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이렇게 잘 생겨도 법에 걸리지 않는 걸까?” E. L. 제임스의 책 에서 여자 주인공 아나스타샤 스틸(이하 아나스타샤)은 남자 주인공 크리스천 그레이(이하 그레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도대체 어떻게 생겨야 법에 걸리지 않을 만큼 잘 생긴 걸까. “하루 종일 쳐다봐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키가 훤칠하고 어깨가 떡 벌어졌으며 늘씬했다. 엉덩이에 맞는 바지의 핏은… 아, 정말.” 엄청난 ‘통제광’에 결박과 훈육 등 ‘BDSM’의 성적 취향, 불타는 회색 눈을 가진 27살 CEO 그레이는 아나스타샤에게 섹시함 그 자체이며 세상에 있어서도 안 될 것 같은 이상적인 존재인 셈이다. 하지만 자고로, 한 사람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 봐야 하는 법. 환상을 거두고 평범한 한 남자로 그레이를 바라본다면 그의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본인이 직접 해줘야 하는, 그래서 지나치게 상냥한 이 남자. “그리스 신”이 아닌 남자 사람으로서 그레이를 좀 더 제대로 알기 위해 19가지 대사를 선별하고 상냥함의 포인트를 짚어봤다. 더불어 아나스타샤의 표현에 의지해 세상에 절대 없을 것 같은 그레이의 모습도 감히 구현했다. 아직 책을 읽지 않았지만 그레이가 궁금했던 독자들에겐 색다른 시선이 되길 바라며, 그레이의 환상에 빠져있을 수 천만 명의 아나스타샤들에겐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상냥한 그레이의 19가지 이야기" />
1. “난 아주 부유한 사람입니다, 스틸 양. 돈이 많이 드는 취미들에 전념하죠.”
어이쿠! 몰라 뵐 뻔 했는데 무례를 범하지 않도록 친히 알려주시다니 참 상냥해.
2. “나는 마음과 꽃을 여자에게 바치는 그런 남자가 아니야. 나는 로맨스 같은 행동은 안 해. 내 취향은 아주 독특하지. 넌 나를 멀리 해야만 해.”
평범한 연애는 질릴까봐 이렇게 혼자 ‘밀당’을 시작해주시다니.. 참 상냥해.
3. “아나, 협조 좀 해. 젠장, 어디 있는 거야?”
그냥 부탁하면 식상해 할까봐 욕까지 해주다니. 젠장, 참 상냥해.
4. “중요한 건 자기 한계를 아는 거야, 아나스타샤. 내 말은 나야 한계를 극복하는 것에 기꺼이 찬성하지만 이건 정말 상식을 벗어난 행위지. 이런 행동을 습관적으로 하나?”
술 마시다 토했을 뿐인데 이렇게 고급 강의를 해주시다니 참 상냥해.
5. “내가 그저 혼내기만 하는 걸 다행으로 여겨. 만약 네가 내 거라면 어제 보여준 묘기 이후엔 일주일 동안은 앉아 있을 수도 없게 만들어줬을 테니. 먹지도 않았고, 술에 취했고, 자기를 위험에 방치하다니.”
술은 허락받고 마셨어야 했는데…그저 살짝만 혼내셨으니 다행이다. 역시 참 상냥해.
6. “(아나스타샤: 나를 일부러 취하게 한 거예요?) 그래. 넌 너무 생각이 많으니까. 그리고 네 의붓아버지처럼 말이 없으니까. 와인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말을 하기 시작하고 난 네가 좀 더 솔직하게 터놓길 바랐으니까.
그리곤 정작 너님이 대화하고 싶을 땐 다른 사람 막 취하게 하다니, 이런 반전! 참 상냥해.
7. “굴 세 개. 대구 네 입. 아스파라거스 줄기 하나. 감자에는 손도 안 대고. 견과류도 올리브도 먹지 않았고.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겠지. 먹어, 아나스타샤. 어젯밤에도 안 먹었잖아. 먹어야 해. 난 정말로 네가 아침을 다 먹었으면 해. 난 음식 낭비를 못 참아, 먹어. 먹어!”
그래도 입에 떡 넣어주는 건 안 했으니… 참 상냥해.
8. “저게 당신 차야? 이거 길에서 버틸 수 있겠어? 안전하게? 아, 아나스타샤. 우리는 이걸 해결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을 알잖아. 네가 타는 비틀은 낡고 솔직히 위험해. 내가 쉽게 바로잡을 길이 있는데도 네가 그 차를 타고 다니다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영원히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거야. 네 의붓아버지에게도 얘기했어. 기꺼이 찬성하시더군.”
그냥 차가 구리다고 하면 되는 걸 상처받을까봐 걱정하는 척 해주다니 참 상냥해.
9. “피노 그리지오 두 잔. (아나스타샤: “난 다이어트 코크 마실래요.”) 피노 그리지오는 괜찮은 와인이야. 무엇을 먹든 식사랑 잘 어울리지.”
상대방 취향 따위 ignore 하면 되는데 고견을 explain 해주시다니 참 상냥해.
10. “스틸 양, 항상 위키피디아부터 시작해. 질문이 있을 때까진 더 이상 메일 보내지 마. 알겠지?”
글자도 못 읽는 아이일 까봐 다시 한 번 물어보는 센스. 참 상냥해.
11. “아직도 깨어 있는 거야? 잠자리에 들어, 아나스타샤.”
오,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나지! 이런 걸 이렇게 조심스럽게 일깨워주다니 참 상냥해.
12. “알래스카는 아주 춥고 도망갈 곳이 못 돼. 내가 너를 찾아낼 거야. 난 너의 휴대전화도 추적할 수 있는데.”
바로 추적하면 될 텐데 굳이 이렇게 느끼하게 경고해주다니 참 상냥해.
13. “난 바꾸려는 게 아냐. 네가 좀 더 정중해졌으면 좋겠고 내가 네게 준 규칙을 따르며 나를 거역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단순해.”
결국 본인 맘대로 바꾸겠다는 걸 쉽게 설명까지 해주다니 참 상냥해.
14. “정각에 왔군. 나는 시간을 잘 맞추는 것을 좋아하지.”
‘안물안궁’…… 어쨌든, 참 상냥해.
15. “출판일 하려는 사람 맞아? 괴팍박대라는 말은 없고 출판업에 종사하려는 사람이라면 그런 말 쓰면 안 되지. 완전무결? 뭐랑 비교해서 그런지 말해줄래?”
검색만 하면 되는 걸 남의 진로까지 걸고넘어지다니 참 오지랖 넓고 참 상냥해.
16. “어째서 답장하지 않았어? 문자라도 하지 않았어?”
연락 오면 직접 알현하러 달려가야 하는데 문자도 답변으로 쳐 주시다니 참 상냥해.
17. “어떻게 이메일을 보내고 있는 거야? 블랙베리 쓰느라 너를 포함, 같이 승선한 사람들 모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고 있는 거야?”
언젠 항상 답장하라고 난리치더니, 이젠 공공의 안전까지 걱정해주시다니 참 상냥해.
18. “일하러 가라. 일하러 가라고 했지.”
난 CEO구! 넌 직원이야! 이 말을 이렇게 점층법으로 표현해주다니. 문학적이면서도 참 상냥해.
19. “난 네가 유연하고 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몸을 가지길 바라. 내 말 믿어. 운동을 할 필요가 있어.”
후우… 굳이 또 이렇게… 지즉해 즈드니 츠음 승능해. 그듯드 으즈므니.
일러스트레이션. 홍기원
글, 한여울 기자 six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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