증언을 믿는다면, 클래식한 공포를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관전 포인트
‘납량 특집’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전설의 고향>과 실질적인 경쟁을 하게 될 것은 동시간에 방송되는 <선덕여왕>이나 <드림>이라기보다는 MBC의 <혼>이 될 것 같다. <혼>의 김상호 감독이 “오싹함’ 보다는 ‘서늘함’에 가까운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고 말하며 이 작품이 결국은 ‘인간이 주는 공포’에 대한 것임을 역설한 반면, <전설의 고향>은 아성에 모자라지 않는 ‘확실한 공포’를 노린다. 10편의 단막들은 혁신적이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무서운 장면 연출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이는 올 여름의 시청률을 확보하는 것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사안이다. 올해 역시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않는다면 <전설의 고향>은 다시 한 번 전설 속으로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경제적이지 않은 대상을 제거하는데 가차 없는 것이 작금의 세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공포에 다름 아니다.

사진제공_ KBS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