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진│질투나도록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영화들
김윤진│질투나도록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영화들
김윤진은 유년기를 미국에서 보냈고, 배우로 첫 발을 내딛은 것도 브로드웨이의 연극 무대였다.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영어로 제 생각을 말하고, 작품의 캐릭터를 묘사했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는 동안 김윤진은 정확하고 풍부한 우리말로 대화에 재미를 더했다. 꼭 필요한 조사만을 알맞은 곳에 끼워 넣었고, 적절한 형용사로 말에 윤기를 돌게 했다. 말끝을 부실하게 흐리는 법이 없었고, 어떠한 질문에도 명료하게 답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원하는 바를 세밀하게 전달하는 김윤진의 화법은 그녀가 보여준 연기와도 꼭 맞아 떨어졌다.

한국에서 거의 최초로 쓰인 여전사라는 수식어는 영화 로 얼굴을 알린 김윤진을 오래도록 ㅉㅗㅈ아 다녔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총을 겨누고 마주한 낯선 얼굴의 김윤진은 당대 최고의 배우였던 한석규와 팽팽하게 맞섰다. 그리고 카메라 너머의 관객을 겨냥하던 직선도로와도 같던 눈빛은 영화 의 연에게까지 이어졌다. 전사의 강인함과 여인의 눈물을 가진 여배우는 그렇게 여전사의 갑옷에 갇히는 듯 했다. 그러나 김윤진은 의 미흔을 시작으로 리트머스지처럼 자신의 스펙트럼을 번져 보였다. 생에 대한 어떤 의미도 찾을 수 없게 된 미흔이 시들지 않고 다시 불씨를 찾기까지 김윤진도 그녀와 함께 앓았다. 의 선도, 의 지연도 각기 스테레오 타입의 동양 여자와 깐깐한 변호사로 그치기 쉬웠지만 “작품의 공백을 채우는 건 배우의 힘”이라는 믿음을 가진 김윤진에 의해 공허한 내면을 갖지 않았다.

“여배우들이 설 자리가 없어요. 최근에 이미연, 강수연 선배랑도 우리 또래 여배우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정말 없다는 얘기를 나눴어요. 아마 많은 여배우들이 비슷한 상황일 거예요.” 김윤진은 영화계의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워하면서도 사랑하는 영화에 대해 얘기할 때는 시샘 섞인 부러움과 건강한 질투로 한껏 들떴다. 매순간 그녀를 질투심에 달뜨게 만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영화들이다.
김윤진│질투나도록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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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Notes On A Scandal)의 케이트 블랑쉐
2006년 | 리차드 이어
“케이트 블랑쉐는 볼 때마다 감탄하게 돼요. 테크닉과 감성 모두 완벽하잖아요. 카리스마도 있고, 다양한 언어의 악센트도 잘 살리고. 그렇게 테크닉이 좋은 배우를 보면 부러워요. 저보고 사투리 연기를 하라고 하면 몇 개월 동안 그 지방에서 살아야 할 텐데 호주 출신이니까 영국 억양도 좋고, 정말 신기할 정도로 어떤 배역을 맡아도 참 잘 어울려요. 함께 연기한 주디 덴치도 너무 좋은 배우죠. 크리스탈처럼 얇고 부서질 듯한 목소리로 바바라의 외로움을 부각시켰어요. 만만치 않은 캐릭터를 살려낸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나도 좋았어요.”

외롭거나 지친 사람들은 무엇이든 의지할 것을 찾게 된다. 그것은 술 혹은 초콜릿, 때로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기대는 것을 넘어 중독이 될 때 내게 힘을 주던 것들은 철저히 나를 파괴한다. 쉬바(케이트 블랑쉐)에게는 열다섯 소년이, 바바라(주디 덴치)에게는 쉬바가 그랬다. 고독을 피하기 위해 쉬바에게 집착하는 바바라는 스릴러보다도 섬뜩하고, 가늠할 수 없는 그녀의 외로움은 질식할 듯 슬프다.
김윤진│질투나도록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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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e Reader)의 케이트 윈슬렛
2008년 | 스티븐 달드리
“영화보다 책을 먼저 읽었는데 영화로 나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죠. 아니나 다를까 영화화 소식을 들었을 때 어찌나 두근거리던지. 같은 여배우로서 한나 같은 캐릭터를 할 수 있단 것 자체가 질투가 났어요. (웃음) 책을 영화로 옮기는 게 너무 힘든데, 그 공백과 한나의 잔잔한 감정들을 케이트 윈슬렛이 다 채워준 것 같아요. 소년인 마이클이 책을 읽어주는데, 한나가 아이처럼 꺼이꺼이 울어요. 한나가 소망하는 사랑, 인생, 지식이 담긴 이야기에 빠져드는 케이트 윈슬렛의 표정이 너무 완벽해서 정말 압권인 장면이었죠.”

홀로코스트는 인류가 저지른 가장 극악한 범죄 중의 하나지만 그 악을 행한 이들도 모두 악마였을까? 자신도 모른 채 그 악행에 가담한 한나(케이트 윈슬렛)는 누군가에게는 영혼이 없는 자로 보이겠지만 마이클(랄프 파인즈/데이빗 크로스)에게만은 첫사랑 혹은 유일한 사랑이었다. 가스실로 유태인들을 보낸 한나 또한 사랑 이야기에 울고, 익살스러운 등장인물에 웃던 온기를 간직한 여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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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Atonement)의 키이라 나이틀리
2007년 | 조 라이트
“키이라 나이틀리가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 아닐까요? 그녀가 등장하자마자 고집 센 부잣집 딸 세실리아의 자신감이 그대로 느껴졌어요. 심지어 분수에 빠져서 젖은 채로 나올 때의 그 당당함이란! 세실리아의 동생으로 나왔던 브라이오니의 연기도 인상적이었어요. 어렸을 때의 단순한 실수로 평생 자신을 괴롭히는 죄책감이라니… 자기 영혼이 다 타서 아무것도 안 남아도 사랑에 도전하는 세실리아의 모습이 제 마음을 울린 것은 물론 영화적으로도 완성도 있게 그려진 것 같아요.”

질투 그리고 오해는 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대표적인 장애물들이다.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와 로비(제임스 맥어보이)를 결국 비극으로 내몬 것은 신분의 차이보다 작은 오해와 누군가의 질투에서였다. 세실리아의 어린 동생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넌)가 훗날 백발이 될 때까지 그들에게 갚지 못한 부채를 안고 살았다 하더라도 쉬이 용서받지 못할 만큼 이 둘의 마지막은 가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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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e Hours)의 세 여배우
2002년 | 스티븐 달드리
“메릴 스트립, 줄리안 무어, 니콜 키드먼도 좋아하지만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또한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어요. 그런 이야기를 최고의 여배우들이 함께 연기하다니! 세 여배우들을 한 영화 안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부럽죠. 미묘한 여자 캐릭터를 잘 묘사한 시나리오도 좋았구요. 시적이면서도 대중적인 같은 여자 영화가 우리나라에서도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기 세 명의 댈러웨이 부인들이 있다. 을 쓰고 있는 버지니아 울프, 그녀의 작품에 빠져 사는 주부 그리고 댈러웨이 부인을 별명으로 가진 출판 편집자. 을 매개로 시공간을 초월해 연결되어 있는 여자들은 놀랄 만큼 닮았다. 평온해 보이는 일상에 은밀하게 감춰둔 상처들에 조금씩 갉아 먹히고 있다는 것이. 그녀들이 상처를 극복하거나 점령당해가는 모습은 나 자신의 일상 또한 되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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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Lust, Caution)의 탕웨이
2007년 | 이안
“영화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탕웨이의 노출이 부각되었던 것은 마음에 걸려요. 저도 를 찍었을 때 노출을 했다는 둥 안했다는 둥의 소란이 있었는데 영화와는 전혀 상관없잖아요? 탕웨이라는 신인의 여배우가 너무 대단했어요. 대배우인 양조위를 상대로 조금도 밀리지 않았으니까요. 우연히 제작과정을 담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감독의 천재성에 또 한 번 감탄했죠. 그 문제의 정사 신을 모든 촬영을 통틀어 제일 처음으로 찍었더라구요. 남녀배우가 전쟁하듯이 폭력에 가깝게 묘사하고 싶었던 거죠. 초반에 그 스트레스 때문에 힘들었을 텐데 이겨내고 연기한 배우들에게도 감탄했어요.”

그저 배우가 되고 싶었던 여대생 왕치아즈(탕웨이)는 시대가 낳은 비극에 휩쓸리면서 친일파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의 암살을 떠맡게 된다. 둘의 관계가 거듭될수록 임무가 아닌 진짜 사랑을 느끼게 되는 여자와 점점 더 그녀에게 빠져드는 남자. 이들은 정말로 사랑을 했을까? 몸을 섞던 여자를 제 손으로 사지로 내몬 뒤 남자가 보인 텅 빈 눈빛은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느냐며 반문한다.
김윤진│질투나도록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들의 영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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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여자 재소자들은 70-80% 정도가 가정폭력에 의한 우발적인 사고로 들어온대요. 에서 제가 맡은 정혜 역시 그렇구요. 처음에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어찌나 분통이 터지던지. 십년이 넘게 가정폭력에 시달린 피해자가 살기 위해 그랬다면 그건 자기방어 아닌가요? 배심원 제도에 익숙해서인지 정말 안타까웠어요. 로 인해 그런 부분까지도 한 번 더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김윤진의 말대로 의 정혜는 남편의 폭력에 못 견디다 저지른 선택으로 10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리고 교도소에서 아들을 낳았지만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18개월 뿐. 눈물이 마를 새 없는 모자의 이야기는 쉴 새 없이 마음을 허물지만 정작 김윤진은 “모성보다도 여배우들이 만든 여자영화도 흥행될 수 있단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힘주어 말한다. 여배우의 자신감과 단단한 실력으로 뭉쳐진 차돌 같은 그녀라면 뚜렷한 파문을 그려내지 않을까?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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