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언제 이렇게 컸을까. 방학 한 번만 지나면 한 뼘씩 키가 자라서 학교에 오던 몇몇 친구들처럼, 김범은 돌아볼 때마다 자라 있는 배우다. 2006년 MBC <발칙한 여자들>에서 앳된 얼굴로 싱글맘 엄마를 살갑게 챙기며 등장했던 이 소년은 <거침없이 하이킥>의 ‘하숙범’으로 대중에게 자신을 알렸고, <에덴의 동쪽>에서는 송승헌의 아역으로 출연한 초반 몇 회만으로 드라마에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으며 KBS <꽃보다 남자>에서는 ‘가을 양’ 뿐 아니라 전국 수많은 여성 팬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젊은 배우들이 새 작품을 만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시장 안에서 아역이라는 굴레에 갇히지도 않고 지나친 장고로 청춘의 시간을 흘려보내지도 않으며 활발한 활동을 펼쳐 온 김범은 SBS <드림>을 통해 ‘남자’로, 그리고 주인공으로 자란 자신의 존재를 보여주었다. “캐릭터를 표현하는 건 옷을 입는 것과 비슷해요. <꽃보다 남자>의 소이정이나 <드림>의 이장석은 하나의 옷인 거고, 저는 그들을 표현하는 옷걸이나 마네킹 혹은 그 옷을 입어보는 사람인 거죠. 처음에는 길거나 짧아서 잘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걸 맞춰가다 보면 딱 맞게 되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 때 거울 앞에서 제 자신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고 다니며 평가를 받는 기분인 거죠. 작품 하나를 더 한다는 건 옷장에 옷이 하나 더 쌓이는 기분이라 제가 일 욕심이 많아요.”

그래서 드라마 종영 다음 날 바로 출국해서 일본에서의 싱글 앨범 발매 행사, 영국에서의 화보집 작업, 필리핀에서의 스케줄, 영화 홍보 프로모션 등으로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에 지칠 법도 하지만 최근 연예계를 휩쓴 신종 플루에 대해서조차 “걸릴 시간이 없다”며 웃어넘길 만큼 일의 재미에 빠져 있는 김범이 지금 자신에게 사랑이란 “유일하게 일과 바꿀 수 있는 것”이라는 대답과 함께 ‘나를 울린 사랑 영화들’을 추천했다.




1. <이프 온리> (If Only)
2004년 | 길 정거

“처음에 보면 그냥 평범하게 남녀 간의 사랑을 그린 로맨스 영화 같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발상이 독특해서 좋았어요. 우리는 다들 지나간 시간에 대해서 후회하지만 그걸 돌려놓을 수 있는 길이 현실에서는 없잖아요. 그런데 <이프 온리>에서는 남자 주인공이 자기 인생의 결정적 하루가 지나간 뒤에 다시 과거로 돌아가서 그 하루를 보내고, 그 여자를 지켜주기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거든요. 그런 모습이 <비상>에서 제가 연기한 시범이와도 비슷했던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저도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여자와 남자, 로맨티스트와 워커홀릭의 간극은 사랑으로도 좁히기 힘든 그 무엇이다. 사만다(제니퍼 러브 휴잇)과 이안(폴 니콜스)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자신과 너무나 다른 상대 때문에 상처받거나 답답해한다. 이안은 우연히 만난 택시기사로부터 “그녀가 있음을 감사하고 계산 없이 사랑하라”는 충고를 듣고 사만다의 소중함을 깨닫지만 그들에게는 곧 엄청난 사건이 벌어진다. ‘우리에게 그 하루가 다시 주어진다면’이라는 명제에서 출발해 깊은 울림을 남기는 러브 스토리.



2. <아이 엠 샘> (I am Sam)
2002년 | 제시 넬슨

“사랑에 꼭 남녀 간의 로맨스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아이 엠 샘>은 그보다 더 우선일 수 있는 부모자식간의 사랑이 굉장히 예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려진 영화에요. 저도 또래의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해서 부모님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하다 보니 이런 작품에서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더라구요. 장애가 있는 아버지를 연기한 숀 펜의 연기가 정말 충격적일 만큼 훌륭했고, 지금은 많이 커 버린 다코타 패닝의 귀여운 모습도 볼 수 있어요.”

지적 장애로 일곱 살 아이의 지능 밖에 갖지 못한 채 살아가던 샘(숀 펜)은 어느 날 갑자기 옛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 루시를 맡아 기르게 된다. 하지만 샘이 양육 능력이 없다는 선고를 받으며 루시는 시설로 옮겨지고, 샘은 딸을 되찾기 위해 법정에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숀 펜과 다코타 패닝의 탁월한 연기로 사랑스러우면서도 눈물겨운 부녀의 이야기가 생생하게 그려진다.



3. <블랙> (Black)
2005년 | 산제이 릴라 반살리

“이번엔 사제 간의 사랑에 대한 영화에요. 헬렌 켈러와 설리반 선생님 이야기를 바탕으로 했다고 들었는데, 영화에서의 선생님은 때로는 아버지 같고 때로는 친구 같고 때로는 연인 같은 역할을 하거든요. 인도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도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도 정말 좋았어요. 주인공이 선생님에게 처음 배우는 단어가 ‘water’인데 나중에 알츠하이머에 걸린 선생님의 손을 잡고 ”선생님이 제게 가르쳐 주셨던 것들을 제가 다시 가르쳐 드릴께요“ 라고 말하면서 내리는 비를 만지게 해 주는 장면이 특히 감동적이었어요.”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소녀 미셀(아예사 카푸르)에게 ‘마법사’를 자처하는 사하이(아미티브 밧찬)가 찾아온다. 미셀은 사하이의 노력과 사랑 덕분에 훌륭하게 성장하지만 사하이가 알츠하이머에 걸리며 두 사람은 새로운 벽에 부딪힌다. 삼중고의 소녀 헬렌 켈러를 세상으로 이끌어낸 헌신적인 교사 설리반의 실화를 영화로 각색한 작품.



4. <너는 내 운명> (You`re My Sunshine!)
2005년 | 박진표

“제가 연기를 하게 된 이후로는 우리나라 영화를 보면 배우의 입장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돼요. 이 작품은 어떻게 제작됐을까, 감독의 성향은 어떨까, 저 배우의 연기 스타일은 어떤가를 하나하나 분석해 보는 습관 때문에 영화 자체를 즐기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너는 내 운명>은 <블랙>이나 <아이 엠 샘>처럼 장애를 소재로 하는 대신 전염이 될 수도 있는 병을 소재로, 장애요소를 ‘뛰어넘는’ 게 아니라 아예 거기에 함께 빠져버릴 수 있을 정도의 사랑을 보여줬기 때문에 관객으로서도 정말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에요.”

목장 경영이 꿈인 순진한 시골 총각 석중(황정민) 앞에 어느 날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은 여인이 나타난다. 동네 순정다방 레지 은하(전도연)가 바로 석중의 그녀, 두 사람은 우여곡절 끝에 결혼에 골인하지만 은하의 과거와 에이즈 감염 사실이 알려지며 그들의 사랑은 위기에 처한다. 통속성이 보편성으로, 그리고 불가항력으로 이어지며 보는 이에게 기어코 눈물을 쏟아내게 만드는 영화.



5. <편지> (The Letter)
1997년 | 이정국

“사실 사랑이라는 건 사람이 한 평생 살면서도 끊임없이 의문을 갖게 되는 감정이잖아요. 그래서 영화는 두 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 동안 사랑이라는 주제의 다양한 면을 표현하기 위해 이야기 안에 여러 가지 장애물을 만들어 놓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앞에 말한 다른 영화들은 주인공들이 난관을 헤쳐나가는 과정 속에 재미와 감동을 극대화시키는데 <편지>는 아예 두 주인공 중에 한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도 남겨진 사람이 그걸 극복할 수 있게 배려하고 도와준다는 점에서 참 인상적이었고, 사랑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던 작품이에요.”

국문과 대학원생 정인(최진실)은 자신이 떨어뜨린 지갑을 찾아 준 환유(박신양)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두 사람은 결혼에 이르지만 가장 완벽한 순간 찾아온 불행으로 환유는 세상을 떠나고, 역시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던 정인 앞에 어느 날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아침고요 수목원의 아름다운 풍광과 故 최진실의 청순한 아름다움, 박신양의 섬세하고 차분한 연기가 조화를 이루는 작품.




“처음 막연하게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땐 어쩔 수 없이 이 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막상 그 환상을 현실로 만나고 나서는 제가 상상했던 모습이 아니거나 실망한 부분도 있었지만 요즘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 누군가가 환상으로 생각하는 세계에서 제가 현실을 살고 있는 거니까 그냥 모든 것에 감사해요.” <꽃보다 남자>의 촬영 도중 출연을 결정했고 <꽃보다 남자> 열흘 만에 촬영에 들어간 영화 <비상>은 그렇게 환상 같은 세계를 살고 있는 김범이 보다 빠르게 환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가까워지기 위해 선택한 작품이다.

<비상>에서 ‘호스트’라는 직업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하며 화제가 되긴 했지만 “사실 호스트는 제가 연기하는 시범이가 수경(김별)이를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수단일 뿐”이라고 설명하는 김범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다. 사랑과 성장과 액션을 모두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하나의 작품 안에서 엄청나게 다양한 감정을 연기할 수 있었던 기회라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며 여유롭게 회상하는 김범, 1월 20일 첫방송되는 MBC <아직도 결혼하고 싶은 여자>에서 이 무서운 스물 두 살은 또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