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이 없었을 뿐, <극지고>는 사실 작가 허일의 소년 시절이 고스란히 응축된 작품이다. 고등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우연히 가입한 만화부에서 그림 그리기의 매력을 알게 되고 관련 학과로 진학한 뒤 입시 미술학원 강사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가던 차에 복싱 선수로의 외도를 거쳐 다시 만화의 세계로 돌아오기까지, 그가 거쳐야 했던 선택의 순간들은 극지고에서의 모험만큼이나 파란만장하고 다이내믹하다. 심지어 알고 지내던 형이 <들어는 보았나! 질풍기획!>으로 성공하는 것을 본 뒤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 대세 지향적인 마인드”로 출판 제의를 뿌리치고 웹툰 작가로의 데뷔를 모색한 이야기는 그대로 소년만화의 한 장면이다. 물론, 그의 소년은 만화가라는 목표에 안착함으로써 해피엔딩에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그리고 그가 마감을 방해할 만큼 몰입하게 된다는 다음의 노래들을 너무 열심히 듣지만 않는다면, 그 행보는 당분간 탄탄대로일 것 같다.
“홍대 공연장에서 처음 듣고는 정말 울 뻔했습니다”라며 허일이 첫 번째로 추천한 노래는 래퍼 허클베리 피와 작곡가 소울피쉬, 두 사람으로 구성된 힙합 듀오 피노다인의 노래 ‘Nightingale Film’이다. 실제 멤버의 어머니가 쓴 일기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으로 허일은 “어머니의 육성이 내레이션으로 깔리면서 몰입도를 2만 배로 올려주는 곡”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힙합과 만화는 기성세대가 볼 때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아들의 길을 묵묵히 지켜봐 주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더 와 닿았던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제가 가고 싶은 길을 단 한 번도 반대하지 않고 응원해 주신 부모님께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지네요.” 유난히 공감을 하게 되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허일은 끝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남자가 울 때는 딱 3번. “태어날 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1년 이상 여친이 생기지 않을 때”이기 때문이란다.
힙합 음악의 가장 큰 장점은 보다 구체적으로, 섬세하게 감정과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허일이 마음으로 이해한 그의 두 번째 선곡 역시 힙합 뮤지션, 다이나믹 듀오의 노래 ‘GONE’이다. 유쾌하고 파워풀한 한편, 청춘의 편린을 솔직하게 기록하기도 하는 다이나믹 듀오가 현악 편곡과 에이트 주희의 목소리를 통해 새로운 스타일을 시도했던 싱글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들었다면 오히려 이해하지 못했을 가사였을 겁니다. 사람을 만나고, 사랑을 하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닫혀가는 마음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 들을수록 먹먹해지는 음악입니다”라고 큰 공감을 표한 허일은 앞으로의 다짐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니까 더 늦기 전에 여친 구함”이라고.
“지금으로서는 그저 딱히 이유 없이 ‘좋은 노래’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라고 허일은 신해철의 ‘민물장어의 꿈’을 설명했다. 신해철이 초기의 넥스트를 해단하고 유학을 떠나 새로운 음악 작업을 모색하던 시기에 발표된 음반 < Homemade Cookies & 99 Crom Live >는 록밴드의 멤버가 아니라 작곡가이자 연주가, 프로듀서이자 엔지니어로서 신해철의 한 시절을 정리하는 앨범이기도 하다. 3장으로 구성된 두툼한 결과물의 세 번째 CD에 수록되어 대미를 장식하는 ‘민물장어의 꿈’은 특유의 드라마틱한 가사와 멜로디가 조화로운 곡으로 허일에게 “조금 더 삶을 겪어 보고 다시 들어본다면 그땐 다르게 와 닿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항상 갖게 하는” 노래다.
지금까지의 곡들이 공감과 몰입을 이유로 마감을 방해하는 노래들이었다면, 허일이 네 번째로 추천하는 스크리밍 제이 호킨스의 ‘I Put A Spell On You’는 불가항의 매력 때문에 그의 손길을 멈추는 곡이다. “500번 이상 리메이크 되면서 수많은 뮤지션들에 의해 불려졌고, CCR(크리던스 클리어워터 리바이벌)이 부른 버전도 유명하지만 역시 원곡이 가장 최고네요”라고 허일이 그 ‘절륜함’에 존경을 표시할 정도로 뮤지션 특유의 광기 어린 샤머니즘의 분위기가 절정에 달한 곡이기도 하다. 오죽하면 허일은 “제목 그대로 정말 주문에 걸려 버리는 느낌입니다. 한 번 들을 때마다 마감이 5분씩 늦어지는 주문”이라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으니 웹툰 담당자들은 각별히 이 곡을 경계해야 하겠다. 영화 <노 웨어 보이>에서는 1950년대의 분위기를 묘사하기 위해 해당 곡이 삽입되기도 했다.
진짜 사나이일수록 숨겨진 감수성이 빛나는 법. 그런 점에서 허일이 마지막으로 추천한 비욘세의 ‘Halo’ 역시 그의 취향 안에서 수긍이 가는 선택이다. “<극지고>를 보고 뭔가 더럽혀졌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 노래를 들으세요. 당신을 정화시켜 줍니다”라는 작가의 너스레처럼, ‘Halo’는 사랑과 구원으로 가득한 곡이다. 넓은 음역대와 화려한 기교를 펼쳐놓으면서도 듣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비욘세의 보컬리스트로서의 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곡이기도 하지만 정작 허일이 이 노래에 감명을 받은 포인트는 따로 있다고.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Hello~ Hello~’라고 하는 줄 알고 ‘아, 비욘세는 매우 인사성이 밝구나’라고 생각했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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