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요정’이었고, 도중엔 ‘공주’였다가, 마침내 ‘식모’가 됐다. 남들과 똑같은 교복을 입고 있어도 흰 피부와 커다란 눈망울이 눈에 띄던 여고생은 교내 사생대회로 어린이 대공원에 갔다가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아이돌 그룹 핑클의 막내가 되었다. “가수가 되고 싶었다기보단 조금 다른 길을 가고 싶었던” 소녀의 삶은 종종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으로 흘러가기도 했지만 높은 인기와 유명세도 동시에 얻었다. 그리고 2002년 SBS <나쁜 여자들>로 시작된 연기자의 길은 매번 어려운 시험대였다. SBS <천년지애>에서 ‘남부여의 공주 부여주’라는 독특한 캐릭터로 인기를 얻었지만, 연기의 기본기가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맡겨진 주연의 자리는 버거웠다. “그때는 ‘일’이니까 잘 하고 싶다는 마음만 앞서서 정작 저 스스로 즐기지 못했던 것 같아요. 캐릭터를 진심으로 사랑하기가 힘드니까 현장에서도 행복하지 않았고, 그래서 시청자분들도 저를 보고 즐거워하시거나 공감하지 못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신인 감독과 작가, 젊은 배우들이 열정으로 부딪혀 만들었던 MBC <어느 멋진 날>은 성유리에게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어린아이와 선머슴의 중간쯤에 있는 떠돌이 소녀(KBS <쾌도 홍길동>), 난치병을 앓는 히스테릭한 여대생(KBS <눈의 여왕>), 자신을 버린 친부모를 찾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온 입양아 메이(영화 <토끼와 리저드>) 등 다양한 캐릭터에 도전하며 한 발씩 성장한 성유리는 최근 KBS <로맨스 타운>에서 엉뚱하지만 민폐는 아니고 열심히 살지만 억척스럽지는 않은 식모 노순금을 설득력 있게 연기하며 연기자로서 자신의 영역을 좀 더 넓혔다. “제 연기가 특별히 는 것 같지도 않은데 기대 이상으로 칭찬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해요. 작품을 마친 뒤 감독님께서는 저에게 ‘괜찮은 배우였고 스태프들에게 믿음을 주는 배우였다’고 말씀해 주셨지만 사실 제가 진짜 괜찮은 연기자여서 그분들이 저를 믿어주신 게 아니라, 그분들이 저를 믿어주셨기 때문에 조금은 괜찮은 연기자라는 말도 들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영원할 것 같던 요정이 씩씩하고 성실한 어른이 되었듯, 시간의 흐름에 따라 꾸준히 성장해온 배우 성유리가 자신의 소울메이트에게 들려주고 싶은 음악들을 추천했다.




1. Damien Rice의 < The Blower`s Daughter >
“영화를 보면서 OST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요. 그중에서도 <클로저>는 등장인물들의 관계나 정서, 감정 같은 것들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이고, 엔딩 신에서 흘러나오던 이 곡이 잊히지 않아서 몇 달 동안 계속 반복해 들었어요. ‘The Blower`s Daughter’라는 제목이 워낙 특이한데,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서 가사를 찾아 해석해보기도 하고 데미안 라이스의 다른 곡들도 다 들어보게 됐죠.” 사랑이 영원하지도, 유일하지도 않다는 아픈 진실을 <클로저> 만큼 아름답고도 예리하게 담아낸 작품은 드물다. 데미안 라이스의 담담하면서도 감수성 짙은 보컬이 이 곡을 통해 유독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그런 인생의 단면과 마주하게 하는 동시에 상처 또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에너지를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2. 브라운 아이즈의 < Two Things Needed For The Same Purpose And 5 Objets >
“브라운 아이즈를 워낙 좋아해서 앨범 전체를 매일매일 듣곤 했어요. 그 중에서도 특히 ‘가지마 가지마’는 <쾌도 홍길동> 촬영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에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듣고 촬영장 가는 길에도 계속 들었는데 그 시기에 제 감수성을 깨워준 곡이라 애착이 많이 가요. 제 마음 속에서 ‘이녹의 테마’ 같은 느낌? (웃음)” 2001년 ‘벌써 일년’으로 가요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브라운 아이즈는 감미로운 보컬과 서정적인 멜로디, 감각적인 사운드와 함께 ‘With Coffee’, ‘점점’ 등 다수의 히트곡을 내놓으며 사랑받았으나 2003년 갑작스런 해체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가지마 가지마’는 이들이 5년 만인 지난 2008년 재결성해 내놓은 세 번째 정규 앨범의 타이틀곡이다.



3. 마커스의 <2009 마커스 라이브 워십 – Stand In Awe>
유명한 신학자를 아버지로 두고 모태신앙으로 기독교를 믿는 성유리가 복음성가를 즐겨듣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풍부한 선율과 깊이 있는 가사로 종종 비기독교인들의 마음마저 사로잡는 복음성가 중에서도 성유리가 가장 사랑하는 곡은 ‘내가 걸어갈 때 길이 되고 살아갈 때 삶이 되는 그곳에서 나는 예배하네’라는 구절이 유독 눈에 들어오는 ‘부르신 곳에서’다. “굉장히 힘든 일이 있던 시기에 예배에 참석했는데, 이 곡을 듣는 순간 그냥 제 얘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사가 계속 맴돌 만큼 좋아서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들으면서 마음을 다잡은 곡이에요. 제 주제가라고 할 수 있죠. (웃음)”



4. Nina Simone의 < Don`t Let Me Be Misunderstood >
“흑인 음악을 원래 좋아해요. 다시 태어나면 흑인의 감수성을 갖고 싶다고 할 정도로, 똑같은 노래를 해도 ‘소울’이 느껴지거든요. 우리나라에 ‘한’이라는 정서가 있는 것처럼, 그들의 인종이나 민족적 역사에서 배어 나오는 외로움이나 슬픔이 쓸쓸하면서도 좋아요. 니나 시몬의 노래도 처음엔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그 정서나 마음을 울리는 것 같은 보컬이 확 와 닿았거든요. 1930년대에 태어난 뮤지션이고 지금은 돌아가신 분이지만 정말 좋은 곡들을 많이 남기셨어요. 듣다 보면 그 소울에 잠겨서 땅 밑바닥까지 푹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가끔은 그런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5. Edith Piaf의 < La Vie En Rose >
“에디뜨 피아프는 어머니가 워낙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자주 듣다 보니 대부분의 곡을 다 좋아해요. 게다가 영화 <라 비 앙 로즈>를 보면서 그 사람의 노래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부르는 장면들을 보고 나니 한 곡씩 들을 때마다 에디뜨 피아프의 일생이 보이는 것 같더라구요. 사실 위대한 아티스트였지만 행복한 인생을 살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인데, 그럼에도 언젠가 저도 그런 인물을 꼭 연기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거든요. 저는 행복해지고 싶고 행복해지기 위해 연기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술을 위해 그렇게 인생을 희생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은 없지만, 그래서 에디뜨 피아프의 음악이나 삶은 더 매력적인 것 같아요.”




아이돌로 시작해 연기자로 자리 잡기까지 긴 시간 동안 고민하고 노력해온 만큼 자신과 비슷한 출발선에 있는 후배들에게 “목표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해요. 그 과정이 결국 성공을 가져오는 거니까. 다만, 그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시기가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일찍은 아닐 수도 있지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언젠가는 올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살면 좋겠어요”라고 전하는 성유리는 이제 또 다시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하려 준비 중이다. “30대가 되는 과도기가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든 시기 중 하나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딱 고비를 넘기고 나니 해방감이 생겨요. 여배우로서도 나이라는 족쇄로부터 좀 더 풀려난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이미지를 떠나 어떤 캐릭터든 더 용기 있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배우로서도, 여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새로운 장이 열린 것 같은 기분이라 요즘은 정말 행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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