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태웅│시간의 흐름을 들려주는 노래들
엄태웅│시간의 흐름을 들려주는 노래들
엄태웅은 어느 순간 범접할 수 없는 스타의 길로 들어서거나 자신이 만들어 낸 캐릭터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하는 많은 연기자들 사이에서 늘 요란하지 않게 묵묵히 걷고 있는 배우다. 그래서 오랜 무명 생활 끝에 출연한 KBS ‘제주도 푸른 밤’에서 시한부 인생이라는 운명과 마주하게 된 남자의 모습은 의 미워할 수 없게 멋진 악역으로 이어졌고 과 에서 그는 선과 악, 죄와 벌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영혼을 표현하며 ‘엄포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스무 살 연상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자유로운 영혼의 청년을 연기한 영화 과 냉정한 엘리트 코치로 국가대표 여자 핸드볼 팀 가운데 청일점이 되었던 , 극한 상황에 빠진 연예인 매니저의 사투를 그린 까지 그의 행보는 쉽게 단정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성실하다.

올 한 해 엄태웅을 ‘김유신’으로 살게 한 MBC 은 그런 엄태웅에게 가장 어울리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선덕여왕을 도와 삼국통일에 크게 이바지한 이 용장에 대해 엄태웅은 말한다. “제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진짜 김유신 장군을 그려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인물은 정말 ‘큰 사람’인 것 같아요. 여자들이 보기엔 무뚝뚝하고, 일반 사람들에겐 인정 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작은 것보다 큰일을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아파했던 사람이거든요.” 극 중에서는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는 대신 그는 최근 스페셜 OST에서 ‘오직 한 사람’이라는 곡으로 덕만에 대한 유신의 연모의 감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 OST도 그랬지만 촬영 중에 녹음을 하는 게 바쁘긴 해도 추억이 하나 늘어나는 것 같아서 저에겐 참 좋은 일인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던 그에게 “보컬이 나아진 것 같냐”는 질문을 던지자 “그보단 몇 번 하다 보니 감정 같은 게 전보다 조금 좋아진 것 같다”고 겸손해한다. 그리고 “잡식성이에요. 장르에 심취하기보다는 팝도 듣고 기타나 가야금 연주곡도 들어요. 가사도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영화 보듯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느낌이 좋아요”라고 말하는 엄태웅이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가는 요즘, 시간의 흐름을 들려주는 노래들을 추천했다.
엄태웅│시간의 흐름을 들려주는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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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울림의
김창완, 김창훈, 故 김창익 삼형제로 구성된 밴드 산울림은 1977년 1집 로 데뷔한 이래 ‘한국의 비틀즈’라는 별명을 얻으며 대중과 평단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 KBS 에서 종종 산울림의 ‘내 마음은 황무지’를 흥얼거리곤 했던 엄태웅 역시 산울림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산울림의 ‘회상’은 아주 어릴 때 처음 들었는데 인생을 잘 몰랐을 나이임에도 마음이 굉장히 슬퍼졌던 것 같아요. ‘길을 걸었지 누군가 옆에 있다고 느꼈을 때 나는 알아버렸네 이미 그대 떠난 후라는 걸 나는 혼자 걷고 있던 거지’ 같은 가사가 참 쓸쓸하다고 느꼈거든요. 이제 저도 나이가 들고 인생의 반이라면 반을 산 나이가 되어서 들어도 그래요. 어떤 노래가 어릴 때 들었던 것과 똑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엄태웅│시간의 흐름을 들려주는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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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뜨거운 감자의
“원래 ‘봄바람 따라 간 여인’이라는 노래를 듣고 싶어서 샀던 앨범이라 그 한 곡만 계속 듣고 묻어뒀어요. 그런데 얼마 전 혼자 강원도 쪽으로 여행을 가는 길에 앨범을 쭉 들어보니 ‘청춘’이란 노래가 참 좋더라구요. ‘현실은 몰라주고 가진 건 꿈이 전분데 돌아오지 못할 강물처럼 흘러간다. 다시 오지 않는 아름다운 나의 청춘’이란 가사가 제 나이의 사람들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많은 사람들이 김C를 KBS ‘1박 2일’과 에 출연하는 예능인으로 떠올릴지 모르지만 그는 원래 록밴드 ‘뜨거운 감자’의 보컬로 활동해온 뮤지션이다. 3집 에 수록된 ‘청춘’은 故 최진실 사망 후 tvN 에 출연한 김C가 최진실의 친구였던 MC 이영자를 위로하기 위해 불러준 노래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엄태웅│시간의 흐름을 들려주는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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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루시드 폴의 < The Light Of Songs >
“루시드 폴의 음악은 새로운 느낌이라서 좋아해요. 제가 그 전까지 알고 있던 한국 가요와는 좀 다른 느낌, 가사도 시적이고 사운드도 새로워요. 예를 들어 2집 에 실린 ‘할머니의 마음은 바다처럼 넓어라’ 같은 노래는 ‘이런 소재로 노래를 만들었네?’ 싶게 신선하기도 하고, 언젠가 지나간 내 일상 같은 느낌도 들거든요. 그런 면에서 < The Light Of Songs >에 실린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의 가사와 멜로디 역시 좋아해요. 감정이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질리지도 않고, 계속 듣다 보면 하나의 영상이 떠오르는 기분이 들거든요.”
엄태웅│시간의 흐름을 들려주는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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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넬의 < Separation Anxiety >
엄태웅이 선택한 네 번째 앨범은 섬세한 감정들을 선명한 사운드로 전달하며 많은 사랑을 받아 온 모던 록 밴드 넬이 2008년 발표한 4집 < Separation Anxiety >다. “이 앨범에 실린 ‘멀어지다’라는 노래를 특히 좋아해요. 누구에게나 한번쯤 사랑에 대한 아픈 기억들이 있을 텐데, 요즘 저는 ‘사랑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보다 감정이 흘러가는 걸 보여주는 노래들이 좋더라구요. ‘어떻게 하죠. 우리는 점점 더 슬퍼하네요. 멀어지네요. 어쩌면 우린 사랑이 아닌 집착이었을까요’ 라는 가사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성찰을 하게 만들거든요. 그러면서 자신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노래인 것 같아요.”
엄태웅│시간의 흐름을 들려주는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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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황보령의 < Shines In The Dark >
“이 앨범의 ‘돌고래 노래’를 제일 먼저 듣게 됐는데 처음에는 이상은 씨 노래인 줄 알았어요. 도입부의 보컬이나 분위기가 비슷해서 이상은 씨의 신곡이 나온 줄 알았는데 황보령이라는 뮤지션이더라구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더 찾아 들었더니 제가 좋아하는 코드의 음악이었어요. 그게 뭔지 말로 설명하긴 어려우니까 들어보시면 좋겠어요. 하하.” 엄태웅이 착각했던 것처럼 사실 황보령과 이상은의 인연은 적지 않다.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미술을 전공하던 황보령은 우연히 이상은과 만나 93년 이상은 5집에 수록된 ‘언젠가는’에 코러스로 참여하며 한국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황보령이 올해 내놓은 3집 앨범 < Shines In The Dark >는 다양하게 충돌하는 이미지들을 독특한 사운드로 그려낸 명반으로 평가받는다.
엄태웅│시간의 흐름을 들려주는 노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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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마지막, 태안, 안면도, 용인 등 전국을 오가며 백제군과의 전투 신을 촬영하며 실로 전쟁 같은 촬영 스케줄을 견뎌냈던 만큼 이 끝나면 ‘쉬고 싶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엄태웅은 늘 그렇듯 묵묵하고 느긋하다. “글쎄요. 잠은 좀 못 자도 괜찮은데, 그래서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있는 건 아니고 여행을 좀 가고 싶네요. 내년 2월에는 일과 휴식 겸 한 달 정도 일본에서 보낼 것 같구요.” 김유신의 마지막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 같느냐는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지금까지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저도 그걸 바라지 않고, 그냥 지금까지 온 것처럼 우직한 모습으로 끝까지 가고 싶어요.” 여전히 그는 우직한 배우다.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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