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가족의 비밀’에서 한 명만 주인공으로 꼽아야 한다면 그건 억척엄마 양희의 몫일 것이다. 현실에 비해 품은 꿈이 너무 커서 간혹 철딱서니 없는 사고를 치기도 하는 왕씨 일가를 그나마 한 밥상 앞으로 불러 모으는 건 양희니까 말이다. 그런 양희를 김미경이 연기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르겠다. MBC 의 버진 어멍, KBS 의 윤희 엄마로 기억되는 그는 매번 강인한 생명력과 내 새끼에 대한 끈끈한 애정을 자신의 배역에 새겨 넣었다. 지난 22일 ‘가족의 비밀’ 세트 촬영이 한창인 수원 KBS 드라마센터, 6시간 가까이 이어진 촬영 끝에 저녁식사 시간을 쪼개 인터뷰에 응한 김미경이 던진 첫 인사는 “오래 기다려서 어떻게 해요? 식사들은 했어요?”였다. 자기의 고단함보다 상대의 끼니를 먼저 걱정하는 그는 카메라 뒤에서도 천상 엄마였다.최근 의 인기가 뜨겁다. 배우 입장에서 실감이 나는가.
김미경: 나도 시청자의 입장으로 방송을 보고 있다. 분량이 큰 역할이 아니라서 600년에 한 번 촬영하러 가니까. (웃음) 그런데 갈수록 재미있다. 처음 제목을 봤을 때는 그냥 가벼운 젊은이들 사랑 이야기인가 생각했는데, 대본을 보니 이건 가볍게 치부해 버릴 드라마가 아니더라. 그리고 젊은 친구들이 어찌나 치열하게 연기를 하는지. 시청률도 처음에 비해 굉장히 올라갔다. 역시 좋은 드라마, 열심히 하는 드라마는 그만큼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봐주는 거 같다.
“실제 우리 집은 삼총사 분위기” │김미경 “나 그렇게 무섭고 센 여자 아니다”" />
그런 면에서 이번 ‘가족의 비밀’ 역시 극 중 가족들이 죄다 크고 작은 비밀을 안고 있는 설정이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시청자들이 무얼 얻어 가면 좋겠나.
김미경: 내 생각에 이 극의 중요한 결론은, 비밀을 정직하게 고백을 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구한다는 거다. 고백이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 아무리 가까운 가족이라도 말하기 싫은 비밀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고백을 하고 용서하면서 서로 다독이며 감정을 공유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된다. 이게 굉장히 바람직하고 옳은 정답이지만 현실 속에서 얼마나 지켜질 수 있을까.
말 그대로 서로 다독이는 그 따뜻함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 작품인데, 연기에 있어 중점을 둔 부분이 있다면.
김미경: 이 작품은 현실에서 볼 수 있는 소시민 가정의 모습을 담고 있다. 꾸미거나 미화시키기 보다는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얼마나 정직하게 표현해내느냐가 중요하다. 그랬을 때 극 전체의 따뜻함이 전해지고, 보는 이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거 같다.
소시민 가정을 담아낸다는 면에서 동료 배우들과의 호흡이 매우 중요했겠다.
김미경: 배우들의 앙상블이 얼마나 잘 어우러지느냐에 따라서 작품 자체의 성패가 달라지는 것 같다. 윤주상 선생님은 까마득한 선배님인데 연극판에서 많이 뵈었던 분이라 낯설지 않았다. 이희도 선배님은 같이 출연한 작품도 있었고, 모든 연기자들을 편하게 대해주시는 분이셔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딸로 나오는 윤세아는 나와 영화 를 찍은 인연으로 아주 친해졌다. 아들 역의 전아민은 나도 처음 보는 배우인데, 어찌나 뻔뻔스레 연기를 잘 하는지. 처음 만났으면 어색할 수 있는데 그런 거 없이 살갑게 다가오니까 정말 가족 같은 느낌이다. 수다를 너무 떨어서 작품에 지장을 줄 지경이다. (웃음)
모든 가정이 그렇듯, 그 중심에 분명 어머니 양희가 있다. 그래서 실제 한 가장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김미경이 궁금하기도 하다.
김미경: 일 외의 모든 시간을 가족에게 투자한다. 우리 집 분위기는 엄마와 딸이라기보단 삼총사 같은 느낌이다. (웃음) 남편, 나, 딸은 거의 동지 같은 존재들이다. 서로 정말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려고 노력하고, 실제로 많은 부분을 그렇게 해 나가고 있는 거 같다. 이 드라마에서 그런 것처럼.
“나 그렇게 무섭고 센 여자 아니다” │김미경 “나 그렇게 무섭고 센 여자 아니다”" /> 그러고 보면 어머니 역할을 하더라도 모녀관계가 특히 인상 깊은 배역을 맡아왔다. 남편이 없거나, 남편이 있어도 경제적으로 무능한 탓에 사실상의 가장 노릇을 수행하는 어머니 같은.
김미경: 열 살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우리 집이 딸이 넷인데, 그 뒤로 어머니께서 혼자 네 자매를 키우셨다. 그리고 나도 지금 딸이 하나 있고. 그러다 보니 엄마와 딸과의 관계는 그 어느 집보다 돈독하다. 그래서 내가 딸이었을 때 마음, 내가 엄마가 되고 난 뒤에 내 어머니를, 내 딸을 보는 마음. 이런 부분들이 섬세하고 크다. 그런 게 연기에 보여서 그런지 아들 가진 엄마 역할로 잘 캐스팅을 안 하더라.
확실히 좀 다른 역할을 하고 싶은 욕심이 있나보다.
김미경: 배역을 통해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데, 나한테는 이런 강인한 어머니 역할만 들어온다. (웃음) 그런데 또 강하다고 다 같은 모습의 강함이 아니니까. 강인함 속에서도 굉장히 여러 가지 모습이 있다. 그래서 들어오는 대로 그냥 다 하려고 한다. 물론 ‘나도 좀 이제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는데’ 하는 생각도 들지만. 나 그렇게 무섭고 센 여자 아니다. (웃음) 집에서도 그렇지 않은데, 캐스팅 하시는 분들께서 그런 성격이 맞는다고 보시는 거 같다.
기사가 나가면 여러 감독들이 연락하지 않을까. (웃음)
김미경: 안 시켜주시더라고. 내가 굉장히 세 보이나 보다. (웃음)
사실 이번 작품에서도 강한 어머니 역할을 맡았지만, 단막극이기에 다른 지점이 있나.
김미경: 연속극을 찍을 때는 전쟁 같은 기분이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이 빨리 달리는 거다. 단막극도 시간적 여유가 그렇게 많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마음을 추스르고 한 번 더 대사를 연구하고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급하게 달렸을 때 잊고 있었던 나의 디테일한 모습, 삭제되어 버리는 사람의 모습, 내가 할 수 있는 표현의 한계에서 너무 급한 나머지 아깝게 포기를 해야 했던 것들을 여기서는 조금이라도 더 해 볼 수 있다. 예전에는 단막극도 여유 없이 급하게 했던 것 같다. 어려서 방송을 몰랐던 탓에 따라가기 바빴던 것도 있었고. 지금은 환경도 한결 여유롭고, 더 편하게 작업하고 있다. 실제 한 아이의 엄마이기도 하고, 사람 사는 소시민의 모습이 그대로 담긴 작품이라 여유를 갖고 더 많이 생각하며 연기하고 있다.
그렇게 스스로를 표현할 여유를 찾는다는 면에서 15년 동안 활동했던 연극 무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나.
김미경: 연극판을 떠난 건 아니다. 무대에 서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기도 했고. 그런데 연극이 하고 싶다고 해서 갑작스레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할 일이고, 돌아가서 연극을 좀 올리고 싶은 이 마음이 언젠가는 결실을 맺겠지. 하지만 서두르거나 조바심을 내지는 말자고 마음을 다스리고 있다. 그리고 딸이 지금 중2인데, 방송은 아무리 일이 많아도 연극보다 시간적 여유가 많다. 연극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 출근해서 밤 12시에나 들어와야 하고, 연습기간도 최소한 3개월은 가져야 한다. 그러면 아이의 얼굴을, 남편의 얼굴을 너무 못 본다. 엄마의 자리, 아내의 자리까지 지키면서 그렇게 하려면 아직 조금 더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불안함과 조바심 속에서 함부로 무언가를 만들어서 하고 싶은 상태는 아니다.
글. 이승한 fourteen@
사진. 이진혁 el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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