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1일, 배우이자 가수인 장국영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모두들 만우절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문은 사실이었고, 오늘은 그의 사망 17주기다.
장국영은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에서 몸을 던졌다. 아시아에서 가장 빛나는 스타 중 한명이었던 그의 죽음에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매년 4월 1일이면 장국영의 팬들은 꽃다발과 화환을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외부에 두고 그를 추모하고 있다.
장국영은 10명의 자녀가 있는 다가족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알프레드 히치콕 등 할리우드 유명 인사의 옷을 만드는 성공한 재단사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영국 북부의 리즈 대학에서 섬유관리를 전공하게 된다. 그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좋아했는데, 애슐리를 연기한 레슬리 하워드를 제일 좋아했다. 그의 영어 이름이 레슬리인 이유이기도 하다.
장국영은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 유모와 더 친밀하게 지냈다. 형제들과 나이차도 커서 돈독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런 환경이 그의 자아 형성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중간에 대학을 그만두고 홍콩으로 돌아온 장국영은 1976년 홍콩 ATV 아시아 뮤직 콘테스트에서 2위에 입상하며 데뷔했다.
장국영이 스타덤에 오른 것은 가수가 아니라 배우로서였다. 1970년대까지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는 1980년대 이르러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이끄는 인물이 된다.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장국영은 1987년 '천녀유혼'으로 아시아를 대표하는 인기 스타로 떠오른다. 그는 마초 냄새 풍기는 다른 주류 배우들과 달리 섬세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지닌 배우였다. 1987년 '영웅본색2'에서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죽어가며 아이를 낳은 아내와 통화하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 속 장국영의 처연한 눈빛은 주윤발의 선 굵은 액션과 대비되어 더 안타까운 느낌을 자아냈다. 또한 절정의 미모를 자랑하던 왕조현과 함께 주연을 맡은 '천녀유혼'에서는 유약하면서도 사랑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남자의 순애보로 여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도쿄가요제에 참가했을 때 천안문 사태에 대해 중국정부를 비판한 것이 물의를 빚었다. 또한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찍혀버린' 장국영은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1990년 은퇴를 선언한 뒤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다. 장국영은 이민 후 조용히 지내려고 했지만 매니저의 생각은 달랐다. 연예계 생활에 익숙한 장국영이 지루한 캐나다 생활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완전 은퇴가 아닌 '가수만 은퇴'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계속 영화 스케줄을 잡아 놓았다 .
은퇴는 오히려 약이 됐다. 가수 은퇴 후 출연한 '아비정전'(1990) '종횡사해'(1991) 등이 잇따라 흥행에 성공하면서 아시아 최고 배우로 군림하게 된다. 특히 1993년 출연했던 첸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가 제46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주연 장국영은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는 동시에 대스타로 자리매김한다. 1995년에는 다시 가수로 다시 복귀해 'A Thousand Dreams Of You', '유심인(有心人)', '아(我)' 등의 히트곡을 내놓으며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줬다.
1997년 장국영은 제50회 칸 영화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한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에서 동성애자로 열연했다. 그의 성적 성향에 대해 추측이 난무했다. 앞서 영화 '패왕별희'를 찍을 때 자신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장국영은 200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양성애자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말했다.
장국영은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호텔 24층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원인은 삼각관계로 추정됐다. 그의 유서에는 "'당선생'과 한 명의 20대 남자 사이에서 누굴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괴롭다. 그래서 죽으려 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선생'은 그와 오랜 연인 관계였던 당학덕이라는 인물로 장국영의 사후 460억에 달하는 유산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많은 음모론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사망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팬들의 너무나 충격이 컸다.
장국영은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1989년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대스타가 된 장국영은 한국을 찾아 모 초콜릿 CF를 찍었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인기에 힘입어 해당 초콜릿 매출은 10배나 늘었다. 재미있는 것은 장국영이 스타가 되기 이전인 1970년대에 이미 방한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MBC가 주관한 국제가요제에 1978, 1979년에 참가했던 것. 올해는 그가 사망한 지 17주기가 되는 해다. 그를 기리기 위해 당초 영화 '패황별희'의 확장판인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 1일 국내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5월로 미뤄졌다.
15분이 더 추가된 171분 분량의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은 극 중 감정의 흐름이 더 자세히 드러나 스토리를 따라가기 쉬울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에서 장국영은 격동의 역사 속에 휩쓸리는 한 예술인의 모습을 완벽한 연기로 보여준다. 장국영 특유의 처연한 눈빛과 세밀한 감정 표현이 압권이라는 평이다. 장국영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연기는 더 이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안타깝고 슬프게 만든다.
김명상 기자 terry@tenasia.co.kr
장국영은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에서 몸을 던졌다. 아시아에서 가장 빛나는 스타 중 한명이었던 그의 죽음에 팬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매년 4월 1일이면 장국영의 팬들은 꽃다발과 화환을 홍콩의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외부에 두고 그를 추모하고 있다.
장국영은 10명의 자녀가 있는 다가족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알프레드 히치콕 등 할리우드 유명 인사의 옷을 만드는 성공한 재단사였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는 영국 북부의 리즈 대학에서 섬유관리를 전공하게 된다. 그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좋아했는데, 애슐리를 연기한 레슬리 하워드를 제일 좋아했다. 그의 영어 이름이 레슬리인 이유이기도 하다.
장국영은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해 유모와 더 친밀하게 지냈다. 형제들과 나이차도 커서 돈독한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런 환경이 그의 자아 형성 과정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 중간에 대학을 그만두고 홍콩으로 돌아온 장국영은 1976년 홍콩 ATV 아시아 뮤직 콘테스트에서 2위에 입상하며 데뷔했다.
장국영이 스타덤에 오른 것은 가수가 아니라 배우로서였다. 1970년대까지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는 1980년대 이르러 홍콩 영화의 전성기를 이끄는 인물이 된다. 1986년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장국영은 1987년 '천녀유혼'으로 아시아를 대표하는 인기 스타로 떠오른다. 그는 마초 냄새 풍기는 다른 주류 배우들과 달리 섬세하고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아슬아슬함을 지닌 배우였다. 1987년 '영웅본색2'에서는 공중전화 부스에서 죽어가며 아이를 낳은 아내와 통화하는 장면이 있었다. 영화 속 장국영의 처연한 눈빛은 주윤발의 선 굵은 액션과 대비되어 더 안타까운 느낌을 자아냈다. 또한 절정의 미모를 자랑하던 왕조현과 함께 주연을 맡은 '천녀유혼'에서는 유약하면서도 사랑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남자의 순애보로 여심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도쿄가요제에 참가했을 때 천안문 사태에 대해 중국정부를 비판한 것이 물의를 빚었다. 또한 삼합회의 영화계 진출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찍혀버린' 장국영은 연예계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1990년 은퇴를 선언한 뒤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다. 장국영은 이민 후 조용히 지내려고 했지만 매니저의 생각은 달랐다. 연예계 생활에 익숙한 장국영이 지루한 캐나다 생활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완전 은퇴가 아닌 '가수만 은퇴'한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계속 영화 스케줄을 잡아 놓았다 .
은퇴는 오히려 약이 됐다. 가수 은퇴 후 출연한 '아비정전'(1990) '종횡사해'(1991) 등이 잇따라 흥행에 성공하면서 아시아 최고 배우로 군림하게 된다. 특히 1993년 출연했던 첸 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가 제46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면서 주연 장국영은 세계적인 인지도를 쌓는 동시에 대스타로 자리매김한다. 1995년에는 다시 가수로 다시 복귀해 'A Thousand Dreams Of You', '유심인(有心人)', '아(我)' 등의 히트곡을 내놓으며 다재다능한 모습을 보여줬다.
1997년 장국영은 제50회 칸 영화제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한 왕가위 감독의 '해피투게더'에서 동성애자로 열연했다. 그의 성적 성향에 대해 추측이 난무했다. 앞서 영화 '패왕별희'를 찍을 때 자신 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공존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장국영은 200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을 양성애자로 표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말했다.
장국영은 2003년 4월 1일 만우절에 호텔 24층에서 투신해 생을 마감했다. 원인은 삼각관계로 추정됐다. 그의 유서에는 "'당선생'과 한 명의 20대 남자 사이에서 누굴 선택해야 할지 몰라서 괴롭다. 그래서 죽으려 한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당선생'은 그와 오랜 연인 관계였던 당학덕이라는 인물로 장국영의 사후 460억에 달하는 유산을 상속받았다. 하지만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소식에 많은 음모론이 쏟아지기도 했다. 그만큼 그의 사망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팬들의 너무나 충격이 컸다.
장국영은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1989년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으로 대스타가 된 장국영은 한국을 찾아 모 초콜릿 CF를 찍었고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인기에 힘입어 해당 초콜릿 매출은 10배나 늘었다. 재미있는 것은 장국영이 스타가 되기 이전인 1970년대에 이미 방한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MBC가 주관한 국제가요제에 1978, 1979년에 참가했던 것. 올해는 그가 사망한 지 17주기가 되는 해다. 그를 기리기 위해 당초 영화 '패황별희'의 확장판인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이 1일 국내 개봉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인해 5월로 미뤄졌다.
15분이 더 추가된 171분 분량의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은 극 중 감정의 흐름이 더 자세히 드러나 스토리를 따라가기 쉬울 것으로 보인다. 영화 속에서 장국영은 격동의 역사 속에 휩쓸리는 한 예술인의 모습을 완벽한 연기로 보여준다. 장국영 특유의 처연한 눈빛과 세밀한 감정 표현이 압권이라는 평이다. 장국영이 아니면 표현할 수 없는 연기는 더 이상 그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을 더욱 안타깝고 슬프게 만든다.
김명상 기자 terry@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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