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이후, 호불호 논란이 펼쳐지는 이유는
거시적 관점과 미시적 관점의 충돌
미야자키 하야오가 건네는 삶의 질문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대원미디어(주)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대원미디어(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애니메이션 영화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작품이다. 하지만 뚜껑이 열린 뒤 작품을 놓고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고 있다. 4일 기준 네이버 영화평점은 6점 후반대까지 떨어지면서 악평 세례를 받고 있는 모양새다. 예술성과 대중성을 두루 잡았던 미야자키 하야오, 그리고 그가 이끄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신작이 왜 이토록 냉혹한 평가를 받게된걸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무언가 텅 비어버린, 고요함이 느껴지는 영화다. 그간 '이웃집 토토로'(2001),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2),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에서 보여주던 소년과 소녀가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발걸음에 맞추던 통통 튀는 선율 대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지나온 시간을 발굴하는 차분함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기존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정수를 느끼고 싶던 관객들이라면, 흠칫하고 놀라게 될지도 모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제2차 세계대전 상황에서 엄마를 잃은 도쿄 소년 마히토가 아버지의 재혼으로 시골로 내려가가며우연히 미스터리한 왜가리와 함께 신비로운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실제로 초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1937년 발행된 요시노 겐자부로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영화의 제목을 차용했다고 전했다. 영화 '바람이 분다'(2013) 이후, 10년 만에 은퇴를 번복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제작한 이유에 대해서 "오랫동안 피해왔던 것을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도저히 은퇴할 수 없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대원미디어(주)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대원미디어(주)
물론 '그대들'이라는 타자(관객들)에게 질문을 건네는 형식의 제목은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쉬이 대답할 수 없는 철학적인 물음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관람한 관객들에게 치열한 논쟁거리를 만들어냈다. 영화는 삶이라는 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경로 안에서 헤매이는 인간들에게 물음을 던지는데, 그동안 미야자키 하야오가 보여주던 동화적인 측면보다는 고단한 삶을 버티고 이겨내야 하는 리얼리즘적인 연출은 낯설기까지 하다. 그로 인해 한국 관객들의 '난해하고 불쾌하다'는 평과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정수'라는 극단적인 평이 이어지고 있다.

영화의 오프닝은 전쟁으로 인한 폭격 탓에 마히토의 어머니가 근무하는 병원에 불이 나면서 그 기억의 잔상에서 벗어나는 못하는 소년 마히토의 상흔을 보여준다. 스스로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무력한 상황은 소년을 제자리에 주저앉게 만든다. 피투성이가 된 마음이 복원되기도 전에 마히토의 아버지는 아내의 동생 나츠코와 재혼하게 된다. 어머니를 똑 닮은 나츠코에게 묘한 악의를 느끼는 마히토는 새로운 환경에 마음을 붙이지 못한다. 와중에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왜가리는 마히토 앞에 나타나서 '엄마를 보고 싶지 않냐'며 새로운 세계 안으로 마히토를 이끈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대원미디어(주)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대원미디어(주)
마히토가 이세계(異世界)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시간의 폭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최대한 늘려놓는다. 소년이 애써 견뎌내야 하는 버거운 현실에 관객들은 긴 시간 노출되고 동시에 동화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배다른 동생이 생기는 상황은 마히토를 자꾸만 외부의 세계에 관심을 가지도록 한다. 이 지점이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포인트다. 아무리 전쟁 상황이라고는 하나, 아버지의 재혼 그것도 그 대상을 납득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논란이 불거진 지점은 군수물자 산업을 하는 마히토의 아버지다. 이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반영한 지점인데 실제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버지는 전쟁 중 군수물자 공장을 운영했고 1941년생인 하야오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다툼이 종종 있기도 했다고.

지브리 영화의 집약체이자 하야오 감독의 정수라는 평도 잇따른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톺아보면, 공통으로 불, 물, 바람과 같은 원소를 은유적으로 풀어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바람이 분다'와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는 제목에서 바람과 구름을 직관적으로 풀어냈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하쿠는 강의 신이었으며,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불 원소를 캐릭터화해서 성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 되어줬다. 하물며 초기작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는 이런 대사가 나오기도 한다. "지나치게 쓰면 아무것도 안 남아. 불은 숲을 하루에 재로 만들지. 물과 바람은 백 년 걸려서 그 숲을 키웠는데 말이야. 우린 물과 바람이 더 좋아"라는 말은 하야오 감독이 해당 원소들을 사용하는 의미를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마히토의 엄마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 역시도 화염이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대원미디어(주)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대원미디어(주)
형태를 고정하지 않고 수시로 모양을 바꾸는 원소들은 하야오가 늘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어린아이 캐릭터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스갯소리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변화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외형은 달라졌어도 하야오 감독이 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동일하다.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뭉뚱그려진 서사일지라도 지브리 팬들이 모든 것을 압축한 것 같다는 평을 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인지도 모른다.

1940년대 전쟁 상황에서 일본인 소년 마히토가 겪는 참상이라는 거시적 관점과 자신의 세계를 구축해나간다는 미시적 관점 경계는 영역을 오가며 충돌하고, 그로인해 괴리감이 생긴다. 애써 외부적인 요소를 지워내고 보더라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파편적인 형태를 납득하기 버거울 수 있다. 그럼에도 영화에서 마히토의 여정이 의미 있는 이유는 마히토는 자신의 큰할아버지가 세운 이세계를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세계를 세우기 위해서 문을 연다는 지점이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주)대원미디어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주)대원미디어
악의 없는 세계를 세우겠다는 일념으로 만든 큰할아버지의 공간 안에는 이미 피로 물든 죽음이 자리하고 있다. 공간에서 주목할 지점은 앵무새와 펠리컨, 인간으로 새로 태어날 와라와라가 모두 '떼를 지어 몰려다닌다'는 것. 거대한 집단은 전쟁이라는 배경이 포개지면서 일종의 군대 같은 형상을 띄고, 마히토는 집단에 휩쓸리는 개인이 된다. 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 다니던 왜가리와 히미, 나츠코, 마히토는 주체적인 사상과 행동을 위해 나아가는, 감정적인 묘사가 이뤄진 반면 펠리컨 떼나 앵무새 떼들은 개별적 생각이나 가치보다는 명령 혹은 앞장선 누군가를 따라 움직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새들을 보고 징그럽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캐릭터성이 소거된 집단으로 그려지기 때문일 것이다.

집단이 구축한 가치 안에 물들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에 마히토는 그들을 피해 새로운 통로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나츠코에게 가졌던 악의는 여러시간이 교차한 이세계 안에서 사라진다. 그간의 미야자키 하야오가 표현해온 모험들이 같은 또래의 우정을 나누는 친구나 미지의 존재로 은유 된 것들과의 동행이었다면, 이번 마히토의 여정은 세대의 가치와 자신만의 고유성을 확대하는 것에 가깝다. 그런 의미에서 초기작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와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 그려진 부해, 외부의 침략으로 망가진 이전 세상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고 재생해서 살 것인지에 맞닿는 지점이 있다.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대원미디어(주)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스틸컷. /사진제공=대원미디어(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두고 숱한 논란들이 벌어지지만, 그럼에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그린 세상은 언제나 매혹적이다. 10대의 소년, 소녀의 존재는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 희망이자 바로 잡을 기회를 의미한다. 80대의 노장인 그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이유와 관객들이 그의 영화에서 왠지 모를 따스함을 느끼는 것은 명랑하고 똑 부러지는 캐릭터를 통해서 치유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전작들에 비해서 어른스럽고 침울한 느낌의 캐릭터이지만, 엄마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득 안은 소년이다.

다만 이번 작품에 대한 반응을 보자면 지브리 스튜디오로선 고민할 거리가 생긴 셈이다. 대중성 측면에서 외면받기 시작한다면 그들의 작품이 점점 '매니악' 스러운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작품을 본 관객들이라면 제목이 지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의 거창하게 받아들이는 대신 삶을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향키로 생각하면 어떨까.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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