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전근대적 속성으로 학연, 지연, 혈연을 꼽지만 사실 그것이 다른 집단에 대한 배타적 태도만 되지 않는다면 그런 유대감은 얼마든지 긍정적 에너지가 될 수 있다.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PIFF) 아주담담에서 ‘최선의 동료들’이라는 주제로 모인 한국영화아카데미 동문인 황규덕(1기), 허진호(9기), 류장하(12기), 최동훈(15기) 감독들의 유대감이 아마도 그런 류의 긍정적 힘일 것이다. 선진적 커리큘럼과 장비 지원을 통해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끈 영화인이 될 수 있었던, 이들의 결코 ‘아주 담담’하지만은 않은 성장기는 10월 12일 QOOK TV PIFF 라운지에서 들을 수 있었다.서로 다른 시기에 아카데미를 다녔다. 그 때마다 아카데미의 위상이 달랐을 것 같은데.
황규덕 : 1984년 개원해서 내가 1기로 들어갔는데 충무로의 기성 영화인들은 아카데미 만드는 걸 반대했다. 영화 아카데미가 생기면서 감독 위원회나 이런 곳의 공간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쟤네가 뭔데 어린애들에게 공간을 주냐, 국가에서 장비를 챙겨주는데 우리가 쓰는 것보다도 좋다’며 반발이 심했다. 온실 속에서 자란 녀석들은 치열한 현장에서 쓸모없을 거라는 얘기도 들었다. 현장 학습을 나가도 “너희 왔구나, 잘해야 한다”가 아니라 “공사(公舍)에서 하는 일은 불쾌하다. 얘네는 영화인이 될 수 없다”는 얘길 들었다. 그러니 까마득했다. 충무로 연출부가 되고 싶어 아카데미에 들어왔는데 영화인들이 싫어하니. 대신 그러면서 우리 학생들끼린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되긴 했다.
허진호 : 92년도에 입학했는데 1기와 다르게 아카데미 출신들이 조감독을 비롯해 여기저기 자리를 잡은 상태라 우리를 보는 시각이 긍정적이었다. 국가의 장학금을 받고 다니는 사관학교 생도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혜택도 많았고 영화 제작사 대표님들이 아카데미 다니는 학생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다. 실제로 졸업 작품 발표회를 할 때는 제작사 사람들이나 프로듀서들이 와서 작품을 눈여겨봤다. 우리는 행복하게 다녔던 시기였던 거 같다.
최동훈 : 대학교 4학년 때 <비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영화가 나왔다. 소위 방화라고 하는 과거 한국영화와는 다른, 너무 재밌는 작품들인 거다. 그래서 영화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고 아카데미에 들어가면 만들 수 있다고 해서 3개월 정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입학했다. 가장 먼저 카메라 조작법을 배우고 그러면서 막연했던 꿈이 조금씩 현실로 다가왔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의 생존율이 높은 건 치열했던 분위기 때문”
어렵게 들어갔던 아카데미의 분위기는 어땠나.
류장하 : 지금은 그렇지 않은데 당시엔 서른 살 나이제한이 있었고 내가 딱 서른이었다. 늦게 결정한 만큼 굉장히 열심히 했는데, 그런 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동기들이 다들 정말 열심히 했다. 고집들도 세고. 가령 15분짜리 찍으라고 하면 1시간짜리 찍고, 5회 촬영하라고 하면 20회 촬영하는 거다. 그러니까 내가 장비 쓸 타임에 몰래 자기 거 찍으러 가져가는 일이 벌어지고 충돌이 생겼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1년인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여력을 뺏긴다고 생각하니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했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들의 생존율이 높은 건 아마 그런 치열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더라도 보여주는 순간부터 깨지니까. “이걸 시나리오라고 쓰느냐, 문장이 이상하다”며.
같이 아카데미를 다닌 사람들 중 괴짜들도 있었을 것 같다.
류장하 : 누가 재밌어서 기억난다기보다 정말 거긴 다 특별한 사람들이 온다.
황규덕 : 졸업하고서 1기가 모였는데 3기 중 말 안 듣는 애가 있다는 얘길 듣고선 졸업생 6명이서 버릇을 고치러 갔다. 그런데 ‘떡대’가 엄청 큰 사람이 나오는 거다. 다들 쫄아서 뒤로 빠지기에 내가 “너 몇 년생이냐”고 했더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 거다. (웃음) 그러면서 자기는 충무로에서 조감독까지 했던 사람이니 까불지 말라고 했다. 그게 <개 같은 날의 오후>를 찍은 이민용 감독이다. 3기지만 지금도 동문 중에서 대장이다.
허진호 : 나이 얘기를 하면 나도 아카데미를 늦게 들어간 편이라 8기 선배들이 나보다 어렸다. 그런데 언젠가 8기 한 명이 날 보고 귀엽게 생겼다고 머리를 쓰다듬었는데 나중에 확인하니 나보다 3살 어렸다. (웃음)
다들 아카데미 선후배지만 그 중에서도 허진호와 류장하는 각별한 사이인 걸로 안다.
류장하 : 내가 중대에 신병으로 들어갔을 때 허진호 감독은 제대를 얼마 안 남긴 병장이었다. 내가 스물 둘이었고, 허진호 감독이 스물다섯이었다. 내게 뭐할 거냐고 물어보기에 영화를 하겠다고 했더니 나중에 내가 전역하고 졸업도 하고 취직해서 지낼 때 “너 영화한다고 했으니까 내가 영화 찍는 것 좀 도와 달라”고 해서 영화를 다시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허진호 : 군대에서 만났을 때 나는 누워있고 류장하 감독은 차렷 자세로 있었다. (웃음) 나는 영화를 하겠단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신병이 영화감독을 하겠다고 하니 신기해서 “여배우 많이 보겠다”고 농담을 하는데 그쳤다. 그러다 내가 영화를 하게 되자 그걸 보고 자극을 받아서 아카데미에 들어왔다고 하더라.
그럼 그 이후 둘의 관계는 어떻게 진행된 건가.
허진호 :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같이 연출부를 했는데 류장하 감독의 감성이 참 좋다. 사물을 바라보는 따뜻함이나 사람의 어떤 마음들에 대해 굉장히 좋은 감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봄날은 간다> 할 때 조감독을 하면서 시나리오도 썼고.
류장하 : 내가 <꽃피는 봄이 오면>으로 데뷔할 때 알게 모르게 많이 도와줬다. 그리고 내가 장가를 보내줬다. (웃음) 내가 허진호 감독을, 내 여자 친구가 같이 일하는 후배를 소개시켜줬고, 연애하다 한 번 헤어지더니 결국 결혼까지 갔다. 허진호 감독은 집도 근처라 자주 만난다. 그냥 형 같은 존재다.
“영화감독은 그 시절 자신이 가진 전부를 걸어야 한다”
그와 달리 아카데미 주임교수였던 황규덕 감독과 최동훈 감독은 사제지간이다. 어떤 제자였나.
황규덕 : 다른 기수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할지 모르겠지만 15기엔 유독 재치 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최동훈 감독은 익살맞은 반장이었다. 약간 불량식품 냄새가 나는. (웃음)
그럼 이렇게 대성할 거라 예상했나.
황규덕 : 최동훈 감독에게 이런 얘길 했다. 사람은 대기만성형과 조기발화형, 두 종류가 있는데 동훈이 너는 짓누르면 오히려 경색되니까 조기발화를 하라고. 내가 관찰한 바의 최동훈 감독은 굉장히 박학다식하고 순발력도 뛰어나고 텍스트들을 엄청나게 많이 끌어당기는 힘이 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굉장히 뛰어난 감독으로 쉽게 궤도에 안착할 것이라고 예상을 했다. 그래서 나도 좀 써먹을까 했는데 그럴 새도 없이 바로 그냥 (웃음) 조기발화 해버렸다.
빨리 대성하긴 했지만 스태프로 지내며 연봉 110만원으로 지낸 시기도 있는 걸로 안다. 그래서 언젠가 수상소감으로 부모님이 감독을 직업으로 인정할 때까지 열심히 하겠다고 했는데 그걸 어떻게 극복했나.
최동훈 : 내 인생은 부모님에 대한 사기의 연속이다. (웃음) 한국영화아카데미에 가면 방송국 PD가 되는 거라고 거짓말을 했고, 내가 스태프로 일할 때도 우리 아버지는 연봉 110만원이 아니라 월급 110만원인 줄 알았다. 그래서 정말 감독을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으셨고. 하지만 상 탄 걸 집에 보내면서 그런 것들이 누그러졌다. 사실 가장 ‘직빵’은 아들 얼굴이 TV에 나오는 거다. 그 이후 아들을 믿어주셔서 무난히 지낸다.
지금은 다들 자기 세계가 있는 감독들이지만 아카데미 졸업 작품을 찍을 땐 어땠는지 궁금하다.
류장하 : 일종의 자기 기록을 했다. 내가 지나왔던 이야기를 소재로 찍었는데 잘 못 찍었다. 좋고 나쁨을 떠나 만듦새가 엉망이다. 내가 이번 PIFF에 항의했는데 내 허락도 없이 그 작품을 여기서 트는 거다. 솔직히 많이 언짢았다. 물론 되게 못 찍었다는 걸 보며 재밌을 수도 있겠지만.
허진호 :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보다는 흥행이 얼마나 될지 상업적 고려를 하고 찍었다. 극장에 걸리는 작품도 아닌데. (웃음) 재밌는 영화를 찍어보고 싶어서 <고철을 위하여>라는 코미디를 찍었고, 반응이 괜찮았던 거 같다.
최동훈 : 나는 아카데미를 거의 꼴등으로 졸업했다. 원래 굉장히 환상적인 이야기가 담긴 시나리오를 썼는데 당시 지원금으로 받은 170만원과 장비로는 찍을 수 없어서 다른 걸로 찍었고 꼴등을 했다. 내 머릿속에선 걸작이지만 실제로 만들면 후지다는 걸 상영 1분 안에 알게 되는 경험이어서 DVD로 내자는 걸 극구 반대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여전히 만듦새는 어설프지만 내가 <범죄의 재구성>과 <타짜>에서 시도하려던 많은 것들이 그 안에 있어서 놀랐다.
마지막으로 영화감독을 꿈꾸는 젊은 영화학도들에게 조언을 부탁한다.
최동훈 : 많은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보는 태도나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영화를 찍으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다 나온다. 노력도 있지만 기질의 문제이고 한 거지. 그리고 운이 좋아야 한다. 운이 찾아왔을 때 덥석 무는 게 필요하다. 진짜다.
허진호 : 아카데미를 다니며 데뷔 전까지 항상 고민했던 건 내가 어떤 영화를 잘 할 수 있을지, 어떤 영화를 하고 싶은지,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남들이 좋아할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질문을 지금도 가지고 있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아가면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류장하 : 솔직히 나는 내 주변에서 영화를 찍고 싶다거나 시나리오를 쓰는 친구들을 보면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도 하겠다고 한다면 생각이 많으면 안 된다. 생활 걱정도 하고 사랑도 하고 싶고, 영화도 찍고 싶겠지만 이런 걸 다하면서 영화를 할 수는 없다. 감독이 된다는 게 대단한 것도 아니지만 이상하게 힘든 게 있어서 그 시절에 자신이 갖고 있는 전부를 걸어야 한다. 그래도 안 될 수도 있는 거고, 그 때 최동훈 감독이 말한 운이 필요하다. 가령 나는 <꽃피는 봄이 오면>을 찍을 때 투자가 한 번 끊겨서 무산될 뻔 했는데 최민식 씨가 캐스팅되면서 다시 살아난 경험이 있다.
황규덕 : 1990년에 처음 일본에 갔는데 그곳에서는 인디 영화를 찍는 젊은 영화인들이 정말 엄청난 세력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은 영화는 충무로에만 있고, 인디 영화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였다. 우리나라에 인디 영화가 나온 게 10년 정도 되는 걸로 아는데 이들이 살아나야 한다. 젊은 친구들은 한국 인디 영화를 만들어 내고, PIFF가 진행될 때 광안리에서는 인디영화제를 하는 그런 풍토가 만들어져야 상업영화와 공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글. 부산=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부산=이진혁 (eleven@10asia.co.kr)
편집. 장경진 (thre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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