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외출> 심지어 <행복>까지도 허진호 감독의 영화 속 연인들에게 허락되는 행복의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그들은 시한부 인생이거나, 어느새 식어버린 관계가 되거나 끝내 서로의 벽을 넘지 못했다. 어떤 연인들보다 아릿한 추억을 만들었지만 해피엔딩만은 맞이할 수 없었던 그들의 한을 풀어주기 위함이었을까? 허진호 감독은 정우성, 고원원과 함께 “전작들과 다르게 행복한” 영화 <호우시절>의 제작보고회를 8일 동대문 메가박스에서 가졌다. 유학시절 묘한 감정을 가졌던 메이(고원원)와 중국 출장길에 다시 재회하게 된 동하(정우성). 그 때는 사랑인 줄도 몰랐지만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여전히 기분 좋은 설렘을 교환하고, 짧은 데이트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때를 알고 내리는 좋은 비처럼 이들의 떨림은 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사랑의 감정에 대한 타이밍을 얘기하는” <호우시절>의 하이라이트 영상은 <봄날은 간다>의 대나무 신을 연상시키는 두보 초당에서의 동하와 메이의 마주침,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빗속을 뛰어가는 정원과 다림을 떠올리게 하는 순간 등 감독의 전작들에서의 아련한 장면들을 다시 복기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평범한 연인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아름다운 정우성, 고원원의 모습은 멜로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남녀의 떨림을 효과적으로 재생시켰다. 여자의 적당한 내숭과 애교, 타이밍을 맞춘 선물과 예기치 못한 도발 등 연애의지가 박약한 솔로들에게 지침이 될 만한 두 남녀의 모습은 심장을 간지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연애하고 싶은 욕구를 제대로 자극한 하이라이트 영상처럼 <호우시절>은 “가을에 연애하고 싶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는 감독의 목적을 무난히 달성시킬 수 있을까? 자신의 연애의지를 시험하거나 대리만족을 원하는 솔로들은 10월 8일 개봉일을 기다리면 되겠다. 다음은 감독과 주연배우들의 공동 인터뷰 내용이다.

<호우시절>은 행복한 영화라고 했는데, 전작들과 갖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인가?
허진호
: 전작들이 두 남녀가 처음 만나서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는 과정을 그렸다면, <호우시절>은 이전에 만난 적이 있지만 그때는 기회가 닿지 않아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지 못했던 두 남녀가 다시 만나서 밝고 행복한 사랑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가슴이 뛰었으면 좋겠다.

아무래도 그렇게 영화의 방향이 바뀐 것은 결혼하고, 아이도 낳는 등 개인적인 상황도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허진호
: 아이는 세상에 나온 지 6개월 정도 됐고, 너무 귀엽다. (웃음) ‘세상에 또 이런 행복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꼭 그런 개인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동안 만들었던 영화와는 다르게 밝고 가벼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연애를 하는 동하로 대리만족 하기도”

<호우시절>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이 독특하다.
허진호
: 영화의 중요한 배경이 당나라 시인 두보의 초당인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두보의 시에서 제목을 가져왔다. <호우시절>이란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라는 뜻으로, 사랑에도 때가 있다는 생각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개인적으로는 계절감이 느껴지는 제목을 좋아해서 그렇게 결정하게 되었다.

정우성의 경우, 전작인 <놈놈놈>도 그렇고 늘 멋진 역할을 해왔는데 이번엔 심심하다고 할 수 있는 회사원을 연기하게 됐다. 망설이진 않았나?
정우성
: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그동안 많이 받았는데, 사실 그때마다 망설였다. 과연 내가 이런 잔잔한 감정, 그러면서도 물결처럼 파고 들어오는 사랑의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더라. 그래서 하고 싶어도 굉장히 고민이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상적이면서도 찬란하고 스파크가 느껴지는 사랑이더라. 이제는 이런 사랑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나이가 되지 않았나 해서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다.

사실 정우성이 평범한 남자로 나온다는 건 상상이 쉽지 않다. 게다가 이제까지 무결점의 멋진 남자 이미지와는 다르게 동하는 다소 아저씨스럽기도 하다.
정우성
: 어떻게 보면 평범한 회사원을 연기하는 건 일종의 대리만족이기도 했다. 일상이라는 게 내가 가진 직업 때문에 제약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동창과 사랑에 빠졌던 적도 없어서 그런 자연스러운 경험에 대한 욕구가 있었다. <호우시절>의 동하를 통해서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일상의 찬란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아저씨라는 이미지를 받아들일 나이라면 아저씨란 말의 의미를 완벽한 남자로 바꿀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웃음)

고원원은 중국 배우임에도 한국 감독의 영화를 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고원원
: 내가 선택을 했다기보다는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 자체만으로 영광이었다. 원래 감독님의 모든 영화를 개봉하자마자 첫 날에 찾아볼 정도로 팬이었기에 함께 작업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너무 기뻤다. <8월의 크리스마스>를 처음 본 후부터 팬이 되었고, <봄날은 간다>는 사랑에 대한 생각이 성장하는 것을 확인한 계기가 된 영화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는 것 자체가 좋았다”

정우성, 고원원의 커플로서의 모습이 전작들의 심은하-한석규, 이영애-유지태 등의 커플들과 비교해서 어땠나?
허진호
: 사실 언어 문제를 굉장히 걱정을 많이 했는데, 막상 촬영을 시작하니까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말처럼 둘의 호흡이 너무 잘 맞았다. 어떤 조합보다도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는 것 자체가 좋았다.

남녀 배우의 호흡은 멜로영화에서 중요한데, 외국 배우와 연기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나?
정우성
: 각자의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대사를 하니까 그 점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서로의 말을 이해해가는 초반의 과정이 마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과정 같았다. 사실 같은 언어를 쓰는 연인이라도 서로의 말을 잘 못 알아듣고, 서로 조금씩 맞춰가는 과정을 거치기 마련이니까. 그렇게 호흡을 맞춰가는 게 재밌는 경험이었다.
고원원 : 감독님이 말씀한 것처럼 사랑에 국경이 없는 것처럼 영화에도 국경이 없단 걸 느꼈다. <호우시절>을 잠깐이라도 본 주변사람들이 모두 ‘아 나도 연애하고 싶다’는 말을 한 걸 보면 말이다. 나 또한 정우성 씨와 호흡이 잘 맞아서 사랑이란 꿈을 이룬 것 같다. 아마 관객들도 대단한 스타가 연애를 연기한다고 느끼기 보다는 나 같은 사람이 평범하고 따뜻한 연애를 하고 있단 느낌을 받지 않을까?

그렇게 서로의 교감이 잘 이루어져서인지 메이킹 필름에서 고원원이 애인이 있다는 말에 정우성이 굉장히 실망하더라.
정우성
: 정말 실망했다. 요새는 괜찮은 여자가 “나 애인 있어요” 하는 소리가 제일 듣기 싫다. (웃음) 고원원 씨는 청순하고 이해심도 많고, 대화를 나눠보니까 내적지향을 하는 훌륭한 여배우였다. 개인적으로도 괜찮은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껏 만든 영화중에서 가장 많은 관객들이 봤으면 좋겠다”

<봄날은 간다>의 남자 주인공으로 최초 캐스팅 물망에 올랐던 배우가 정우성이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비로소 함께 작업을 하게 되었다.
허진호
: 정우성 씨하고는 오래된 인연이 있었다. 데뷔작부터 같이 할 뻔 하기도 했는데 <호우시절>이라는 제목처럼 이제야 좋은 때를 만나서 작업할 수 있게 돼서 기뻤다. 함께 영화를 하다보니까 감독을 준비하는 배우답게 현장에서 내 생각보다 좋은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거기서 약간 자존심도 상하기도 했지만 (웃음) 몇몇 장면에는 그의 연출적인 생각들이 많이 들어가고, 그게 영화에 좋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허진호 감독의 말처럼 오랫동안 감독 준비를 했는데 <호우시절>을 하면서 감독에게 배운 노하우가 있나?
정우성
: 감독님은 현장에서 배우들에게 엄청난 인내력을 요구하신다. (웃음) 그전까지 했던 영화들은 컷 수가 많고 흐름이 빠른 영화들이었는데, 감독님은 공간에 표류하고 있는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감정까지 담을 수 있도록 고민을 많이 하시더라. 그래서 자연스럽게 테이크가 길어지고 ‘롱테이크의 장점이 이런 거구나’ 하는 걸 느꼈다. 아주 값진 경험이었다.

마지막으로 관객들이 <호우시절>이라는 영화를 어떻게 봐주었으면 하는지?
고원원
: 중국 속담 중에 ‘열정을 가지고 열심히 하면 다 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마음으로 임했다. 일상생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랑이 보이게 노력했고, 관객들도 영화를 보면서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느꼈으면 좋겠다.
허진호 : 이제껏 만든 영화중에서 가장 많은 관객들이 봤으면 좋겠다. (웃음) 마침 때맞춰 가을에 개봉하는데 좋은 때인 거 같고, 관객들이 영화를 보면서 올 가을에 연애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좋겠다.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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