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가 있다. 유명 한의원 원장에 훤칠한 외모라는 외적인 조건보다 사려 깊고 다정한 내면에 먼저 반하게 되는, 보기 드문 어른 남자.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하고, 치유에 앞서 그 상처의 원인을 찾아 지켜주려 하는 진짜 의사. 에둘러 말하지 않고 “저는 당신을 좋아합니다”라고 직구를 던진 뒤 묵묵하게 기다리다 손 내밀어 주는 이 남자의 이름은 윤필주다. 또 한 남자가 있다. 이 남자는 이름이 없으니 그냥 풍산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다. 그에게 없는 것은 이름만이 아니다. 인용할 수 있는 대사 한 마디, 살아있다는 증거 하나 없다. 장대높이뛰기로 휴전선을 넘나들며 평양에서 서울까지 겨우 세 시간. 그 사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함께 넘겨 온 여자가 위험에 처한 순간, 저 밑에서부터 끌어올린 소리로 짐승처럼 울부짖을 뿐이다.

윤계상, 매일 얼굴 지우는 남자
윤계상│높이뛰기는 없다
윤계상│높이뛰기는 없다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가 없는 두 남자, MBC 의 필주와 의 풍산 사이에 이 들을 연기한 윤계상이 있다. 가수로 데뷔한지는 12년, 배우가 된지는 7년. 군대에서의 2년을 제외하더라도, 이제 막 배우로서의 살아온 시간이 더 길어진 서른넷의 윤계상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까지 배우 윤계상의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억력이 나쁜 탓이 아니다. 그가 출연한 작품들이 더 많은 대중을 만나지 못했던 이유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윤계상이 자신의 진짜 얼굴을 지우는 데 능한 배우인 것이 더 크다. 자신을 완전히 버리고 완벽하게 캐릭터에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가 아니라, 그의 재능이기도 한 백지 같은 얼굴에 대한 이야기다. 필주도 될 수 있고, 풍산이도 될 수 있는 얼굴.

그래서 이 순간이 오기까지 배우 윤계상의 필모그래피를 다시 보는 것은 오래된 앨범을 보는 일과 비슷하다. 성장 단계에 따라 정리해 둔 앨범처럼, 데뷔작 영화 에서 그는 하고 싶은 일이 없어 흔들리는 열아홉 소년이었고, SBS 에서는 “온 우주의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 밖에 모르는 애틋하고 안쓰러운 청춘이었다. 그리고 영화 와 에서는 평범한 한 남자가 폭력과 고통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젖어들면서 나락으로 떨어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소년은 성장통을 겪으며 청년이 되고, 그 청년은 자기 안의 어둠을 발견한 뒤 한 단어로는 정의할 수 없는 어른이 된다. 이 성장의 과정은 배우 윤계상의 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역할을 맡았고, 그 다음에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역할에 자신을 맞춰갔다면, 이제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것을 스스로 표현해내고, 그 안에 윤계상만의 색을 입히는 방법까지 알게 된 것이다.

어른이 된 배우에게 불어오는 세컨드 윈드
윤계상│높이뛰기는 없다
윤계상│높이뛰기는 없다
필주가 구애정(공효진)을 보내주고 차 안에서 우는 신은 촬영 현장에 인파가 몰려 몰입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윤계상은 속에서도 “마음이 너무 아파서” 진심으로 울었다. 그 결과,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는 성숙한 태도로 모두 정리한 척 하지만 뒤돌아 혼자 울며 “하나도 정리가 안됐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필주의 마음은 브라운관 너머로 전달됐다. 철저하게 비현실적인 존재인 풍산이 고문 받고 피를 흘릴 때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지 않더라도 아픔이 느껴지는 것은 “얼굴에 인생이 있는” 배우 덕분이다. 그렇게 대중은 윤필주에서 풍산까지, 극단의 표정을 한 얼굴에 담아낼 수 있는 배우를 만났다. 그래서 지금 윤계상을 지켜본다는 것은, 수많은 사람의 삶을 경험하며 소년에서 어른까지 성장해 온 배우이자 한 사람의 인간이 삶의 방향을 어떻게 정하느냐를 지켜보는 것과 같다. 1년에 드라마 한 편과 영화 한 편 출연을 원칙처럼 세워뒀던 그는, 의 풍산을 의 필주가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대중의 반응을 보고 차기작으로 어떤 작품을 선택할지 신중하게 고민 중이다. 자신의 취향을 고집해오던 방식에서 한 발 물러나, 지금의 윤계상을 만들어준 “내 편들”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방법도 함께 생각하고 있다. 어른은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책임져야 하는 존재다. 윤계상은 배우로 살기 위해 애쓰고, 그렇게 사는 것으로 사랑하는 여자보다 더욱 무거운 삶을 짊어진 어른이 되었다.

그래서 그 모든 과정을 지나온 윤계상은 에서의 연기에 대해 배우로서의 도약의 순간이라는 평가 앞에 고개를 젓는다. 누구도 어느 날 갑자기 열아홉에서 서른넷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그에게 지금까지의 연기는 지금 이 순간을 위한 도움닫기가 아니었다.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윤계상은 들려오는 소리들에, 가로막는 장애물에 개의치 않고 앞으로도 계속 달려갈 것이다. 이제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알지 못한다고 노래하던 시절은 지났다. 이제 어른이 된 그는 스스로와 세상 모두가 납득할 만한 ‘좋은 배우’라는 삶의 유일한 꿈을 향해 간다. 언젠가 더 오랜 시간이 흘러 자신의 얼굴이 비어있기에 모든 것을 담을 수 있는 완전한 배우의 얼굴이 되기를 기다리면서. 언제나 조금 느리거나 빨랐던 귓가의 음악이 이제야 그의 발자국과 박자를 맞추기 시작한다. 심장의 두근거림과 가쁜 호흡이 잦아들고, 세컨드 윈드. 윤계상 인생에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글. 윤이나(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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