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시를 직접 써 본 적은 있나요?
윤정희 : 학교 다닐 때 말고는 없어요. (웃음) 대신 낭송을 많이 했죠.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시는 시 낭송 음반을 내기도 했어요. 미당 선생님이 평소에 저희 부부를 너무 사랑해주셔서 그 사랑에 어떻게 보답할까 하다 남편이 연주를 하고 내가 시를 읽었어요. 시 낭송 전에는 미당 선생님하고 시를 같이 공부하기도 하고. 음반이 나오고 나서는 미당 선생님이 그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미당 선생님 시는 특히 낭송하기 너무 좋기도 하구요. 그리고 촬영 전에 시집 10권을 머리맡에 두고 읽었는데, 그 때 와 닿았던 게 김용택 시인의 시였어요. 읽을수록 편안하게 마음에 들어와서 너무 좋았는데, 그 분이 우리 영화에 출연해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연기도 너무 잘해서 또 놀랐고. (웃음)
“원래는 배우가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시를 읽고 감동하는 감수성을 유지하기 어렵잖아요. 선생님은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참 다르게 사신 것 같아요.
윤정희 : 타고난 성격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 영화를 할 때도, 프랑스에서 사는 지금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요. 나라 분위기하고 친구들만 조금 달라졌죠. 왜냐하면 영화배우일 때도 카메라 앞에서만 배우였어요. 스튜디오에서 나오면 나 자신, 본명인 손미자로 돌아갔어요. 그 미자는 어느 나라에서든 변하지 않았고, 그 모습이 지금까지 계속된 것 같아요.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참 불편했을 거예요.
대부분의 스타들은 사생활에서도 스타의 모습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요.
윤정희 : 난 반대입니다. (웃음) 배우 생활도 하나도 화려하지 않았어요. 팬들이 날 스타로 만들어준 거였지, 제 마음 속에는 스타의식 같은 건 없었어요. 내 이름이 손미자인데, 그 때나 지금이나 배우를 굉장히 화려한 직업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생활 속으로 들어가도 조용하게 있겠다해서 고요할 정에 계집 희자를 써서 정희라고 지었어요. 그리고 윤이라는 성은 친구 중에 너무 예쁘고 착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성이 윤이었어요. 그래서 허락도 없이 성을 윤이라고 하고. (웃음)
그만큼 배우가 아닌 자기만의 인생을 꿈꾸셨던 것 같아요. 인터뷰 중에 배우 생활을 5년만 하고 떠나겠다고 마음먹었다가 2년을 더 하고 떠났다는 말씀을 하셨던데요.
윤정희 : 원래 꿈은 배우가 아니었거든요. 우연히 된 거였어요. 원래는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고, 장래에는 대학 교수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딱 5년만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그 때는 우리 영화계가 황금기였잖아요. 그래서 너무나 좋은 작품을 할 수 있었고, 쉽게 떠날 수 없는 입장이 돼서 7년을 채웠어요. 그러다 1972년에 신상옥 감독님과 영화 헌팅 차 파리로 갔는데, 그 때 내가 갈 곳은 미국이 아니라 파리다 했어요. 르뮈에르 형제가 영화를 만든 곳, 파리라고.
그런데 1200:1의 경쟁률을 뚫고 의 주연이 되면서 데뷔하신 거였잖아요. 그러려면 보통 배우가 되고 싶은 의욕이 강해야 할 텐데요. (웃음)
윤정희 : 친구들이 의 오유경을 뽑는다고 해서 그냥 우연히 했어요. (웃음) 사실 그 때도 면접시험 마지막에 스크린 테스트가 있었는데 현장에서 누가 벌써 결정이 됐대,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내 단점이 필요 이상 자존심이 강한 거예요. (웃음)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바로 오디션을 보다 나가 버렸죠. 그래서 한강을 걷고 있었는데, 그 때 다른 사람들이 설득해서 돌아와서 스크린 테스트를 해서 됐죠.
당돌했군요. (웃음) 어린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하려면 부모님이 굉장히 자신감 있게 길렀을 것 같은데요.
윤정희 : 아버지가 너무 로맨티스트셨어요. 날 프랑스로 보내는 게 꿈이었대요. 그리고 동생들은 미국으로 보내는 게 꿈이었는데, 결국 바람대로 되셨어요. 그리고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는 무용하고 합창을 같이 배우도록 했구요. 그런 게 연기할 때 참 많은 도움이 됐죠. 발레도 하고 고전무용도 했기 때문에 영화에서 춤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저절로 몸이 움직여졌거든요.
와, 그 시절에 그러기가 게 정말 어려웠을 텐데요.
윤정희 : 아버지가 동경 유학생이었거든요. 일본에서 법대를 다녔는데, 학교 다닐 때 배우들하고 사진 찍은 게 많아요. (웃음) 배우가 되고 싶어 하셨던 건 아니지만,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았던 거죠.
“죽을 때까지 영화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선생님도 아버지처럼 낭만과 예술에 관심이 많으신 거군요. (웃음) 배우나 스타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윤정희 : 네. 한창 활동할 때는 개인 생활이 없었어요. 바깥에 나가면 여학생들이 달려들고, 남자들이 혈서 쓰고 그랬어요. (웃음) 그런 사랑이 고맙기는 했지만 자유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자유를 찾아서 파리로 가서 영화 공부를 했죠. 그러다 시나리오가 좋은 게 오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와서 연기를 했어요. 결혼 후에도 한 스무 작품 했잖아요. (웃음) 얼마나 매력 있어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음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멋있게 살아가는 90세 여인도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래서 어떻게 아름답게 세월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삶을 재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요.
그 점에서 프랑스로 가신 뒤에 선택한 작품들이 더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윤정희 : 맞아요. 한 편씩, 한 편씩 찍었으니까요. 한 작품씩만 하면서 그 작품들을 더 아끼고 싶고, 더 파고들게 됐어요. 그리고 이후로 15년 동안 여러 분야에서 같이 하자는 제안이 왔었어요. 그런데 그 때 아껴 놓고 기다리니까 이렇게 좋은 작품이 들어오잖아요? (웃음) 내가 자유를 찾아서 가자고 생각한 뒤부터는 영화를 찍을수록 영화가 귀하게 느껴졌어요. 연기자는 삶을 재현하는 거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이 분야를 떠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감성을 유지하는데 프랑스라는 나라에서의 생활이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윤정희 : 프랑스에서 사는 게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든가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다만 파리는 예술의 도시잖아요. 정말 전람회도 많고, 음악회도 많고. 그리고 참 자유로워요. 누구도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아요. 그러한 자유로움이 영향을 줄 수는 있겠죠. 저희 부부는 전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데, 확실히 다시 파리로 돌아오면 다른 느낌이 있어요. 그리고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가족이죠. 내가 이럴 수 있는 건 우리 식구들이 나 이상으로 영화를 좋아하고, 내가 좋은 작품을 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가능한 거니까요.
를 하면서 백건우 선생님 앞에서 처음으로 연기 연습을 하셨다면서요.
윤정희 : 전에는 전혀 안 했죠. (웃음) 그 전에는 혼자서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잘하고 싶은 장면이 있었는데 그걸 연기하려면 사람이 필요해서, 항상 열심이지만 이번에는 특히 그랬어요. 반대로 남편의 음악에 대해선 많은 얘기를 하구요. 남편이 연주 프로그램을 짤 때도 이거 한 번 들어볼래? 이러면서 들려주기도 하고. 날 클래식을 좋아하는 청중으로 생각하고 의견을 물어봐요. 물론 영화를 할 때는 남편이 아이디어를 많이 주고.
그런데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고, 프랑스에서 살면서도 칸 영화제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 가셨다면서요?
윤정희 : 자기 작품 안 가는데 왜 가요. 놀러갈 시간이 없었어요. (웃음)
그러면 이번에 가게 됐네요. (웃음) 어떤 기분이세요?
윤정희 : 칸의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그리고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를 할 때 가장 좋은 게 좋은 영화인을 만나는 거예요. 거기서도 좋은 영화인을 만나고 싶어요.
칸의 레드 카펫을 밟을 때 어떤 의상을 입을지 생각하셨나요?
윤정희 : 그건 상상해보세요. (웃음)
글. 강명석 two@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윤정희 : 학교 다닐 때 말고는 없어요. (웃음) 대신 낭송을 많이 했죠.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시는 시 낭송 음반을 내기도 했어요. 미당 선생님이 평소에 저희 부부를 너무 사랑해주셔서 그 사랑에 어떻게 보답할까 하다 남편이 연주를 하고 내가 시를 읽었어요. 시 낭송 전에는 미당 선생님하고 시를 같이 공부하기도 하고. 음반이 나오고 나서는 미당 선생님이 그걸 너무 좋아하셨어요. 미당 선생님 시는 특히 낭송하기 너무 좋기도 하구요. 그리고 촬영 전에 시집 10권을 머리맡에 두고 읽었는데, 그 때 와 닿았던 게 김용택 시인의 시였어요. 읽을수록 편안하게 마음에 들어와서 너무 좋았는데, 그 분이 우리 영화에 출연해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연기도 너무 잘해서 또 놀랐고. (웃음)
“원래는 배우가 꿈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나이 들수록 시를 읽고 감동하는 감수성을 유지하기 어렵잖아요. 선생님은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 참 다르게 사신 것 같아요.
윤정희 : 타고난 성격인 것 같아요. 한국에서 영화를 할 때도, 프랑스에서 사는 지금도 변한 게 없는 것 같아요. 나라 분위기하고 친구들만 조금 달라졌죠. 왜냐하면 영화배우일 때도 카메라 앞에서만 배우였어요. 스튜디오에서 나오면 나 자신, 본명인 손미자로 돌아갔어요. 그 미자는 어느 나라에서든 변하지 않았고, 그 모습이 지금까지 계속된 것 같아요. 만약 그러지 못했다면 참 불편했을 거예요.
대부분의 스타들은 사생활에서도 스타의 모습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데요.
윤정희 : 난 반대입니다. (웃음) 배우 생활도 하나도 화려하지 않았어요. 팬들이 날 스타로 만들어준 거였지, 제 마음 속에는 스타의식 같은 건 없었어요. 내 이름이 손미자인데, 그 때나 지금이나 배우를 굉장히 화려한 직업으로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생활 속으로 들어가도 조용하게 있겠다해서 고요할 정에 계집 희자를 써서 정희라고 지었어요. 그리고 윤이라는 성은 친구 중에 너무 예쁘고 착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성이 윤이었어요. 그래서 허락도 없이 성을 윤이라고 하고. (웃음)
그만큼 배우가 아닌 자기만의 인생을 꿈꾸셨던 것 같아요. 인터뷰 중에 배우 생활을 5년만 하고 떠나겠다고 마음먹었다가 2년을 더 하고 떠났다는 말씀을 하셨던데요.
윤정희 : 원래 꿈은 배우가 아니었거든요. 우연히 된 거였어요. 원래는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고, 장래에는 대학 교수나 외교관이 되고 싶었어요. 그래서 딱 5년만 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그 때는 우리 영화계가 황금기였잖아요. 그래서 너무나 좋은 작품을 할 수 있었고, 쉽게 떠날 수 없는 입장이 돼서 7년을 채웠어요. 그러다 1972년에 신상옥 감독님과 영화 헌팅 차 파리로 갔는데, 그 때 내가 갈 곳은 미국이 아니라 파리다 했어요. 르뮈에르 형제가 영화를 만든 곳, 파리라고.
그런데 1200:1의 경쟁률을 뚫고 의 주연이 되면서 데뷔하신 거였잖아요. 그러려면 보통 배우가 되고 싶은 의욕이 강해야 할 텐데요. (웃음)
윤정희 : 친구들이 의 오유경을 뽑는다고 해서 그냥 우연히 했어요. (웃음) 사실 그 때도 면접시험 마지막에 스크린 테스트가 있었는데 현장에서 누가 벌써 결정이 됐대,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내 단점이 필요 이상 자존심이 강한 거예요. (웃음)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바로 오디션을 보다 나가 버렸죠. 그래서 한강을 걷고 있었는데, 그 때 다른 사람들이 설득해서 돌아와서 스크린 테스트를 해서 됐죠.
당돌했군요. (웃음) 어린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하려면 부모님이 굉장히 자신감 있게 길렀을 것 같은데요.
윤정희 : 아버지가 너무 로맨티스트셨어요. 날 프랑스로 보내는 게 꿈이었대요. 그리고 동생들은 미국으로 보내는 게 꿈이었는데, 결국 바람대로 되셨어요. 그리고 유치원에 다니면서부터는 무용하고 합창을 같이 배우도록 했구요. 그런 게 연기할 때 참 많은 도움이 됐죠. 발레도 하고 고전무용도 했기 때문에 영화에서 춤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저절로 몸이 움직여졌거든요.
와, 그 시절에 그러기가 게 정말 어려웠을 텐데요.
윤정희 : 아버지가 동경 유학생이었거든요. 일본에서 법대를 다녔는데, 학교 다닐 때 배우들하고 사진 찍은 게 많아요. (웃음) 배우가 되고 싶어 하셨던 건 아니지만, 그런 쪽으로 관심이 많았던 거죠.
“죽을 때까지 영화를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선생님도 아버지처럼 낭만과 예술에 관심이 많으신 거군요. (웃음) 배우나 스타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윤정희 : 네. 한창 활동할 때는 개인 생활이 없었어요. 바깥에 나가면 여학생들이 달려들고, 남자들이 혈서 쓰고 그랬어요. (웃음) 그런 사랑이 고맙기는 했지만 자유가 없었잖아요. 그래서 자유를 찾아서 파리로 가서 영화 공부를 했죠. 그러다 시나리오가 좋은 게 오면 언제든지 한국으로 와서 연기를 했어요. 결혼 후에도 한 스무 작품 했잖아요. (웃음) 얼마나 매력 있어요? 여성이든 남성이든 젊음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멋있게 살아가는 90세 여인도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래서 어떻게 아름답게 세월을 보낼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삶을 재현할 수 있는 작품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살아요.
그 점에서 프랑스로 가신 뒤에 선택한 작품들이 더 각별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윤정희 : 맞아요. 한 편씩, 한 편씩 찍었으니까요. 한 작품씩만 하면서 그 작품들을 더 아끼고 싶고, 더 파고들게 됐어요. 그리고 이후로 15년 동안 여러 분야에서 같이 하자는 제안이 왔었어요. 그런데 그 때 아껴 놓고 기다리니까 이렇게 좋은 작품이 들어오잖아요? (웃음) 내가 자유를 찾아서 가자고 생각한 뒤부터는 영화를 찍을수록 영화가 귀하게 느껴졌어요. 연기자는 삶을 재현하는 거니까, 내가 죽을 때까지 이 분야를 떠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감성을 유지하는데 프랑스라는 나라에서의 생활이 어떤 영향을 미치나요?
윤정희 : 프랑스에서 사는 게 굉장히 큰 영향을 미친다든가 하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다만 파리는 예술의 도시잖아요. 정말 전람회도 많고, 음악회도 많고. 그리고 참 자유로워요. 누구도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아요. 그러한 자유로움이 영향을 줄 수는 있겠죠. 저희 부부는 전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데, 확실히 다시 파리로 돌아오면 다른 느낌이 있어요. 그리고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건 가족이죠. 내가 이럴 수 있는 건 우리 식구들이 나 이상으로 영화를 좋아하고, 내가 좋은 작품을 하는 걸 너무 좋아해서 가능한 거니까요.
를 하면서 백건우 선생님 앞에서 처음으로 연기 연습을 하셨다면서요.
윤정희 : 전에는 전혀 안 했죠. (웃음) 그 전에는 혼자서도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잘하고 싶은 장면이 있었는데 그걸 연기하려면 사람이 필요해서, 항상 열심이지만 이번에는 특히 그랬어요. 반대로 남편의 음악에 대해선 많은 얘기를 하구요. 남편이 연주 프로그램을 짤 때도 이거 한 번 들어볼래? 이러면서 들려주기도 하고. 날 클래식을 좋아하는 청중으로 생각하고 의견을 물어봐요. 물론 영화를 할 때는 남편이 아이디어를 많이 주고.
그런데 그렇게 영화를 좋아하고, 프랑스에서 살면서도 칸 영화제에는 지금까지 한 번도 안 가셨다면서요?
윤정희 : 자기 작품 안 가는데 왜 가요. 놀러갈 시간이 없었어요. (웃음)
그러면 이번에 가게 됐네요. (웃음) 어떤 기분이세요?
윤정희 : 칸의 분위기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아요. 그리고 국제 영화제에서 심사를 할 때 가장 좋은 게 좋은 영화인을 만나는 거예요. 거기서도 좋은 영화인을 만나고 싶어요.
칸의 레드 카펫을 밟을 때 어떤 의상을 입을지 생각하셨나요?
윤정희 : 그건 상상해보세요. (웃음)
글. 강명석 two@
사진. 채기원 ten@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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