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웅, 그의 손에 요즘 열매가 하나 열렸다. 지난 3월 늦깎이로 합류한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이하 ‘1박 2일’)에서 그는 오랫동안 조용한 남자였다. 놀러 온 배우 김정태로부터 “여기가 횟집이야? 날로 먹게”라는 농담 섞인 핀잔을 들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최근 그는 비로소 ‘감`을 잡았다. 예능감만은 아니다. 지난 주 개봉한 영화 <특수본>부터 내년 개봉을 앞둔 멜로 영화 <네버 엔딩 스토리>, 한창 촬영 중인 <건축학개론>까지 영화의 감도 주렁주렁 열렸다. 엄숙하고 진지한 ‘엄포스’에서 “비로소 즐기는 방법을 알게 된” 유쾌한 태웅 씨, 그의 손바닥을 잠시 들여다보자.
<특수본>은 불균질한 느낌이 있었던 영화였지만, 엄태웅씨의 연기는 꾸준한 안정감을 가져갑니다. 천재적인 신인이 등장해 좋은 배우로 성장하는 경우는 많이 봤지만, 조용히 등장해서 천천히 느리게 조금씩 좋아지는 배우는 흔치 않은 경우인 것 같았어요.
엄태웅
: 지금도 불안하기는 한데… <네버 엔딩 스토리>는 더 좋아요. (웃음) 그런데 사실 배우가 노력할 게 뭐겠어요. 쉬는 시간에 산에 올라가서 발성 연습을 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생각해도 저는 되게 더딘 사람이에요. 하지만 운 좋게도 그 더딘 기간 동안 내쳐지지 않고 꾸준히 연기 할 수 있는 기회라는 걸 얻을 수 있었던 게 가장 큰 복이죠. 그러면서 어느 순간 현장이 편해지고 재밌어졌어요. 예전엔 모니터 옆에도 못 갔어요. 뭐가 안 풀리면 소통을 해서 풀어나가야 하는데 내가 못하는 게 너무 큰 잘못인 것만 같아서 꽁꽁 닫고 만 있었죠. <님은 먼 곳에> 찍을 때 이준익 감독이 “쟤는 왜 모니터 옆에 안 오냐” 고 하셨어요. 그런데 <시라노 연애 조작단>을 하면서 아, 일을 이렇게 하면 참 재밌구나, 내가 이렇게 열어 놓음으로서 약한 부분도 보완할 수 있는 거고 편해질 수가 있구나 느꼈어요. 이후 드라마 <닥터챔프> 할 때도 소통하는 방법을 알게 되니까 제가 혼자서 낑낑 댈 때보다는 많은 걸 할 수 있게 되더라고요. 나이가 좀 들다 보니까 포기할 건 포기하고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고요.

“나이 들수록 새옹지마가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 엄태웅 씨의 연기에서는 얼굴에 흥분이 먼저 드러났던 것 같거든요. 눈보다 코 근육이 갑자기 활발해진다거나 하는 식으로. 그런데 어느 순간 그게 안보이더라고요.
엄태웅
: (박)희순 형이 늘 그러세요. 이 녀석은 늘 코부터 벌름벌름 거리면서 연기한다고. (웃음) 물론 아직도 잘 안되지만 흥분과 제 몸을 분리하는 느낌을 조금은 알겠더라고요. 예전엔 화나는 연기를 하면 눈을 깜빡 깜빡 거리고 혼자 안에서 부글부글 난리도 아니었죠. 이제는 상대방을 정확히 바라보면서 그런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긴 했어요. 그동안 운 좋게 잘 넘어 왔던 거죠.

물론 통틀어 ‘운’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태웅에게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을 시켜준 이유는 뭘까요? 치명적인 매력의 인간성? (웃음)
엄태웅
: 매니지먼트의 힘인 것 같아요. 처음에 심정운 대표랑 일을 시작할 때 그 사람도 힘들었을 거예요. 겨우 이 정도 얘를 데리고 일을 하려느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을 거라고. 엄태웅은 안된다. 안된다. 그런 말을 계속 듣고 본인도 그런 걱정이 안들었겠어요? 하지만 저한테는 항상 와서 열심히 해보자 했어요. 한번은 매니저들한테 옷을 빌려서 프로필 사진을 찍었는데 어떤 사진 하나가 되게 멋있게 나온 게 있었어요. 그 사진을 보고 심 대표가 그러는거예요. 이건 주인공 얼굴이라고, 정말 주인공 얼굴이라고. 물론 아무도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우리 둘만 그러고 있었던 거죠. (웃음) 그런 믿음 때문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어떤 걸 잘하고 어떤 게 약한지 누구보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고. 그 존재가 정말 저에겐 제일 큰 경쟁력이고 힘인 것 같아요. 물론 너무 힘들게 찍어서 저랑 안 어울리는 작품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뭐 하나가 남더라고요. 괜히 대인배나 도인처럼 이야기 하려는 게 아니라 그때는 너무 힘들었고 아이고 이거 큰일 났구나 싶었던 것도 지나고 나니까 정말 큰 걸 하나 주고 간 게 있었던 거죠. <선덕여왕>도 그랬고.

<선덕여왕>도 마음고생이 좀 있었죠?
엄태웅
: 너무 힘들었죠.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열심히만 하면 되지, 라고 생각했는데 열심히만 해서는 안 되는 것도 있더라고요. 안일했던 거죠. 하지만 그때는 너무 힘들었지만 <선덕여왕>을 끝내고 나니 그 다음엔 뭔가 하나를 가지고 가게 되는 거죠. 새옹지마, 라는 말이 나이가 들수록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전화위복은 아니고. (웃음)

<특수본>의 성범에 대한 캐릭터 설명은 동물적이고 즉각적이고 단순한 남자라고 했는데 오히려 영화 속 성범은 불안과 의문 분노가 섞인 눈으로 갈등하는 얼굴을 더 자주 보았던 것 같습니다.
엄태웅
: 감독님은 애초에 성범을 송강호, 김윤석 선배님처럼 굉장히 센 역할로 생각을 하셨는데 결국 저를 파악 한거죠. 아- 그런 건 아니다. (웃음) 태웅 씨는 터트리는 것 보다 누르는 게 더 매력적이니까 그 쪽으로 가자, 하신 거죠. <시라노 연애조작단> 때도 그렇고 늘 결국엔 저에게 맞춰지더라고요. <가족의 탄생>의 형철도 설렁설렁 사는 것 같지만 버럭 할 때는 갑자기 확 도는 스타일이었고, <우생순>의 안승필도 좀 더 나쁜 놈이 되어야 하는데 전 그게 안 되는 거예요. 뭐가 좀 불쌍해 보이나 봐요. 나쁜 놈을 해도 뭔가 진짜로 나쁜 놈은 아닐꺼야, 하는 생각이 들고. 그런데 저는 너무 싫은 거예요. 그게 한계처럼 느껴졌거든요. 나는 왜 지독한 악인이 될 수 없을까. 동물적이고 날 것 같은 그런 악인 연기는 안 나오는 거지? 하는 생각만 머리에 막 들어가 있었죠. 그러다 아! 이게 나구나, 나란 놈의 통을 거쳐서 이 필터를 통해서 걸러져 나오는 게 이건데, 이제 나를 인정하자, 이게 나의 경쟁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타협이라면 타협이겠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좀 편해졌던 것 같아요.

“멜로는 늘 항상 제 마음 속에 있었어요”



<건축학개론> 캐스팅에서 제작사 명필름이 다른 많은 카드는 포기해도 흔들리지 않고 잡고 있는 것이 엄태웅이라는 배우의 캐스팅이었습니다. <시라노 연애 조작단>으로 좋은 호흡을 맞추었던 후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유는 뭐였을까요.
엄태웅
: 심재명 대표는 <우생순>에서 처음 만났는데 그 때도 캐스팅이 난항이었어요. 어쨌든 안승필이라는 캐릭터도 다행히 귀엽게 만들어졌고 작품도 잘되었고 <시라노 연애 조작단>의 경우도 만족스럽게 마무리 된 것에 대한 일종의 의리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의리를 지키는 가운데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게 항상 중심이 잘 잡혀있는 분 같아요. <시라노 연애조작단>때도 사실 과연 엄태웅이 로맨틱코미디에 어울릴 것인가, 하는 시선들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다행히 작품이 잘 되었고. 심 대표님이 저의 멜로적인 부분에 대해 믿어주시는 것 같아요.

멜로에 어울리는 모습은 남들이 찾아내 준 재능인가요, 아니면 본인이 늘 꿈꿔왔지만 마음과는 달리 감독들이 잘 안 써주던 캐릭터였던 가요.
엄태웅
: 멜로는 늘 항상 제 마음 속에 있었고 늘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처음부터 액션이나 센 역할만 들어오는 거예요. 외모가 그러니까. 편하잖아요. 그냥 서 있으면 되니까. 하지만 안에서는 늘 아닌데, 아닌데, 하는 마음이 있었죠. 더 나이 들기 전에 정통 멜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멜로나 사랑은 그나마 제가 아는 감정이잖아요. 그렇다고 촬영이 쉬워지는 건 아니지만 그 안에서 조금씩 감정이 움직이고 흘러가는 것들이 재밌더라고요.

<네버엔딩스토리>는 티저영상을 제외하고는 노출된 부분이 많지 않아서 궁금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엄태웅
: 제가 연기하는 동주라는 남자는 어떻게 보면 애 같은 면이 많아요. 삶에 짐이 좀 없는 친구라 귀여워요. 며칠 전에 편집 붙여놓은 것만 조금 봤는데 영화가 예뻐요. 너무 재밌게 찍어서 기대가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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