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얼굴을 탐구하는 감독
폐허가 된 공간과 시선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전작들
폐허가 된 공간과 시선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전작들
≪이하늘의 롱테이크≫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겸 영화평론가)가 한 호흡으로 화면을 길게 보여주는 롱테이크 촬영 기법처럼, 영화 속 장면이나 영화 이야기를 심층 분석합니다.
영화감독이 자신만의 고유한 연출 기법을 여러 작품에 걸쳐 적용하고 그걸 관객들이 알아차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연출 기법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선명히 드러나야 하고 그게 그만의 고유한 기법이 돼야 한다. 작품만 보고,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조차 '앗 이 감독 작품이네' 하는 경우다. 그런 이들을 '거장'이라 부른다.
독일 영화감독인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거장으로 불리는 많은 이유 중 하나도 그의 연출 기법에 있다. 그의 영화를 보고나면 영화속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영화 '어파이어'에서 레온(토마스 슈베르트)가 숙소로 향하며 창밖을 내다보던 얼굴, '운디네'에서 운디네(폴라 비어)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불편해하던 옆얼굴, '트랜짓'에서 창문 밖의 뛰어가는 붉은 원피스의 마리(폴라 비어)의 스치듯 지나가는 얼굴까지. 영화의 스토리 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얼굴이 관객들 머릿속에 뚜렷하게 새겨진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각 인물들을 어떻게 탐구하고 그 세밀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영화를 보는 재미가 될 수 있다. 13일 개봉하는 영화 '어파이어'는 기존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전작보다는 한층 무거움을 덜어낸 느낌이다. '어파이어'는 소설가 레온이 여름의 발트해의 숲속 별장으로 남은 원고를 적으러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곳에서 네 명의 젊은 남녀가 모여 욕망과 사랑, 분노와 같은 불길이 산불과 함께 겹친다. 2023년 제7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어파이어'의 매력은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는 태양과 거친 자연 아래에서 자꾸만 방황을 잃는 청춘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Wallners의 'in my mind' OST로 담담하지만 증폭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열기는 '어파이어'의 이미지 위에 각인된다. 소설의 완고를 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 레온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에 예민함이 고조된다.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와 단둘이서만 조용히 지내는 여름을 기대했건만, 어지러진 테이블과 곳곳에 떨어진 옷가지처럼 혼돈의 연속이다. 틀 안에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나디아(폴라 비어)의 행동은 하나같이 떨떠름하지만, 왜인지 시선이 간다. 풀럭이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마당 밖으로 나가는 나디아를 창문을 경계로 처음 목격한 레온. 이후 나디아가 지닌 특유의 싱그러움에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지만, 분출하기보다는 꾹꾹 눌러 담는다. '어파이어'를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으로 읽어낼 수도 있을 테지만, 숙소의 피어난 곰팡이처럼 전조증상을 보이며 다가오는 산불 즉 환경에 관한 영화로도 시선을 비틀어볼 수 있다. 소설을 쓰는 일 이외에 설거지나 청소는 번잡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회피하거나 방관하기 때문이다.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음과 산불, 친구들은 레온에게 있어 방해 요소로만 비친다. 그런 레온을 집어삼키며 천천히 활활 태우는 것도 바로 불이다. '운디네'에 이어 '어파이어'까지 원소 3부작으로 불리는 이 영화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어파이어'를 관람하기 이전에 보면 좋을 다른 전작들을 소개한다.
*개봉 년도는 현지 기준
◆ 영화 '운디네'(2020) 가라앉고야 마는 사랑의 공간 '운디네'는 '상처는 흔적도 없이 복원될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인 것만 같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운디네(폴라 비어)는 반대편의 사랑하던 남자 요하네스(제이콥 맛쉔즈)의 침묵에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날 사랑한다며, 영원히"라고 외치는 운디네의 말이 무색하게도 말은 허공에 흩날려 남자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운디네를 쳐다보는 남자가 앉아있을 뿐이다.
카페에서 기다린다는 요하네스를 뒤로 하고 운디네는 직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창문만 내려다보면, 보이는 남자는 손에 잡을 듯 잡을 수 없는 환영인 것처럼 보인다. 역사학자인 운디네는 베를린 도시주택 개발위원회를 대표해서 90년대 통일 이후 과거 동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개발에 대해 컨퍼런스를 진행한다. 영화는 과거의 베를린과 현재의 베를린을 중첩하며 운디네의 사랑 역시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베를린(Berlin)은 슬라브어로 '습지의 마른 땅' 혹은 '습지'인 베를(Berl)에서 유래된 말로, 즉 습지 지대에 세워진 도시를 의미한다. 그만큼 주요한 배경이 되는 베를린에서 운디네의 사랑은 축축하지만 습한 느낌이 든다. 요하네스 이후 사랑하게 되는 연인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와의 첫 만남은 깨진 어항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함께 맞으며 시작된다. 산업 잠수사로 일하는 크리스토프와 역사학자 운디네 모두 지나간 날의 흔적을 복원하는 일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물속에 가라앉은 역사와 물 위에의 도시에 세워진 건물의 역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일까. 운디네와 크리스토프는 기차라는 이동 수단으로 서로의 집을 왕래해야만 한다. 이전에 요하네스가 같은 베를린에 있던 것과는 달리 두 연인은 분리되고 결합하기를 반복한다. 두 사람은 물 밑에 들어가 '운디네'라는 이름이 적힌 난파된 배를 보려고 하지만 그 순간 운디네는 크리스토퍼의 옆에서 사라져 의식을 잃는다.
절묘한 순간이다. 정신을 잃고 해수면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 떠오른 운디네는 크리스토프를 통해 다시 육지로 올라오면서 호흡을 되찾는다. 원소 3부작이라고 불리는 '운디네'는 Undine라는 서양 연금술에 등장하는 물의 요정으로서 일편단심이고 배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극 중에서 운디네가 물과 가까운 크리스토프를 만나며, 생기를 되찾아간다면 반대로 크리스토프는 자꾸만 메말라간다. 두 사람의 포개질 수 없는 상황은 결국 한 사람이 물 밑으로 가면서 종결된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운디네이지만, 크리스토프의 상처는 매일 밤 찾아오는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 영화 '트랜짓'(2018) 서로를 향해 맴돌지만 도달할 수 없는 경유지 '트랜짓'에서 모든 인물은 한 마디로 붕 떠 있는 상태다.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는 체류증이나 비자가 없기에 쫓겨야만 하고, 남편 바이델의 흔적을 찾는 마리(폴라 비어)는 지치지도 않는지 도시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정착할 수 없이 자꾸만 내몰리는 이들은 지금 독일이 아닌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있다. 한참 제2차 세계대전 중인 독일로 병사들이 진군해오는 탓에 타국으로 몸을 숨긴 것이다. 누구 하나 반기지 않는 난민이 된 게오르그는 자신의 존재를 지워내고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게오르그는 친구에게 받은 부탁, 작가 바이델에게 편지를 전달해주는 과정에서 이름과 얼굴을 타인의 것으로 덧씌우게 된다. 편지의 주인인 바이델은 이미 호텔방에서 자살했고, 신원 미상의 시신이 되어 어딘가에 묻힌 것. 그가 남긴 소설 원고와 이미 받았던 두 장의 편지를 품에 안고 떠난 마르세유에서 중심을 잃어버린 듯한 여자 마리를 목격하게 된다. 등을 돌린 게오르그의 뒤에서 자꾸만 나타나는 마리는 자신이 원하던 얼굴이 아닌 양 다시 돌아선다. 어쩌면 이 점이 게오르그와 마리가 빙빙 돌면서 서로를 찾지만 끝내 당도할 수 없는 이유다. 영사관에 찾아가 게오르그의 이름으로 브라질 가는 배를 신청하고, 바로 뒤에 마리는 게오르그를 좇는다. 게오르그가 전달하려던 편지와 이미 바이델이 받았던 두 장의 편지가 이를 설명해준다. 게오르그의 편지는 마리가 바이델을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으나, 바이델이 사망 직전에 읽은 편지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이별 선언이었다. 두 편지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게오르그와 마리가 어긋나는 상황과도 맞물린다. 바이델의 이름과 여권을 사용하지만 바이델에게 게오르그는 완벽한 바이델이 될 수 없다. 얼굴과 이름이 분리되는 상황에서 게오르그가 마리를 향해 키워오는 마음은 종착지를 설정할 수 없는 공허함만을 남긴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뮤즈인 배우 폴라 비어가 연기한 마리는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은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말처럼 유려한 몸짓으로 예상 불가능한 얼굴을 보여준다. 거리를 활보하며 바이델의 흔적을 찾는 마리의 모습은 현상된 사진 속에선 '그 자리'에 있었겠지만, 곧 사라져버릴 신기루처럼 연출되기도 한다. Transit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통과와 환승을 의미하는 만큼 게오르그가 마리에게 끌리는 마음은 뿌리를 내릴 수 없으며, 두 사람의 운명은 예정되어 있다.
◆ 영화 '피닉스'(2014) 모두 타버린 폐허에 남은 고통스러운 침묵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붉은색이 지닌 정열적인 이미지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강렬함의 양면성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파이어'는 불 원소를 소재로 하고 심지어 나디아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트랜짓' 역시 마리의 옷은 붉게 물든 원피스, '피닉스'에서 니나 호스가 연기한 넬리도 비슷한 의상을 입고 나온다. 그의 영화가 지닌 인장처럼 느껴지는 붉은색 옷을 입은 여성의 존재는 '피닉스'에서 독보적이다.
1945년 6월 아우슈비츠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넬리(니나 호스)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성형수술을 하고 찾아 나선 조니(로날드 제르필드)는 당연히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참사를 겪은 이후 훼손된 신체는 겉보기에는 수술로 재건된 듯하지만, 무심하게도 서로를 인지할 수 없는 상황처럼 균형은 무너진다. 즉, 완벽한 재건은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피닉스'의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넬리의 신체를 절단하는 표현법을 택한다. 넬리가 두 번째로 조니의 집에 찾아간 날, 계단을 내려오는 넬리의 상체는 프레임 안에서 의도적으로 잘려있다. 카메라는 무빙을 통해 보여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게다가 조니는 계단을 내려오는 넬리를 보며, 다시 내려오라고 소리친다. 일방적 언어 전달로 인한 또 한 번의 신체 절단이다. 그렇게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내려온 넬리는 언어의 실패 또한 마주한다. 필체를 재현하는 행위는 언어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데, 감정이 담긴 문장들은 가짜 아내 연극과 맞닿아 본래 의미를 잃고 텅 빈 문장들로 변모한다. 조니와 넬리는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편지 적는 행위를 지속하는데, 이때 조니는 일방적으로 발신하는 자다. 반대로 넬리는 실패한 수신자다. 자기부정을 통해 편지에 적힌 문장들을 옮겨 적을뿐, 수신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레네가 넬리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또한 앞선 언어 실패의 연장선이다. 편지는 넬리가 수용소를 들어가자마자 조니가 이혼을 요구했다는 객관적 정보와 함께 레네의 주관적 감정, 이중적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레네의 권총 자살 이후, 남겨진 편지는 그 당시가 아닌 시간이 경과된 후 수신된다. 누락된 시간 안에서 의미는 변질되어 누군가의 입(가정부)을 통해서 전달받게 된다. 페촐트는 레네의 죽음 또한 시각적으로 차단하는데, 앞서 말한 넬리의 훼손된 얼굴을 군인들의 반응 숏으로 대체한 것과 그 의미가 같다.
이처럼 페촐트가 설계한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올리는 그들의 위장 연극은 참혹하면서 아름답다. 도시의 명과 암은 외부와 내부 공간을 구분 짓는다. 넬리가 조니를 발견한 것이 클럽 피닉스의 내부(Inside)라고 하면, 조니가 넬리에게 연극을 제안한 것은 클럽 피닉스의 외부(Outside)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내부는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를 찾아볼 수 없이 밝은 공간이며, 외부는 폐허가 된 어두운 도시를 조명한다. 클럽 피닉스는 복원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상징하는 공간이지만, 그 외부에서 만남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넬리의 재건된 얼굴과는 달리 관계 회복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클럽 피닉스에서는 'Speak Low' 음악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노래는 언어의 층위보다 한 단계 높은 감정의 고양이 가능하다. 지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넬리와 피아노를 치는 조니는 참사 이전의 시간을 재현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넬리의 팔에 새겨진 수감번호는 이들이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언어의 반복적인 사유는 가능할지 몰라도 뱉어내는 행위의 목적성과 존재의 여부가 다르기 때문이다. 홀로 노래를 부르던 넬리는 이제 문밖으로 나간다.
포커스 아웃된 화면은 뭉개진 혹은 복원에 실패한 넬리의 신체처럼 보이면서 넬리가 화장실에서 이혼서류를 확인한 순간과 겹쳐 보인다. 참사로 인한 한 가족의 붕괴 더 나아가 시대의 붕괴가 생성한 언어의 틈은 진심이 채워지지 않아 더 큰 균열을 만들어냈다. 넬리의 말이 조니에게 정확하게 안착하였더라면 완벽한 재건은 가능했을까. 복구와 재건을 다루는 회의적 시각은 프레임의 후경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폐허가 된 건물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 영화 '바바라'(2012) 마주보는 시선의 체계 '바바라'는 인물의 첫 등장을 비추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바바라(니나 호스)를 비추던 카메라는 이후 갑작스레 거리를 둔다. 벌어진 거리만큼이나 시점 역시 달라졌는데, 누군가 바바라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뒤바뀐 것. '바바라'에서 시선은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그 시선은 출근하는 바바라를 지켜보는 동료 의사 안드레(로날드 제르필드)가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것이었고, 마치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극 중에서 바바라는 분명 안전한 주거지에 머물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80년 동독을 배경으로 바바라는 공동체 사회 안에 포함되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을 보여준다. '분리'라는 키워드는 바바라를 상징하는 단어일 텐데, 국가로부터 감시받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매여있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바바라가 당국의 통제와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서독으로 출국 신청을 하지만 당국은 이를 거절하고 비밀경찰을 보내 감시하는 것. 서독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가기 위해 동독을 탈출하는 것이 바바라의 유일한 바람이다. 하지만 바바라의 목적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비밀경찰에게 인간의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고, 병원에서의 업무는 과중하다. 그중에서도 스텔라라는 소녀는 반복적으로 다쳐 병원을 찾기도 한다. 그나마 안드레만이 바바라의 숨 쉴 틈이 되어준다. 자신을 돌보는 환자처럼 도움이 필요한 바바라는 사방이 전부 노출된 상태다.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바바라의 말처럼 배우 니나 호스의 얼굴은 러닝타임 내내 피곤함에 찌든 방랑자의 얼굴이다.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고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상황은 바바라가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길 뿐이다. 거친 바람과 세차게 모습을 바꾸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자연의 낯선 풍경은 바바라에게 척박한 삶을 안겨준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과의 밀회 역시 집이 아닌 숲속이나 호텔이다. 바바라의 탈출 욕망은 스텔라는 아이로 인해 뒤바뀐다. 연인에게 받은 탈출 자금을 자신이 아닌 스텔라를 위해 사용한 것. 과연 바바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무엇일까. 스텔라와 바바라의 처지는 다른 듯 비슷하다. 이들이 결합될 수 있던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이었고, 자신이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해서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바바라'에서 그녀의 선택은 그래서 더 마음에 쓰인다. 잿빛 풍경 안에서 어긋나고 불통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하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가 지금을 살아가는, 이전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초기작 '옐라'(2007), '열망'(2008) 등의 작품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동독과 서독의 지난한 역사를 정확하게 모르더라도, 베를린의 기원을 잘 모르더라도 그의 영화의 이미지는 사진처럼 각인되어서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잊히지 않는 얼굴들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지도 모른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겸 영화평론가)가 한 호흡으로 화면을 길게 보여주는 롱테이크 촬영 기법처럼, 영화 속 장면이나 영화 이야기를 심층 분석합니다.
영화감독이 자신만의 고유한 연출 기법을 여러 작품에 걸쳐 적용하고 그걸 관객들이 알아차리는 경우는 흔치 않다. 연출 기법을 통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이 선명히 드러나야 하고 그게 그만의 고유한 기법이 돼야 한다. 작품만 보고,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조차 '앗 이 감독 작품이네' 하는 경우다. 그런 이들을 '거장'이라 부른다.
독일 영화감독인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거장으로 불리는 많은 이유 중 하나도 그의 연출 기법에 있다. 그의 영화를 보고나면 영화속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영화 '어파이어'에서 레온(토마스 슈베르트)가 숙소로 향하며 창밖을 내다보던 얼굴, '운디네'에서 운디네(폴라 비어)의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불편해하던 옆얼굴, '트랜짓'에서 창문 밖의 뛰어가는 붉은 원피스의 마리(폴라 비어)의 스치듯 지나가는 얼굴까지. 영화의 스토리 뿐 아니라 등장인물의 얼굴이 관객들 머릿속에 뚜렷하게 새겨진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 각 인물들을 어떻게 탐구하고 그 세밀한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는지도 영화를 보는 재미가 될 수 있다. 13일 개봉하는 영화 '어파이어'는 기존의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전작보다는 한층 무거움을 덜어낸 느낌이다. '어파이어'는 소설가 레온이 여름의 발트해의 숲속 별장으로 남은 원고를 적으러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곳에서 네 명의 젊은 남녀가 모여 욕망과 사랑, 분노와 같은 불길이 산불과 함께 겹친다. 2023년 제7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심사위원대상을 받은 '어파이어'의 매력은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는 태양과 거친 자연 아래에서 자꾸만 방황을 잃는 청춘들의 이야기라는 점이다.
Wallners의 'in my mind' OST로 담담하지만 증폭해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열기는 '어파이어'의 이미지 위에 각인된다. 소설의 완고를 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 레온은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에 예민함이 고조된다. 친구 펠릭스(랭스턴 위벨)와 단둘이서만 조용히 지내는 여름을 기대했건만, 어지러진 테이블과 곳곳에 떨어진 옷가지처럼 혼돈의 연속이다. 틀 안에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나디아(폴라 비어)의 행동은 하나같이 떨떠름하지만, 왜인지 시선이 간다. 풀럭이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마당 밖으로 나가는 나디아를 창문을 경계로 처음 목격한 레온. 이후 나디아가 지닌 특유의 싱그러움에 두근대는 마음을 진정할 수 없지만, 분출하기보다는 꾹꾹 눌러 담는다. '어파이어'를 청춘들의 풋풋한 사랑으로 읽어낼 수도 있을 테지만, 숙소의 피어난 곰팡이처럼 전조증상을 보이며 다가오는 산불 즉 환경에 관한 영화로도 시선을 비틀어볼 수 있다. 소설을 쓰는 일 이외에 설거지나 청소는 번잡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회피하거나 방관하기 때문이다.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소음과 산불, 친구들은 레온에게 있어 방해 요소로만 비친다. 그런 레온을 집어삼키며 천천히 활활 태우는 것도 바로 불이다. '운디네'에 이어 '어파이어'까지 원소 3부작으로 불리는 이 영화는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다시금 질문을 던진다. 크리스티안 페촐트의 '어파이어'를 관람하기 이전에 보면 좋을 다른 전작들을 소개한다.
*개봉 년도는 현지 기준
◆ 영화 '운디네'(2020) 가라앉고야 마는 사랑의 공간 '운디네'는 '상처는 흔적도 없이 복원될 수 있는가'를 묻는 영화인 것만 같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운디네(폴라 비어)는 반대편의 사랑하던 남자 요하네스(제이콥 맛쉔즈)의 침묵에 불편한 기색을 보인다. "날 사랑한다며, 영원히"라고 외치는 운디네의 말이 무색하게도 말은 허공에 흩날려 남자에게 도달하지 못한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운디네를 쳐다보는 남자가 앉아있을 뿐이다.
카페에서 기다린다는 요하네스를 뒤로 하고 운디네는 직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창문만 내려다보면, 보이는 남자는 손에 잡을 듯 잡을 수 없는 환영인 것처럼 보인다. 역사학자인 운디네는 베를린 도시주택 개발위원회를 대표해서 90년대 통일 이후 과거 동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개발에 대해 컨퍼런스를 진행한다. 영화는 과거의 베를린과 현재의 베를린을 중첩하며 운디네의 사랑 역시 같은 방식으로 보여준다. 베를린(Berlin)은 슬라브어로 '습지의 마른 땅' 혹은 '습지'인 베를(Berl)에서 유래된 말로, 즉 습지 지대에 세워진 도시를 의미한다. 그만큼 주요한 배경이 되는 베를린에서 운디네의 사랑은 축축하지만 습한 느낌이 든다. 요하네스 이후 사랑하게 되는 연인 크리스토프(프란츠 로고스키)와의 첫 만남은 깨진 어항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함께 맞으며 시작된다. 산업 잠수사로 일하는 크리스토프와 역사학자 운디네 모두 지나간 날의 흔적을 복원하는 일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큰 차이를 보인다. 물속에 가라앉은 역사와 물 위에의 도시에 세워진 건물의 역사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래서일까. 운디네와 크리스토프는 기차라는 이동 수단으로 서로의 집을 왕래해야만 한다. 이전에 요하네스가 같은 베를린에 있던 것과는 달리 두 연인은 분리되고 결합하기를 반복한다. 두 사람은 물 밑에 들어가 '운디네'라는 이름이 적힌 난파된 배를 보려고 하지만 그 순간 운디네는 크리스토퍼의 옆에서 사라져 의식을 잃는다.
절묘한 순간이다. 정신을 잃고 해수면의 가장 가까운 곳으로 떠오른 운디네는 크리스토프를 통해 다시 육지로 올라오면서 호흡을 되찾는다. 원소 3부작이라고 불리는 '운디네'는 Undine라는 서양 연금술에 등장하는 물의 요정으로서 일편단심이고 배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극 중에서 운디네가 물과 가까운 크리스토프를 만나며, 생기를 되찾아간다면 반대로 크리스토프는 자꾸만 메말라간다. 두 사람의 포개질 수 없는 상황은 결국 한 사람이 물 밑으로 가면서 종결된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운디네이지만, 크리스토프의 상처는 매일 밤 찾아오는 새벽의 푸르스름한 빛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 영화 '트랜짓'(2018) 서로를 향해 맴돌지만 도달할 수 없는 경유지 '트랜짓'에서 모든 인물은 한 마디로 붕 떠 있는 상태다.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는 체류증이나 비자가 없기에 쫓겨야만 하고, 남편 바이델의 흔적을 찾는 마리(폴라 비어)는 지치지도 않는지 도시 이곳저곳을 뛰어다닌다. 정착할 수 없이 자꾸만 내몰리는 이들은 지금 독일이 아닌 프랑스의 마르세유에 있다. 한참 제2차 세계대전 중인 독일로 병사들이 진군해오는 탓에 타국으로 몸을 숨긴 것이다. 누구 하나 반기지 않는 난민이 된 게오르그는 자신의 존재를 지워내고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게오르그는 친구에게 받은 부탁, 작가 바이델에게 편지를 전달해주는 과정에서 이름과 얼굴을 타인의 것으로 덧씌우게 된다. 편지의 주인인 바이델은 이미 호텔방에서 자살했고, 신원 미상의 시신이 되어 어딘가에 묻힌 것. 그가 남긴 소설 원고와 이미 받았던 두 장의 편지를 품에 안고 떠난 마르세유에서 중심을 잃어버린 듯한 여자 마리를 목격하게 된다. 등을 돌린 게오르그의 뒤에서 자꾸만 나타나는 마리는 자신이 원하던 얼굴이 아닌 양 다시 돌아선다. 어쩌면 이 점이 게오르그와 마리가 빙빙 돌면서 서로를 찾지만 끝내 당도할 수 없는 이유다. 영사관에 찾아가 게오르그의 이름으로 브라질 가는 배를 신청하고, 바로 뒤에 마리는 게오르그를 좇는다. 게오르그가 전달하려던 편지와 이미 바이델이 받았던 두 장의 편지가 이를 설명해준다. 게오르그의 편지는 마리가 바이델을 기다리겠다는 내용이었으나, 바이델이 사망 직전에 읽은 편지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이별 선언이었다. 두 편지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게오르그와 마리가 어긋나는 상황과도 맞물린다. 바이델의 이름과 여권을 사용하지만 바이델에게 게오르그는 완벽한 바이델이 될 수 없다. 얼굴과 이름이 분리되는 상황에서 게오르그가 마리를 향해 키워오는 마음은 종착지를 설정할 수 없는 공허함만을 남긴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뮤즈인 배우 폴라 비어가 연기한 마리는 "마치 춤을 추는 것 같은 연기를 하는 배우"라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말처럼 유려한 몸짓으로 예상 불가능한 얼굴을 보여준다. 거리를 활보하며 바이델의 흔적을 찾는 마리의 모습은 현상된 사진 속에선 '그 자리'에 있었겠지만, 곧 사라져버릴 신기루처럼 연출되기도 한다. Transit이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통과와 환승을 의미하는 만큼 게오르그가 마리에게 끌리는 마음은 뿌리를 내릴 수 없으며, 두 사람의 운명은 예정되어 있다.
◆ 영화 '피닉스'(2014) 모두 타버린 폐허에 남은 고통스러운 침묵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은 붉은색이 지닌 정열적인 이미지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강렬함의 양면성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파이어'는 불 원소를 소재로 하고 심지어 나디아는 붉은색 원피스를 입고, '트랜짓' 역시 마리의 옷은 붉게 물든 원피스, '피닉스'에서 니나 호스가 연기한 넬리도 비슷한 의상을 입고 나온다. 그의 영화가 지닌 인장처럼 느껴지는 붉은색 옷을 입은 여성의 존재는 '피닉스'에서 독보적이다.
1945년 6월 아우슈비츠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넬리(니나 호스)는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성형수술을 하고 찾아 나선 조니(로날드 제르필드)는 당연히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참사를 겪은 이후 훼손된 신체는 겉보기에는 수술로 재건된 듯하지만, 무심하게도 서로를 인지할 수 없는 상황처럼 균형은 무너진다. 즉, 완벽한 재건은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피닉스'의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넬리의 신체를 절단하는 표현법을 택한다. 넬리가 두 번째로 조니의 집에 찾아간 날, 계단을 내려오는 넬리의 상체는 프레임 안에서 의도적으로 잘려있다. 카메라는 무빙을 통해 보여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게다가 조니는 계단을 내려오는 넬리를 보며, 다시 내려오라고 소리친다. 일방적 언어 전달로 인한 또 한 번의 신체 절단이다. 그렇게 몸이 갈기갈기 찢긴 채 내려온 넬리는 언어의 실패 또한 마주한다. 필체를 재현하는 행위는 언어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인데, 감정이 담긴 문장들은 가짜 아내 연극과 맞닿아 본래 의미를 잃고 텅 빈 문장들로 변모한다. 조니와 넬리는 테이블을 중앙에 두고 편지 적는 행위를 지속하는데, 이때 조니는 일방적으로 발신하는 자다. 반대로 넬리는 실패한 수신자다. 자기부정을 통해 편지에 적힌 문장들을 옮겨 적을뿐, 수신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레네가 넬리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 또한 앞선 언어 실패의 연장선이다. 편지는 넬리가 수용소를 들어가자마자 조니가 이혼을 요구했다는 객관적 정보와 함께 레네의 주관적 감정, 이중적 상황을 서술하고 있다. 레네의 권총 자살 이후, 남겨진 편지는 그 당시가 아닌 시간이 경과된 후 수신된다. 누락된 시간 안에서 의미는 변질되어 누군가의 입(가정부)을 통해서 전달받게 된다. 페촐트는 레네의 죽음 또한 시각적으로 차단하는데, 앞서 말한 넬리의 훼손된 얼굴을 군인들의 반응 숏으로 대체한 것과 그 의미가 같다.
이처럼 페촐트가 설계한 폐허가 된 도시 위에 올리는 그들의 위장 연극은 참혹하면서 아름답다. 도시의 명과 암은 외부와 내부 공간을 구분 짓는다. 넬리가 조니를 발견한 것이 클럽 피닉스의 내부(Inside)라고 하면, 조니가 넬리에게 연극을 제안한 것은 클럽 피닉스의 외부(Outside)다. (노래가 흘러나오는) 내부는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를 찾아볼 수 없이 밝은 공간이며, 외부는 폐허가 된 어두운 도시를 조명한다. 클럽 피닉스는 복원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상징하는 공간이지만, 그 외부에서 만남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넬리의 재건된 얼굴과는 달리 관계 회복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클럽 피닉스에서는 'Speak Low' 음악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노래는 언어의 층위보다 한 단계 높은 감정의 고양이 가능하다. 지인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넬리와 피아노를 치는 조니는 참사 이전의 시간을 재현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넬리의 팔에 새겨진 수감번호는 이들이 이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언어의 반복적인 사유는 가능할지 몰라도 뱉어내는 행위의 목적성과 존재의 여부가 다르기 때문이다. 홀로 노래를 부르던 넬리는 이제 문밖으로 나간다.
포커스 아웃된 화면은 뭉개진 혹은 복원에 실패한 넬리의 신체처럼 보이면서 넬리가 화장실에서 이혼서류를 확인한 순간과 겹쳐 보인다. 참사로 인한 한 가족의 붕괴 더 나아가 시대의 붕괴가 생성한 언어의 틈은 진심이 채워지지 않아 더 큰 균열을 만들어냈다. 넬리의 말이 조니에게 정확하게 안착하였더라면 완벽한 재건은 가능했을까. 복구와 재건을 다루는 회의적 시각은 프레임의 후경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폐허가 된 건물들을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 영화 '바바라'(2012) 마주보는 시선의 체계 '바바라'는 인물의 첫 등장을 비추는 방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바바라(니나 호스)를 비추던 카메라는 이후 갑작스레 거리를 둔다. 벌어진 거리만큼이나 시점 역시 달라졌는데, 누군가 바바라를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뒤바뀐 것. '바바라'에서 시선은 영화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그 시선은 출근하는 바바라를 지켜보는 동료 의사 안드레(로날드 제르필드)가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것이었고, 마치 감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극 중에서 바바라는 분명 안전한 주거지에 머물지만 어째서인지 자신의 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1980년 동독을 배경으로 바바라는 공동체 사회 안에 포함되지 못하고 겉도는 모습을 보여준다. '분리'라는 키워드는 바바라를 상징하는 단어일 텐데, 국가로부터 감시받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매여있어야만 한다. 그 이유는 바바라가 당국의 통제와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서독으로 출국 신청을 하지만 당국은 이를 거절하고 비밀경찰을 보내 감시하는 것. 서독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가기 위해 동독을 탈출하는 것이 바바라의 유일한 바람이다. 하지만 바바라의 목적은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비밀경찰에게 인간의 권리는 보장받지 못하고, 병원에서의 업무는 과중하다. 그중에서도 스텔라라는 소녀는 반복적으로 다쳐 병원을 찾기도 한다. 그나마 안드레만이 바바라의 숨 쉴 틈이 되어준다. 자신을 돌보는 환자처럼 도움이 필요한 바바라는 사방이 전부 노출된 상태다. "여기서는 행복할 수 없다"는 바바라의 말처럼 배우 니나 호스의 얼굴은 러닝타임 내내 피곤함에 찌든 방랑자의 얼굴이다.
편안하게 잠들지 못하고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상황은 바바라가 동독을 떠나 서독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을 부추길 뿐이다. 거친 바람과 세차게 모습을 바꾸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자연의 낯선 풍경은 바바라에게 척박한 삶을 안겨준다. 오랜만에 만난 연인과의 밀회 역시 집이 아닌 숲속이나 호텔이다. 바바라의 탈출 욕망은 스텔라는 아이로 인해 뒤바뀐다. 연인에게 받은 탈출 자금을 자신이 아닌 스텔라를 위해 사용한 것. 과연 바바라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무엇일까. 스텔라와 바바라의 처지는 다른 듯 비슷하다. 이들이 결합될 수 있던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마음이었고, 자신이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해서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바바라'에서 그녀의 선택은 그래서 더 마음에 쓰인다. 잿빛 풍경 안에서 어긋나고 불통을 겪는 사람들의 모습을 포착하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이 현존하는 독일 최고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가 지금을 살아가는, 이전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초기작 '옐라'(2007), '열망'(2008) 등의 작품에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동독과 서독의 지난한 역사를 정확하게 모르더라도, 베를린의 기원을 잘 모르더라도 그의 영화의 이미지는 사진처럼 각인되어서 지워지지 않는다. 어쩌면 그는 잊히지 않는 얼굴들을 제시하며 우리에게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는지도 모른다.
이하늘 텐아시아 기자 greenworld@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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