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는 한국 대중문화의 황금기였다. 영화, 음악, 방송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시장이 확장되던 그 시절이 남긴 ‘찬란한 유산’의 한 축에는 황인뢰-주찬옥 콤비의 드라마들이 있었다. 1987년 주찬옥 작가의 데뷔작인 MBC <베스트셀러 극장-매혹>으로 처음 만난 이들은 장정일의 시를 원작으로 한 <베스트셀러 극장-샴푸의 요정>과 A.J 크로닌의 소설 <성채>, <고독과 순결의 노래> 등을 각색한 <천사의 선택> 등을 함께 작업하며 드라마와 문학의 경계를 지워나갔다. 단막극이 폐지되고 오로지 인터넷 소설과 만화만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요즘으로부터 불과 20년도 채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 그 시절, 이 드라마들은 지금 대중문화를 이끄는 수많은 작가와 감독 지망생들에게 세례를 준 작품들이기도 했다.

“당시 황인뢰 감독과는 거의 매일 만나 사는 얘기, 작품 본 얘기, 소재 얘기를 했죠. 마음이 잘 맞는 친구 같았어요. 아마, 요란스럽지 않은 걸 좋아하는 면이 비슷했던 것 같아요”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전근 때문에 수차례 이사를 다니고 남의 이목이 중요한 소도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말수가 적고 내성적이 되었던 소녀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며 서울로 이사를 하고서야 타인에게 간섭하지 않는 대도시만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훗날 그의 작품 속 캐릭터들이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독립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던 것은 이러한 욕망의 발현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젊었을 때는 지금보다 더 말수가 적었고 그래서 대본이 막, 수다스럽진 않았죠. (웃음)”라는 주찬옥 작가의 설명은 그의 대본이 여백과 공간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살려내는 황인뢰 감독의 영상과 가장 잘 어울렸던 이유 또한 말해 준다.

시청률이 최우선이자 유일한 잣대가 되어 버린 지난 몇 년 사이 방송환경의 변화에 비해 90년대에는 무엇이든 원하는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작가로서 그가 유일하게 아쉬움을 보이는 작품은 91년 방송되었던 MBC <고개숙인 남자>다. “6.25부터 80년대까지 근현대사 속에서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로 기획했어요. 작가였던 주인공이 신문사에 들어갔다가 필화 사건을 겪은 뒤 변절하고 정치권에 진출하는 과정과 그 주변 인물들의 다양한 캐릭터를 그리고 싶었는데 정치적으로 민감한 이야기라 외부의 압력이 심했어요. 결국 시놉시스에 있던 열 가지 아이디어 중 아홉 개는 버리고 하나만 쓰는 일이 반복됐고 지식인의 양심, 갈등, 괴로움, 그 시절의 사회상은 다 빠지고…불륜만 남았죠. (웃음)” 섬세한 심리 묘사와 도시인들의 삶에 대한 감각적인 표현으로 시청자들을 열광시켰던 주찬옥 작가가 언제나 “사랑도 인생도 참 쓸쓸한 것”이라는 무거운 화두를 놓지 않고 드라마를 써 왔다는 사실은 그가 고른 세 편의 작품, ‘인생’을 얘기했던 드라마들에서도 잘 드러난다.

MBC <안녕하세요>
1981년 극본 김수현, 연출 유흥렬

“부모는 일찍 돌아가시고 동생들에 결혼 안 한 형까지 줄줄이 딸려 있는 처녀 총각이 결혼을 해서 양가 식구가 한 집에 같이 살며 벌어지는 일을 그린 홈 코미디에요. 이미숙 씨가 결혼하는 맏딸 역을 맡았고, 아주 똑 부러지는 성격의 여동생을 정애리 씨가 연기했는데 방송국 AD로 일하는 사돈총각 임채무 씨와 부딪히다 정들어 결혼해서 겹사돈이 되는 이야기가 정말 재미있었어요. 다양한 가족구성원을 개성 있게 그려내는 김수현 선생님의 장기는 나중에 MBC <사랑이 뭐길래>나 KBS <목욕탕집 남자들>에서도 발휘되었는데 아마 우리나라 모든 드라마 작가는 이 분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어요”

KBS <울 밑에 선 봉선화>
1989년 극본 박정란, 연출 김재순

“요즘 일일 드라마는 대개 현대극이지만 예전에는 <한 오백년>, <꼬치미> 같은 사극이나 시대극도 종종 일일 드라마로 만들어졌어요. <울 밑에 선 봉선화>도 딸 셋을 둔 어느 가족이 개화기에서 시작해 80년대까지 격동의 세월을 거치면서 굴곡진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얘기에요. 전인화 씨와 김미숙 씨가 출연했는데, 마침 전라도가 고향이신 박정란 선생님이 그 지역 사투리를 굉장히 곱고 정감 있게 표현하셨던 걸로 기억해요. 작품성도 뛰어나고 대중적으로도 반응이 좋아서 박정란 선생님은 나중에 고향에서 주는 상도 받으셨죠”

MBC <서울의 달>
1994년 극본 김운경, 연출 정인

“김운경 선생님은 대사를 정말 재밌게 쓰시는 분이에요.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도 그렇고, 트렌드를 따라가거나 가벼운 재미가 아니라 인생을 얘기하는 데서 오는 본질적인 재미를 느끼게 하는 작품들을 많이 쓰셨죠. MBC <한지붕 세가족>의 전성기를 이끄셨고 KBS <서울 뚝배기>도 좋았지만 저는 <서울의 달>이 제일 기억에 남아요. 특히 백윤식 씨가 연기한 미술 선생 캐릭터는 정말 대단했죠. 제가 도시에 사는 ‘엘리트’ 층의 삶을 주로 그린 편이었다면 김운경 선생님은 ‘도시 서민’의 삶을 그 누구보다 잘 그려내는 작가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라”

2007년 최완규 작가와 함께 집필한 SBS <로비스트> 이후 주찬옥 작가의 새 작품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구상하고 있는 작품은 있지만 ‘인생’을 얘기하는 드라마가 만들어지기 힘든 방송 환경에서는 편성 역시 불투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전처럼 인생이나 인간을 이야기하는 드라마를 위한 흐름은 다시 올 거에요. 드라마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거거든요”라고 말하는 그는 요즘 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서 드라마 작가 지망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선배 작가로서 후배들에게 그가 해 주고 싶은 조언을 물었더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것”이란다. 이는 그 사이 삼십대 독신녀를 지나 중학교 1학년짜리 아들을 둔 엄마가 되며 주찬옥 작가가 배운 교훈이기도 하다.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인생에 대해서도 좀 더 깊이 알게 됐어요. 이제 예전보다 더 다양하고 풍부한 얘기들을 쓸 수 있을 것 같아요”라며 웃는 90년대의 요정, 보다 성숙해진 그의 드라마를 위해서라도 인간을 이야기하는 드라마의 시대가 어서 오기를.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진혁 (el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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