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가상의 연예인이 있다. 그는 평범함에서 조금 모자란 이력에, 평범함에서 조금 넘치는 사건 기록을 갖고 있다. 그가 2009년 현재 방송을 재기한다면, 과연 어떤 순서로 출연을 진행할 수 있을까. 그의 처절한 방송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바로 지금 토크쇼들이 시청자가 아닌 출연자에게 갖는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재기를 노리는 연예인들이 있다면 최대한 감정을 이입하고 읽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각 방송의 의의를 잘 이해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재기도 쇼핑처럼 쉽고 빠르게 성공하기를 기원한다.

그의 나이 올해로 삼십삼 세. 고등학생 시절 데뷔 했으니 벌써 십오 년차의 연예인이다. 그의 직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가 가수와 연기자, 광고 모델과 뮤지컬 배우 등 다수의 직업을 전전했으되, 그 중에서 특출한 하나를 꼽기 어려운 탓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수차례 연예신문 1면을 장식한 유명인으로서 대중은 그의 예술적 깊이와 관심의 넓이는 가늠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일신의 이력만은 빠짐없이 알고 있었다. 그것이 그가 번뇌로 젊은 날을 흘려보내는 바로 그 이유였다. 모두가 그를 알지만, 또한 모두가 그를 알지 못했다. 그가 몇 명의 여자와 눈물의 이별을 했고, 그가 몇 대의 자동차를 박살냈고, 그가 면 번의 망언을 토해냈는지, 그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원 펄슨 – 멀티 엔터테이닝’의 시대, 아이비 넝쿨처럼 뻗어나가는 다양한 활동의 가지들의 정 가운데 있는 그의 고결한 영혼을 알아 봐 주는 사람이란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드디어 중대한 결심을 한다. 대중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자신의 모든 이야기를 겸허히 털어내겠다고.

<황금어묵>의 인기 코너인 ‘무를 팍 도사’ 녹화장. 천하장사 MC가 그를 번쩍 안아 올리자 그는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느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모든 회한을 털어내고 말리라, 그는 마음속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올해 나이 서른 셋! 서른하고도 셋! 그런데 아직도 아이돌, 오빠! 이제는 삼촌이야, 큰 삼촌! 영계백부, 오오오오~ 사건사고도 많은데 나이도 많아, 이런 욕심쟁이 우후훗!”
시작부터 몰아치는 나이 공격에 잠시 정신이 혼미했지만, 그는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뉴욕 스타일로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침착하자. 여기서 벌써 흔들리면 안 돼.
“원래 이런 스타일입니다. 이해해 주시고요. 그런데, 실제로 마트나 공원에서 삼촌이라고 부르면서 따라다니는 꼬마를 봤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혹시…… 아들이 있는 것 아닙니까!
“아들! 헉! 영계친부, 오오오오~”

잠시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밀물처럼 공격이 밀려온다. 아니야, 내가 아무리 천둥벌거숭이 망나니로 놀아났기로서니 아들은 없어. 걘 진짜 내 조카란 말이야! 누구보다 진실 된 얼굴로 변명을 하려는 찰나. MC의 엄숙한 얼굴이 눈앞으로 바싹 다가온다.
“네, 네. 답변의 기회는 나~중에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고요.”
MC의 패턴에 말려 든 그는 잠시 식은땀을 흘렸다. 그러나 그는 이내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미 오늘의 한방은 결정되어 있다. 바로 그 순간을 기다리며 그는 조금씩 감정을 고조시켜 나갔다. 그리고 드디어, MC가 대본을 밥상 위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렇다면, 엄주 운전을 할 당시에 본인은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거죠?”
“네. 하지만 누나가 임신 중이었고, 마침 자형은 출장 중이었거든요. 누나가 막 순대가 먹고 싶다는데… 어머니가 꼭 신림동에서 백순대를 사다 먹여야 한다고 하시니까…”
자연스럽게 그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나왔다. 홀몸이 아닌 누나를 위해, 그리고 그 누나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위해 만취 상태에서도 운전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고뇌와 갈등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 녹화장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오직 코를 훌쩍이는 소리만이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고민을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순대를 못먹겠다고 한 의뢰인, 이제부터 순대 걱정 말고 먹어라! 떡볶이도 먹어라! 다만, 분식집에서 반주만 하지 마라! 팍팍팍!”

반응은 온라인에서 먼저 터져 나왔다. 그가 눈물을 훔치는 장면은 캡처 사진이 되어 게시판을 도배했고, 사람들은 그를 보다 친근하고 솔직한 연예인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리얼버라이어티 <패밀리가 컸다>에 출연 신청이 들어왔지만, 일단 조금 더 가벼운 토크쇼를 통해 보다 편안한 이미지를 연출해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리하여 그가 선택한 것이 <놀러가>였다. 물론 동 시간에 <야심만발 시즌2>의 섭외도 동시에 진행되었지만 아무래도 함께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면면이 <놀러가> 쪽이 좀 더 나은 것 같았다. 유명 야구 선수, 인기 개그맨, 정치 입문 경력이 있는 배우와 나란히 앉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었다. 물론, 출연을 결정할 때만 해도 그것이 ‘전치 4주 특집’인 줄은 꿈에도 몰랐던 일이다.

“네. 오늘은 몸싸움 끝에 전치4주 진단을 받은 적 있는 분들을 모시고 그 분들의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들을 들어 보겠습니다.”
유려한 MC의 진행으로 녹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무용담에 끼지도 못할 수준이었다.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던 이야기, 업소에서 과일을 던졌던 이야기, 국회에서 집단 패싸움을 했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의 경력은 너무나 사소한 것이었다. 기껏해야 숙소에서 같은 그룹 멤버들과 식단 문제로 싸웠던 것이 전부라니. 위기를 느낀 그는 녹화 장소가 바뀌는 순간 큰 결심을 했다. 한때 팬미팅에서 보여준 적 있는 간단한 코믹 댄스에 몸을 맡긴 그에게 MC는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그리고 모든 출연진이 함께 서서 그의 춤을 따라하며 ‘다가 올 전국 체전 응원 UCC를 강타 할 몸짓’이라는 환호를 아끼지 않았다. 결국 그날 방송에서 인맥과 에피소드가 음각 양각을 이루며 화려하게 구성되었던 토크들은 대량 편집을 당했고 방송의 절반가량이 그의 ‘모서리 댄스’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 배경 소리는 그를 따라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MC를 향한 여자 MC의 외침이었다.

“못난눔. 쯔쯧”

그러나 UCC의 불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침 방송의 VJ와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신림동 순대 여행 촬영을 하기도 했고, <네바퀴>에 출연해 ‘모서리 댄스’의 업그레이드 판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반응은 여의치 않았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토크쇼를 전전하기만 할 뿐, 어떤 공식적인 활동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지난 몇 달간 라디오 사연 모음집과 유머 백과만을 탐독하며 지낸 그가 이제와서 갑자기 앨범을 내거나, 드라마의 배역을 따 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매듭을 풀기 위해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법. 그는 일 년 만에 다시 <황금어묵>을 찾기로 결심 했다. 그러나 그가 안내된 곳은 이전과 다른 녹화장이었다. 스튜디오 밖의 간이 의자에 앉은 그는 오래간만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새삼 마음을 다잡았다. <샴, 폐인>에 출연해 수집해 온 우스개를 모두 풀어놓을 수 있는 기회도, <미녀와 쩍벌남들의 수다>에 출연해 자신이 게이로 오인 받은 사연을 털어 놓을 수 있는 기회도 마다하고 잡은 스케줄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마음이 평원처럼 넓어졌고, 그의 머릿속에는 다음날 인터넷 포털 사이트 대문을 장식할 삼백서른 개의 헤드라인이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처럼 명멸했다. 이제, 두려울 것은 없었다.

“이 친구, 군대를 갔다가 두 달 만에 온 거네. 국방색이 그냥 스치기만 한 거야!”
“S그룹과의 열애설, 그 중에 대체 누구랑 사귄 건지 밝혀야지.”
“그래도 이 사람은 이혼은 안했네. 그게 어디야.”
“으흠. 그거 물어봐라. 당신에게 백순대란?”
“어, 가만 보니까 말이야. 이 친구 그 사람 닮았어. 노이즈 1집 때 있었던 김학규라고, 이번에 노이즈 컴백하는데 그 친구는 안보이더란 말이지.”
“지금 그게 문제야, 상민이 형은 이애기로 2년을 살았는데.”
“그 2년 동안 회만 먹었대. 싱싱한 걸루다가.”
“자자, 이제 고만 시작 합시다. 들리는 TV 라디오 스타!”


글. 윤희성 (nine@10asia.co.kr)
그림. 그루브모기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