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두기봉’이란 이름으로 더욱 익숙한 홍콩감독 조니 토. 제 14회 부산국제영화제(이하 PIFF) 마스터클래스 첫 번째 주인공으로 초대된 조니 토 감독의 2시간에 걸친 ‘거장 수업’이 10월 9일 부산 그랜드 호텔에서 열렸다. 홍콩액션영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으로 유명한 오승욱 감독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의 마스터클래스는 ‘마이 라이프, 마이 시네마, 조니 토’라는 부제에 걸맞게 2시간 동안 두기봉의 인생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는 ‘부산 속성반’이었다. 특히 “직접 준비한 9개의 챕터”로 꼼꼼하게 정리한 그의 영화인생은 그야말로 드라마틱하다.
서부극을 좋아하던 소년이 감독이 되기까지
몽콕에서 보낸 유년시절, 영화관 필름창고에서 일하던 아버지 때문에 표를 사지 않고도 영화에 빠져 살았던 그 때를 “오로지 영화 안에서 살아간 가장 행복했던 기억” 이라 추억하는 조니 토는 특히 “서부극, 전쟁영화,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좋아했다”고 회상한다. 이후 “금요일에 TV드라마 보는 걸 즐겼던” 이 영상시대의 수혜자는 공부에 뜻이 없어 중학교 이후 학업을 그만두었고 결국 어린 나이에 홍콩 방송사 TVB에 잡역부로 일하면서 TV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심부름하고 욕을 먹는 게 다였지만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 너무나 좋았던” 방송사 잡역부에서 “의외로 좋은 성적을 낸” 연기자 훈련반을 잠시 거쳐 “역시 내가 원하는 건 연출”이라는 생각에 감독의 꿈을 키웠다.
물론 “너무 높은 꿈이라 과연 될까” 의심 했던 소망은 77년 TVB 드라마 감독으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현실화 되었다. “남들보다 모자란 학력을 커버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일주일에 7일간 쉬지 않고 일할 때도 있었고, 한 달에 총 40시간도 못 자는 인생을 살았다. 비록 힘들었지만 연출을 하고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고통스럽지 않았다.”던 조니 토는 드라마 연출 데뷔 4년 만에 드디어 첫 번째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영화는 <벽수한산탈명금>이란 작품이었는데 그 작품을 찍을 때가 23살 정도 되었다. 이 영화를 찍고 너무 고생을 해서 그 이후 7년간 영화를 못 찍을 정도였다. (웃음) 결국 다시 방송국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하면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는 조니 토는 “두 번째 영화를 찍을 때쯤 비로소 영화 전체를 내가 스스로 컨트롤 하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겸손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도용호방>과 <참새>는 홍콩에 대한 내 존중”
3번째 영화의 흥행 성적이 좋았던 까닭에 “이후 내가 진짜 찍고 싶은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는 작품이 바로 주윤발을 스타로 등극시켰던 눈물의 <우견아랑>이었다. 홍콩 액션영화의 붐으로 남자배우의 개런티가 엄청났던 시절, “남자스타 한 명 캐스팅 할 비용으로 양자경 매염방, 장만옥를 캐스팅해서 <동방삼협>을 만들었다. 남자든 여자든 나에겐 상관없었다. 여성영웅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훌륭한 영웅영화를 만들 자신이 있었으니까” 라는 말은 자신의 영화세계에 대한 자신감과 동시에 방송사 프로듀서를 거쳐 온 유연함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이후 ‘밀키웨이’라는 이름의 제작사를 차리고 ‘밀키웨이 스타일’이 만들어지기를 이야기 하며 “두기봉 표 영화가 나가야 할 방향은 오로지 창작성임을 잊지 않았다”는 조니 토 감독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영화로 비교적 최근작인 <유도용호방>과 <참새>를 꼽았다. “경제위기나 사스 같은 어두운 기운이 암울하게 시대를 누르고 있을 때 70년대 홍콩의 활기찬 에너지를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는 그는 “홍콩정부가 오래된 건물들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로 짓는 것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 오래된 거리나 몇 십 년 된 건물은 단순히 그냥 거리나 건물이 아니다. 문화를 잃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시대를 기록하는 하나의 기록매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후대를 위해 시대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결국 그 안에 없어진 없어질 홍콩의 옛 면모를 담고 싶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오랜 도시 홍콩에 대한 내 존중”이라는 말로 클래스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다소 미숙한 중국어 통역으로 인해 2시간의 수업이 조금 느슨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이날의 마스터클래스는 조니 토 혹은 두기봉이라는 거장의 작품세계를 공부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교실이었음이 분명했다.
글ㆍ사진. 부산=백은하 (one@10asia.co.kr)
편집. 부산=이지혜 (seven@10asia.co.kr)
서부극을 좋아하던 소년이 감독이 되기까지
몽콕에서 보낸 유년시절, 영화관 필름창고에서 일하던 아버지 때문에 표를 사지 않고도 영화에 빠져 살았던 그 때를 “오로지 영화 안에서 살아간 가장 행복했던 기억” 이라 추억하는 조니 토는 특히 “서부극, 전쟁영화, 로마를 배경으로 한 영화를 좋아했다”고 회상한다. 이후 “금요일에 TV드라마 보는 걸 즐겼던” 이 영상시대의 수혜자는 공부에 뜻이 없어 중학교 이후 학업을 그만두었고 결국 어린 나이에 홍콩 방송사 TVB에 잡역부로 일하면서 TV와 처음 인연을 맺었다. “심부름하고 욕을 먹는 게 다였지만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는 것이 너무나 좋았던” 방송사 잡역부에서 “의외로 좋은 성적을 낸” 연기자 훈련반을 잠시 거쳐 “역시 내가 원하는 건 연출”이라는 생각에 감독의 꿈을 키웠다.
물론 “너무 높은 꿈이라 과연 될까” 의심 했던 소망은 77년 TVB 드라마 감독으로 일할 기회를 얻게 되면서 현실화 되었다. “남들보다 모자란 학력을 커버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일주일에 7일간 쉬지 않고 일할 때도 있었고, 한 달에 총 40시간도 못 자는 인생을 살았다. 비록 힘들었지만 연출을 하고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하고 즐거워서 고통스럽지 않았다.”던 조니 토는 드라마 연출 데뷔 4년 만에 드디어 첫 번째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영화는 <벽수한산탈명금>이란 작품이었는데 그 작품을 찍을 때가 23살 정도 되었다. 이 영화를 찍고 너무 고생을 해서 그 이후 7년간 영화를 못 찍을 정도였다. (웃음) 결국 다시 방송국으로 들어가서 어떻게 하면 좋은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는 조니 토는 “두 번째 영화를 찍을 때쯤 비로소 영화 전체를 내가 스스로 컨트롤 하게 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겸손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도용호방>과 <참새>는 홍콩에 대한 내 존중”
3번째 영화의 흥행 성적이 좋았던 까닭에 “이후 내가 진짜 찍고 싶은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는 작품이 바로 주윤발을 스타로 등극시켰던 눈물의 <우견아랑>이었다. 홍콩 액션영화의 붐으로 남자배우의 개런티가 엄청났던 시절, “남자스타 한 명 캐스팅 할 비용으로 양자경 매염방, 장만옥를 캐스팅해서 <동방삼협>을 만들었다. 남자든 여자든 나에겐 상관없었다. 여성영웅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훌륭한 영웅영화를 만들 자신이 있었으니까” 라는 말은 자신의 영화세계에 대한 자신감과 동시에 방송사 프로듀서를 거쳐 온 유연함이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이후 ‘밀키웨이’라는 이름의 제작사를 차리고 ‘밀키웨이 스타일’이 만들어지기를 이야기 하며 “두기봉 표 영화가 나가야 할 방향은 오로지 창작성임을 잊지 않았다”는 조니 토 감독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영화로 비교적 최근작인 <유도용호방>과 <참새>를 꼽았다. “경제위기나 사스 같은 어두운 기운이 암울하게 시대를 누르고 있을 때 70년대 홍콩의 활기찬 에너지를 영화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는 그는 “홍콩정부가 오래된 건물들을 부수고 새로운 건물로 짓는 것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 오래된 거리나 몇 십 년 된 건물은 단순히 그냥 거리나 건물이 아니다. 문화를 잃어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시대를 기록하는 하나의 기록매체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통해 후대를 위해 시대의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결국 그 안에 없어진 없어질 홍콩의 옛 면모를 담고 싶었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오랜 도시 홍콩에 대한 내 존중”이라는 말로 클래스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다소 미숙한 중국어 통역으로 인해 2시간의 수업이 조금 느슨하게 흘러가긴 했지만 이날의 마스터클래스는 조니 토 혹은 두기봉이라는 거장의 작품세계를 공부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교실이었음이 분명했다.
글ㆍ사진. 부산=백은하 (one@10asia.co.kr)
편집. 부산=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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