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날에 /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 / 할머니의 할머니 / 아득한 먼 곳의 이야기 /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다 / 그녀가 살아낸 고통의 생은 / 백 년 전, 혹은 어제의 사건 / 세상은 변함없고 /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로 바쁠 테니 / 이 노래를 부탁해 / 끊이지 않는 비극 / 너와 나의 무관심을 노래해 줘 / 이 노래를 부탁해 / 침묵으로 얻은 평화 / 또 망각을 위한 망각을 노래해 줘
– 한희정 ‘이 노래를 부탁해’
숨소리와 공기의 떨림 사이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떤 기계음도 악기음도 배제된 고요한 공간을 가르고 속삭이듯 앞으로 나아가는 노래는 아름답고 그래서 슬프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외침과 속삭임’ 이라는 부제와 함께 28일 발매된 앨범 의 시작이다. 한희정, 정민아, 오지은, 소히, 이상은, 지현, 무키무키만만수, 시와, 투명, 황보령(황보령=SMACKSOFT), 송은지(소규모아카시아밴드), 남상아(3호선버터플라이), 강허달림, 트램폴린, 휘루 등 홍대 인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열일곱 명의 여성 뮤지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든 이 앨범의 속지 마지막 장에는 ‘우리의 할머니들에게’ 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여성의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이 낳은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인 동시에 여성 개개인의 삶을 가장 잔인하게 짓밟은 성범죄라는 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문제와 직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6월 13일 김화선 할머니가 타계하면서 전국의 일본군 위안부피해 여성 생존자는 이제 60명밖에 남지 않았고, 대부분 80대인 이들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가해국인 일본의 총리는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망언을 내뱉고, 우리 정부는 일관성 없는 접근으로 실익을 얻지 못한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개인의 고통은 타자화 된다.
는 이렇게 살아 있음에도 역사책 속으로 박제되고 먼 세상의 뉴스처럼 다뤄지는 현재진행의 삶에 다가서는 인상적인 걸음이다. 2006년 경 송은지와 소히, 정민아 등이 참여한 여성주의 공부 모임 ‘릴리스의 시선’이 그 시작이었다. 모임 자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2011년 송은지는 다시 생각했다. “지난 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눴던 옛날 얘기를 모으다 보니 ‘당시에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을 했다’ 는 말씀이 떠올랐다.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모두, 그리고 다른 많은 할머니들도 공공연한 비밀처럼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계셨고, 그러니 만약 우리 할머니가 피해자이셨다면 저 역시 세상에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존의 민족주의적이나 국가주의적인 방식 대신 그 분들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가 느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다소의 친분이 있던 뮤지션들부터 서로 얼굴조차 전혀 모르던 사이까지, 무작정 공연장 대기실을 찾아가 내놓은 제안에 의외로 많은 여성 뮤지션들이 합류했다. 각자 개성이 강하고 자신의 작업은 물론 생활을 위해 음악 외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금세 친근한 유대가 형성되고 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송은지는 섭외한 아티스트들에게 다소 무거운 숙제를 내놓았다. “자신의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가진 사람, 성폭력 생존자, 동성애자 등 각자 다른 특징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여성의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가면 좋겠다”는 거였다.
“노래를 들어 주세요, 그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해 주세요” 그래서 외부의 시선에 의해 흔히 ‘홍대 여신’이라는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과 무관하게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흐름을 지닌 이 앨범은 성폭력에 대한 트라우마를 담은 “아, 가녀린 내 마음 / 오해가 될까, 소란이 될까 / 억울해 할 테지만 / 미친 사람이 될지라도 / 난 말 할 거야, 겁내지 않아” (소히 ‘심증’)부터 “나 주름진 허물을 벗고 / 매끈한 피부로 갈아입네 / 가벼운 몸, 진실한 발걸음 / 한 손엔 긴 칼을 들고 / 복면을 하고 성큼성큼” (트램폴린 ‘내 이름은 닌자 영’) 처럼 판타지에 가까운 한풀이까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물론 여성 보편이 가지고 있는 상처와 그 치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도 묻지 않았네’로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 시와는 “우리가 할머니들에게 ‘역사의 증인’으로서 슬퍼하는 역할만을 기대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매일매일 같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손잡고 가까워지며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약 1년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는 지난 4월 열린 공연 수익으로 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충당했고, 나머지는 개인과 기업의 후원을 통해 초판 2천 장을 찍으며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앨범 판매를 통한 모든 수익은 ‘나눔의 집’ 할머니들에게 기부된다. 유통을 맡은 미러볼 뮤직의 이창희 대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작업에 동참하고 아티스트들과 교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큰 대가가 있다”고 말했다. 4월 이후 이효리 등 다른 뮤지션들의 참여 의사가 전해지며 내년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두 번째 음반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앨범에 참여한 이들의 바람은 하나다. “노래를 들어 주세요. 그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해 주세요.” 흐르는 시간을 붙들 수도, 이미 자행된 폭력을 되돌릴 수도 없다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쉬운 과제다. 그래서 이 노래들을 부탁한다.
글. 최지은 five@
편집. 이지혜 seven@
– 한희정 ‘이 노래를 부탁해’
숨소리와 공기의 떨림 사이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떤 기계음도 악기음도 배제된 고요한 공간을 가르고 속삭이듯 앞으로 나아가는 노래는 아름답고 그래서 슬프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위한 외침과 속삭임’ 이라는 부제와 함께 28일 발매된 앨범 의 시작이다. 한희정, 정민아, 오지은, 소히, 이상은, 지현, 무키무키만만수, 시와, 투명, 황보령(황보령=SMACKSOFT), 송은지(소규모아카시아밴드), 남상아(3호선버터플라이), 강허달림, 트램폴린, 휘루 등 홍대 인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열일곱 명의 여성 뮤지션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든 이 앨범의 속지 마지막 장에는 ‘우리의 할머니들에게’ 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여성의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제 2차 세계대전이 낳은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인 동시에 여성 개개인의 삶을 가장 잔인하게 짓밟은 성범죄라는 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문제와 직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지난 6월 13일 김화선 할머니가 타계하면서 전국의 일본군 위안부피해 여성 생존자는 이제 60명밖에 남지 않았고, 대부분 80대인 이들에게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가해국인 일본의 총리는 “위안부를 강제동원한 증거가 없다”는 망언을 내뱉고, 우리 정부는 일관성 없는 접근으로 실익을 얻지 못한 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개인의 고통은 타자화 된다.
는 이렇게 살아 있음에도 역사책 속으로 박제되고 먼 세상의 뉴스처럼 다뤄지는 현재진행의 삶에 다가서는 인상적인 걸음이다. 2006년 경 송은지와 소히, 정민아 등이 참여한 여성주의 공부 모임 ‘릴리스의 시선’이 그 시작이었다. 모임 자체는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지만 2011년 송은지는 다시 생각했다. “지난 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눴던 옛날 얘기를 모으다 보니 ‘당시에는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일찍 결혼을 했다’ 는 말씀이 떠올랐다. 외할머니와 친할머니 모두, 그리고 다른 많은 할머니들도 공공연한 비밀처럼 그런 기억을 간직하고 계셨고, 그러니 만약 우리 할머니가 피해자이셨다면 저 역시 세상에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존의 민족주의적이나 국가주의적인 방식 대신 그 분들의 고통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가 느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게 됐다.”
다소의 친분이 있던 뮤지션들부터 서로 얼굴조차 전혀 모르던 사이까지, 무작정 공연장 대기실을 찾아가 내놓은 제안에 의외로 많은 여성 뮤지션들이 합류했다. 각자 개성이 강하고 자신의 작업은 물론 생활을 위해 음악 외의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금세 친근한 유대가 형성되고 협업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송은지는 섭외한 아티스트들에게 다소 무거운 숙제를 내놓았다. “자신의 할머니에 대한 추억을 가진 사람, 성폭력 생존자, 동성애자 등 각자 다른 특징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모두 ‘여성의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공통된 주제를 가지고 가면 좋겠다”는 거였다.
“노래를 들어 주세요, 그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해 주세요” 그래서 외부의 시선에 의해 흔히 ‘홍대 여신’이라는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과 무관하게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흐름을 지닌 이 앨범은 성폭력에 대한 트라우마를 담은 “아, 가녀린 내 마음 / 오해가 될까, 소란이 될까 / 억울해 할 테지만 / 미친 사람이 될지라도 / 난 말 할 거야, 겁내지 않아” (소히 ‘심증’)부터 “나 주름진 허물을 벗고 / 매끈한 피부로 갈아입네 / 가벼운 몸, 진실한 발걸음 / 한 손엔 긴 칼을 들고 / 복면을 하고 성큼성큼” (트램폴린 ‘내 이름은 닌자 영’) 처럼 판타지에 가까운 한풀이까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물론 여성 보편이 가지고 있는 상처와 그 치유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도 묻지 않았네’로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 시와는 “우리가 할머니들에게 ‘역사의 증인’으로서 슬퍼하는 역할만을 기대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매일매일 같이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손잡고 가까워지며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약 1년에 걸쳐 진행된 프로젝트는 지난 4월 열린 공연 수익으로 제작비의 절반 이상을 충당했고, 나머지는 개인과 기업의 후원을 통해 초판 2천 장을 찍으며 앨범을 세상에 내놓았다. 앨범 판매를 통한 모든 수익은 ‘나눔의 집’ 할머니들에게 기부된다. 유통을 맡은 미러볼 뮤직의 이창희 대표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 대한 작업에 동참하고 아티스트들과 교감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가슴이 따뜻해지는 큰 대가가 있다”고 말했다. 4월 이후 이효리 등 다른 뮤지션들의 참여 의사가 전해지며 내년에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위한 두 번째 음반이 만들어질 예정이다. 앨범에 참여한 이들의 바람은 하나다. “노래를 들어 주세요. 그 이야기들에 대해 생각해 주세요.” 흐르는 시간을 붙들 수도, 이미 자행된 폭력을 되돌릴 수도 없다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쉬운 과제다. 그래서 이 노래들을 부탁한다.
글. 최지은 five@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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