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삼성 특검이 진행될 때 상당히 중요한 이슈는 리움 미술관의 홍라희 관장이 비자금으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행복한 눈물’을 구매했느냐는 것이었다. 덕분에 팝아트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이 작품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건 ‘행복한 눈물’의 사진을 포스팅하며 ‘설마 이건 아니겠지?’라는 네티즌의 반응이었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보면서 70억 짜리니까 좋은 그림이라고 판단하는 것보단 이깟 만화 쪼가리가 뭐하는데 그 가격이냐고 묻는 게 훨씬 솔직하고 상식적인 반응이다. 그림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서 만화 아닌가. 세상에서 가장 흔하고 대중적인, 정말 팝적인 장르로서의 만화. 사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앤디 워홀의 그것처럼 ‘과연 팝적인 문화와 순수 미술을 가르는 기준이 존재하느냐’는 미학적 질문이 담겨있어서, 말하자면 그림 자체보단 그 그림이 은유하는 의미 때문에 미술 작품이 됐다. 그래서 결코 팝적이지 않다. 하지만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행복한 눈물’처럼 만화에 기초를 둔 팝아트가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으면서 만화 자체를 미술의 계보 안에서 파악할 단초가 마련된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만화_한국만화 100년’展은 엄밀히 말해 만화를 미술작품으로 해석하는 전시는 아니다.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지만 다분히 박물관적인, 역사적 자료로서의 만화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전시다. 하지만 1909년 <대한민보>를 통해 최초로 소개된 이도영의 시사만화부터 시작된 만화의 역사를 방대한 자료와 함께 따라가는 중에 <로봇 태권 V>를 패러디한 ‘수렵도’, <라이파이>의 이미지를 이용한 ‘4명의 라이파이’ 같은 팝아트를 만나는 건 상당히 재밌는 경험이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만화의 역사를 따라가다 만난 이들 작품은 미술의 계보를 교란하는 악동이라기보다는 만화의 계보를 잇는 정통 적자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분히 만화의 전통에 서있는 걸로 보이는 이들 작품을 예술로 인정해야 하는가? 고가의 미술 시장에 편입되면서 리히텐슈타인의 작업에서 실종되어 버린 이 파괴적 질문이 다시금 고개를 들어 우리와 눈을 맞춘다.
<왓치맨>
1986년│앨런 무어
영화 <왓치맨>이 그렇게 나쁜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원작과 비교하면 오직 실사화에 대한 욕망만이 남아 있는 범작일 뿐이다. 그래픽 노블은 말 그대로 만화를 그림이 있는 문학으로 파악하는 장르다. 이름이야 붙이기 나름이지만 그래픽 노블로서의 <왓치맨>이 문학과 만화의 경계를 허무는 건 사실이다. 만화에 기반한 팝아트가 만화와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것처럼. 사실 <왓치맨>은 ‘현대 사회에서 영웅이 가능한가 묻는 걸작’이라는 한 줄 코멘트로 절대 요약할 수 없는, 엄청나게 풍부한 문맥을 가진 텍스트다.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영웅 안에 잠재된 불법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요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에 대한 당위의 문제까지 이 작품이 건드리는 주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며 챕터 사이에 등장하는 가상의 신문 기사나 논평은 가히 보르헤스를 연상케 할 정도다.
2002년│톨가 카쉬프
작년 서태지와의 협연으로 국내에서 더 유명해진 톨가 카쉬프가 이름을 알린 작품이다. 이 작품이 서태지나 과거 메탈리카와 스콜피온스가 시도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퀸의 노래에 있는 테마들을 쪼개 여섯 개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즉 심포니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톨가 카쉬프의 탁월한 편곡 능력 덕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대중적 록음악이었던 퀸의 음악 안에 정통 클래식의 요소가 있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실제로 카쉬프는 “퀸의 음악이 현대 클래식 장르의 언어를 본래부터 담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다시 팝 아트가 제기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대중적 록이었던 퀸의 음악 안에 클래식의 언어가 있다면 과연 그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가 더 흥미로워지는 건 이 지점이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만화_한국만화 100년’展은 엄밀히 말해 만화를 미술작품으로 해석하는 전시는 아니다.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지만 다분히 박물관적인, 역사적 자료로서의 만화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는 전시다. 하지만 1909년 <대한민보>를 통해 최초로 소개된 이도영의 시사만화부터 시작된 만화의 역사를 방대한 자료와 함께 따라가는 중에 <로봇 태권 V>를 패러디한 ‘수렵도’, <라이파이>의 이미지를 이용한 ‘4명의 라이파이’ 같은 팝아트를 만나는 건 상당히 재밌는 경험이다. 특별히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만화의 역사를 따라가다 만난 이들 작품은 미술의 계보를 교란하는 악동이라기보다는 만화의 계보를 잇는 정통 적자로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분히 만화의 전통에 서있는 걸로 보이는 이들 작품을 예술로 인정해야 하는가? 고가의 미술 시장에 편입되면서 리히텐슈타인의 작업에서 실종되어 버린 이 파괴적 질문이 다시금 고개를 들어 우리와 눈을 맞춘다.
<왓치맨>
1986년│앨런 무어
영화 <왓치맨>이 그렇게 나쁜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원작과 비교하면 오직 실사화에 대한 욕망만이 남아 있는 범작일 뿐이다. 그래픽 노블은 말 그대로 만화를 그림이 있는 문학으로 파악하는 장르다. 이름이야 붙이기 나름이지만 그래픽 노블로서의 <왓치맨>이 문학과 만화의 경계를 허무는 건 사실이다. 만화에 기반한 팝아트가 만화와 미술의 경계를 허무는 것처럼. 사실 <왓치맨>은 ‘현대 사회에서 영웅이 가능한가 묻는 걸작’이라는 한 줄 코멘트로 절대 요약할 수 없는, 엄청나게 풍부한 문맥을 가진 텍스트다.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과 영웅 안에 잠재된 불법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요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에 대한 당위의 문제까지 이 작품이 건드리는 주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며 챕터 사이에 등장하는 가상의 신문 기사나 논평은 가히 보르헤스를 연상케 할 정도다.
2002년│톨가 카쉬프
작년 서태지와의 협연으로 국내에서 더 유명해진 톨가 카쉬프가 이름을 알린 작품이다. 이 작품이 서태지나 과거 메탈리카와 스콜피온스가 시도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퀸의 노래에 있는 테마들을 쪼개 여섯 개 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즉 심포니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이다. 이것은 톨가 카쉬프의 탁월한 편곡 능력 덕이겠지만 기본적으로 대중적 록음악이었던 퀸의 음악 안에 정통 클래식의 요소가 있었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실제로 카쉬프는 “퀸의 음악이 현대 클래식 장르의 언어를 본래부터 담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다시 팝 아트가 제기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다. 대중적 록이었던 퀸의 음악 안에 클래식의 언어가 있다면 과연 그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가?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