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나이는 한때 소년이었다. 좌절과 실패를 맛보기 전, 가능성으로 가득한 소년이 자신의 능력을 점차로 깨우치며 세상의 중심으로 나아가는 모험담은 그래서 언제나 사나이와 사나이의 인생을 알고 있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여기에 기상천외한 유머까지 더해진 소년만화가 꾸준히 인기 장르의 위치를 고수하는 것은 그래서다. 웹툰 <격투기특성화사립고교 극지고>(이하 <극지고>)는 그러한 소년만화의 기본에 충실한 동시에 응용 기술에도 능한 이 바닥의 신흥 고수다. 철저한 계산으로 꾸려나가는 것 같지만, 작가 허일은 “만화 <공태랑 나가신다>의 영향을 받아 언젠가 말도 안 되게 넓고, 밑도 끝도 없으며, 학교와는 전혀 상관없는 시설물들로 가득한 학교를 언젠가 꼭 그리고 싶은” 마음에 “영화 <헬보이>에서 달려오는 차를 주먹으로 찍어 눌러서 뒤집어 넘기는 장면 같은 액션을 그려보고 싶은 그림쟁이의 말초적 욕구”를 섞어서 만든 것이라며 <극지고>의 탄생 비결을 가볍게 설명한다. 심지어 완벽한 시놉시스조차 없이 “캐릭터들에게 ‘자, 니들이 직접 한번 부딪혀 봐라’는 생각으로 작업하고 있어요”라며 스스로 다음 회의 내용이 궁금하다고 눙친다.

계획이 없었을 뿐, <극지고>는 사실 작가 허일의 소년 시절이 고스란히 응축된 작품이다. 고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우연히 가입한 만화부에서 그림 그리기의 매력을 알게 되고 관련 학과로 진학한 뒤 입시 미술학원 강사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던 차에 복싱 선수로의 외도를 거쳐 다시 만화의 세계로 돌아오기까지, 그가 거쳐야 했던 선택의 순간들은 극지고에서의 모험만큼이나 파란만장하고 다이내믹하다. 심지어 알고 지내던 형이 <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으로 성공하는 것을 본 뒤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 대세 지향적인 마인드”로 출판 제의를 뿌리치고 웹툰 작가로의 데뷔를 모색한 이야기는 그대로 소년만화의 한 장면이다. 물론, 그의 소년은 만화가라는 목표에 안착함으로써 해피엔딩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마감을 방해할 만큼 몰입하게 된다는 다음의 노래들을 너무 열심히 듣지만 않는다면, 그 행보는 당분간 탄탄대로일 것 같다.




1. 피노다인(Pinodyne)의 < PINOvation >
“홍대 공연장에서 처음 듣고는 정말 울 뻔했습니다”라며 허일이 첫 번째로 추천한 노래는 래퍼 허클베리 피와 작곡가 소울피쉬, 두 사람으로 구성된 힙합 듀오 피노다인의 노래 ‘Nightingale Film’이다. 실제 멤버의 어머니가 쓴 일기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으로 허일은 “어머니의 육성이 내레이션으로 깔리면서 몰입도를 2만 배로 올려주는 곡”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힙합과 만화는 기성세대가 볼 때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아들의 길을 묵묵히 지켜봐 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 와 닿았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제가 가고 싶은 길을 단 한 번도 반대하지 않고 응원해 주신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지네요.” 유난히 공감을 하게 되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허일은 끝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남자가 울 때는 딱 3번.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1년 이상 여친이 생기지 않을 때”이기 때문이란다.



2. 다이나믹 듀오(Dynamic Duo)의 < Newways Always (GONE) >
힙합 음악의 가장 큰 장점은 보다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감정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허일이 마음으로 이해한 그의 두 번째 선곡 역시 힙합 뮤지션, 다이나믹 듀오의 노래 ‘GONE’이다. 유쾌하고 파워풀한 한편, 청춘의 편린을 솔직하게 기록하기도 하는 다이나믹 듀오가 현악 편곡과 에이트 주희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던 싱글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들었다면 오히려 이해하지 못했을 가사였을 겁니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닫혀가는 마음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 들을수록 먹먹해지는 음악입니다”라고 큰 공감을 표한 허일은 앞으로의 다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여친 구함”이라고.



3. Crom(신해철)의 < Homemade Cookies & 99 Crom Live >
“지금으로서는 그저 딱히 이유 없이 ‘좋은 노래’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라고 허일은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을 설명했다. 신해철이 초기의 넥스트를 해단하고 유학을 떠나 새로운 음악 작업을 모색하던 시기에 발표된 음반 < Homemade Cookies & 99 Crom Live >는 록밴드의 멤버가 아니라 작곡가이자 연주가, 프로듀서이자 엔지니어로서 신해철의 한 시절을 정리하는 앨범이기도 하다. 3장으로 구성된 두툼한 결과물의 세 번째 CD에 수록되어 대미를 장식하는 ‘민물장어의 꿈’은 특유의 드라마틱한 가사와 멜로디가 조화로운 곡으로 허일에게 “조금 더 삶을 겪어 보고 다시 들어본다면 그땐 다르게 와 닿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항상 갖게 하는” 노래다.



4. Screamin` Jay Hawkins의 < Cow Fingers & Mosquito Pie >
지금까지의 곡들이 공감과 몰입을 이유로 마감을 방해하는 노래들이었다면, 허일이 네 번째로 추천하는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의 ‘I Put A Spell On You’는 불가항의 매력 때문에 그의 손길을 멈추는 곡이다. “500번 이상 리메이크 되면서 수많은 뮤지션들에 의해 불려졌고, CCR(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이 부른 버전도 유명하지만 역시 원곡이 가장 최고네요”라고 허일이 그 ‘절륜함’에 존경을 표시할 정도로 뮤지션 특유의 광기 어린 샤머니즘의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 곡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허일은 “제목 그대로 정말 주문에 걸려 버리는 느낌입니다. 한 번 들을 때마다 마감이 5분씩 늦어지는 주문”이라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으니 웹툰 담당자들은 각별히 이 곡을 경계해야 하겠다. 영화 <노 웨어 보이>에서는 1950년대의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해당 곡이 삽입되기도 했다.



5. Beyonce의 < I Am… Sasha Fierce >
진짜 사나이일수록 숨겨진 감수성이 빛나는 법. 그런 점에서 허일이 마지막으로 추천한 비욘세의 ‘Halo’ 역시 그의 취향 안에서 수긍이 가는 선택이다. “<극지고>를 보고 뭔가 더럽혀졌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 노래를 들으세요. 당신을 정화시켜 줍니다”라는 작가의 너스레처럼, ‘Halo’는 사랑과 구원으로 가득한 곡이다. 넓은 음역대와 화려한 기교를 펼쳐놓으면서도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비욘세의 보컬리스트로서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곡이기도 하지만 정작 허일이 이 노래에 감명을 받은 포인트는 따로 있다고.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Hello~ Hello~’라고 하는 줄 알고 ‘아, 비욘세는 매우 인사성이 밝구나’라고 생각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어요.”




인터뷰에서조차 웃음 유발을 멈추지 못하는 허일에게 개그는 가장 큰 특기다. “일상에서 주변 사람들과 주고받은 개그들이 순화되어 나온 거죠. 제 생활의 부분들입니다”라고 그 원천을 자부하지만, 그는 “점점 갈수록 독자들이 좋아하는 포인트를 모르겠어요”라고 본격 연재 10개월 차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웃음의 양념을 발라서라도 <극지고>가 표현하고자 하는 궁극의 장면은 “그림만으로도 소리가 들리는 타격감”을 담아내는 그림이다. 덕분에 액션의 호흡이 길어지고 있지만, 장면을 쌓아 터트리는 한방의 매력을 위해 그는 스토리와 그림 사이에서 조율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고민의 시간이 있는 한, 독자들에게 작품을 통해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그의 꿈은 유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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