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정이 영화배우로서 그려온 함수는 꽤 복잡하다. 쉬이 엑스 값과 와이 값을 도출해낼 수 없는 예측 불가능한 곡선은 그녀의 시작점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다단했는지 보여준다. 강혜정이란 배우의 가능성을 보여준 문승욱 감독의 <나비>의 유키는 지금 보아도 그녀 이상의 대역을 찾을 수 없고, 그녀의 이름을 관객들의 뇌리에 단단하게 심어놓은 <올드보이> 또한 걸작의 범주에 해당된다. 특히 <올드보이>의 미도는 이전의 한국 여배우들이 만들어 놓은 어떤 틀에도 강혜정을 끼워 넣을 수 없음을 선언했고, 그녀는 자신만의 이름값을 얻었다. 그것은 착한 영화감독의 아름다운 아내(<쓰리 몬스터>)일 때도, 도대체 한 줄 요약이 되지 않는 <연애의 목적>의 홍일 때도 일관되게 이어졌다. 강혜정은 센 배우였고, 그녀의 영화들도 관객들의 가슴팍에 강펀치를 날렸다.

그러나 “모두가 내 말투를 따라 해서 너무 어색했다”는 <웰컴 투 동막골> 이후 강혜정은 조금씩 대중들이 예상하는 노선에서 벗어났다. <도마뱀>, <허브>, <킬미>에 이르기까지 사랑스럽고 귀여운 여자들은 그녀에게 기대한 적 없었던 모습이었다. 그리고 <걸프렌즈>에서도 강혜정은 스물아홉의 성장통을 겪는 ‘평범한’ 20대 여자다. “사실 남들이 경험 못한 혹은 안 해도 되는 것들을 일찍 겪은 편이에요. 그런 경험들을 토대로 20대 초반에 저돌적이고 독립적인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구요. <올드보이>나 <연애의 목적>처럼 아픔을 외면하거나 터트리고 사는 아이였죠. 그래도 살다 보니까 이 리듬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시끄럽던 게 잦아들기도 하더라구요.”

강혜정과 분리된 채 필모그래피로만 늘어놓으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영화들은 그렇게 강혜정의 삶의 궤적을 따라온 것이다. “불안하고 터뜨릴 게 많았던” 20대 초반의 폭풍의 언덕을 넘어 “잦아들기도 한” 중반을 지나 이제는 한 남자의 아내이자 곧 태어날 아이의 엄마로 전환기를 맞으며 그에 맞는 작품 안에서 움직였던 강혜정. 심신이 평안한 그녀의 요즘에 걸맞게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데워주거나 겨울을 닮은 아름다운 영화들이다.




1. <러브 액츄얼리> (Love Actually)
2003년 | 리차드 커티스

“지금은 없어진 종로의 한 영화관에서 혼자 본 영화예요. 맨 앞자리에 앉았는데 커플들 틈에 끼어서 진짜 불쌍했죠. (웃음) 그래도 요즘 같은 때,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 날 혼자 로맨틱 코미디 영화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걸프렌즈>도 저처럼 혼자 봐도 재밌을 거 같아요. (웃음) <러브 액츄얼리>에선 포르투갈 여자와 영국 작가의 에피소드가 가장 좋았어요. 처음에 그 여배우가 등장했을 때는 별 매력을 못 느꼈는데 점점 그 여자가 보이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러다가 남자에게 청혼 받고선 영어로 예스라고 대답 하는데, 와 그 순간 그 여자가 확 예뻐 보이는 거예요. 그런 게 영화가 여배우에게 주는 묘미란 걸 느꼈어요.”

겨울 그리고 크리스마스와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영화가 있을까?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곱 커플은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을 함께 하거나 오래된 관계에 금이 가는 아픔을 느낀다. 어떤 이들은 사랑의 결실을 맺고,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지만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캐롤처럼 복작복작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2. <노팅힐> (Notting Hill)
1999년 | 로저 미첼

“비슷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지만 <러브 액츄얼리>와는 좀 다르죠? <러브 액츄얼리>는 워낙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들을 모아서 한 편에 넣고 싶었단 의도에 맞게 각각 다른 감동을 담은 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지잖아요. 그에 반해 <노팅힐>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쭉 끌고 가는데, 그 역시도 감동이 있죠. 특히 음악이 인상 깊었어요. 영화와 음악의 상관관계가 중요하다는 걸 절실히 느꼈죠. ‘Ain`t no sunshine’이 흐르고 휴 그랜트가 거리를 걸으며 계절이 바뀌는 영상은 최근에 본 어떤 영화들보다 아름다웠어요.”

<노팅힐>은 <러브 액츄얼리> 이전, 워킹 타이틀 최고의 히트작이자 로맨틱 코미디의 수작이다. 한없이 빛나는 님과 평범한 나와의 사랑, 흔히 왕자와 신데렐라로 대표되던 사랑 이야기가 할리우드 여배우와 노총각 서점 주인의 로맨스로 재탄생했다. 피어나듯 아름다운 시절은 지났지만 원숙한 매력이 돋보이던 시절의 휴 그랜트와 줄리아 로버츠의 해피엔딩이 꽁꽁 언 마음을 노곤하게 녹인다.



3. <비카인드 리와인드> (Be Kind Rewind)
2007년 | 미셸 공드리

“남편은 뭐 하나에 꽂히면 여기저기서 정보들을 많이 알아 와서 제게 알려줘요. (웃음) 이 영화의 모스 데프가 원래는 특이한 랩퍼라는 것도 남편을 통해서 알았어요. 서글서글하고 반듯하게 생긴 것처럼 착하게 랩하기로 유명하다고요. 그런 모스 데프의 면모가 <비카인드 리와인드>에도 담긴 것 같아요. 모스 데프도, 잭 블랙도, 영화도 너무 사랑스럽잖아요.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그게 다 진짜였으면 하고 바라게 되고. 마지막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두 남자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웃고 즐기는 게 <시네마 천국> 같기도 하구요. (웃음) 보면서 저도 언젠가 남편이랑 함께 이렇게 사랑스러운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했어요.”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을 창조해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선보이는 미셸 공드리 감독. 그가 엉뚱해서 귀엽고, 어설퍼서 미워할 수 없는 콤비를 또 한 번 세상에 내놓았다. 실수로 지워버린 비디오 대여점의 영화들을 다시 되살리려는 마이크(모스 데프)와 제리(잭 블랙). 그렇게 시작된 이들의 영화 찍기는 어쩌다 마을의 가장 큰 프로젝트가 되어버리고 급기야 영화사에선 그들을 찾아온다.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백 투더 퓨쳐>, <로보캅> 등 추억의 명화를 감독 특유의 허술함으로 사랑스럽게 재탄생시켰다.



4. <디 아워스> (The Hours)
2002년 | 스티븐 달드리

“이 영화는 굳이 좋은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겠죠? 너무나 유명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에 기반하고 있기도 하고,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완벽했어요. 영화의 정서 자체는 굉장히 우울한데 그게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랑 잘 맞는 것 같구요. 사실 뭐가 좋은지 딱 꼽아서 설명할 수는 없어요. 그냥 이 영화의 모호함 그 자체가 좋아요. 보고나면 쓸쓸해지는 모호함이랄까요? 볼 때마다 우울하긴 한데 그게 또 좋아요. 볼 때마다 니콜 키드먼 코도 신기하구요. (웃음)”

메릴 스트립, 줄리언 무어, 니콜 키드먼. 이름만으로 묵직한 신뢰감을 만들어내는 세 배우들이 함께한 것만으로도 영화에선 기분 좋은 포만감이 느껴진다. 그러나 의식의 흐름을 따르듯이 두서없이 이어지는 세 여자의 삶이, 끝까지 보고 나면 한 줄기로 꿰어지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연출력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5. <더 리더> (The Reader)
2008년 | 스티븐 달드리

“사실 케이트 윈슬렛에 대한 이미지가 별로 없었어요. 아 <타이타닉>의 그 언니? 정도였죠.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쭉 보게 됐는데 장난이 아닌 거예요! 이런 신뢰도를 가진 여배우였나 하고 깜짝 놀랄 정도로요, 게다가 오랫동안 쉬다가 <더 리더>에 나왔는데 와 정말 대단했죠. 영화에선 무식한데다 강박증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투도 이상한데 너무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연기 잘 하는 사람들은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는데, 케이트 윈슬렛은 이 영화에서 그런 걸 다 깨버렸죠.”

마이클(데이빗 크로스)에게는 첫사랑이었을 한나(케이트 윈슬렛)와 이제는 소년에서 남자가 된 마이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마주친다. 충격적인 재회 이후 한나와의 기억을 거부하던 마이클(랄프 파인즈)은 자신과 처음 만났을 때의 한나와 비슷한 나이가 되어서야 다시 그녀에게 손을 내민다. 책을 읽어주는 남자의 음성은 수 십 년의 세월 동안 사랑의 밀어에서 시작해 화해와 생의 긍정으로까지 울려 퍼진다.




“한때는 답답했어요. 나를 받아줄 만한, 나를 해소시켜줄 만한 작품이 이제는 더 이상 없는 건가 하구요. 풀지 못한 응어리가 있는데 미쳐서 날뛸 수가 없으니까. 그래도 조급해하지 않으려구요. 제가 할 수 있는 걸 다 하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으니까요. 지금 당장 해답을 얻으려고 안달하지 말고 그냥 주어진 문제를 살다 보다보면 답이 나오지 않을까요?” 스물아홉이 되어 모든 것이 변한 <걸프렌즈>의 송이처럼 강혜정 또한 그 어느 때보다 큰 변화의 가운데에 있다. 가정을 꾸린데다 성격 또한 본인의 표현대로 “남편을 만나고 임신을 한 후 많이 유해졌”다. 그러나 부드러워진 인상과 별개로 배우가 가져야 할 고민의 끝은 결코 뭉툭하지 않다. 대중의 기대와 자신의 성장 사이의 괴리에서 예전의 강혜정이라면 “미쳐 날뛰는” 연기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스레 나이를 먹고 있는 강혜정은 파도로 출렁이는 대신 잔잔한 물결 아래서 호흡을 가다듬고 있다. 변태기를 거칠수록 더 본연의 형태에 가까워지는 나비처럼 강혜정은 지금 자신의 원형을 만들어가는 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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