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헤니를 처음 만난 건 흑백의 화장품 광고에서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종조차 가늠할 수 없는 아름다운 남자가 호수에서 걸어 나오던 그 순간, 모든 여자들은 탄성을 질렀다. 첫 등장부터 판타지의 재림이었던 다니엘 헤니는 충실히 그 판타지를 재현했다. 보통의 드라마에서 질투나 음모 이상의 지분을 갖지 못하던 두 번째 남자 주인공, 그러나 그 순정이 담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MBC <내 이름은 김삼순>의 헨리는 오랫동안 다니엘 헤니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 판타지의 현신은 배우로서의 야심을 숨기지 않았다. 모두가 사랑하는 이미지를 변주하는 것만으로도 승산이 있었지만 기대를 배반하는 냉정한 로빈()으로 허를 찌르더니, 곧이어 <마이파더>로 그 해의 신인남우상을 휩쓸었다. 영화 내내 울고, 소리치고, 원망하고 그러다 다시 웃고 용서하고. 감정의 진폭을 1에서 10까지 다 보여준 <마이파더>로 그는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이 아닌 뜨거운 인간이자 배우로 비로소 앵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언어의 핸디캡이 오히려 장점이 되었던 <마이파더> 이후 모두가 그의 행보를 주목했다. 언제까지 서툰 한국어로 활동할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를 뒤로하고, 그는 할리우드로 날아갔다. 그리고 <엑스맨 탄생: 울버린>에서 울버린에 대한 콤플렉스로 뭉친 비열한 에이전트 제로로 돌아왔다. “배우니까,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만 보여줄 수는 없다”며 잘라 말하는 다니엘 헤니는 배우로서 확실한 그림이 있고, 그걸 위해선 매 순간 망설임이 없다. 동시에 터프한 모습에 놀랄 관객을 위해 “놀라지 말라”고 “나는 여전히 젠틀하다”고 안심시키는 그는 여전한 ‘다니엘 헤니’다.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으로 더 이상 뺄 것도, 더할 것도 없이 완벽한 다니엘 헤니가 아끼는 사랑 영화들은 그를 꼭 닮아 달콤하기 그지없다.

1. <빅> (Big)
1988년 │ 페니 마샬

“가장 좋아하는 영화예요. 어린 아이가 갑자기 어른이 되는 판타지가 있는데, 제가 원래 판타지물을 좋아하거든요. 어렸을 때 수없이 봤던 영화도 <애니>예요. TV에서 매일 아침 7시에 해줬는데, 하루도 안 빠지고 봤죠. 당시 시골에 살던 저에게 뉴욕이라는 큰 도시는 정말 신기했어요. <빅>에서도 조쉬가 어른들이 사는 도시에 가게 되면서 충격을 겪잖아요. 저도 그런 혼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어요. 볼 때마다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예요.”

놀이공원에서 빈 소원으로 인해 갑자기 30살이 된 13살 소년 조쉬(톰 행크스). 몸만 커진 조쉬는 어른들의 모든 것이 신기하다. 우연히 취직하게 된 장난감 회사에서는 하는 일마다 성공하고, 회장의 신임도 얻게 된다. 솔직하고 순수한 빅의 모습에 반하는 여자들을 보면 연애와 사랑에 있어서 여자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코믹하지만 정확하게 알려준다. 지금과는 사뭇 다른 톰 행크스의 반짝반짝 눈이 부시게 해맑은 모습도 볼 수 있다.

2. <케이트 앤 레오폴드> (Kate & Leopold)
2001년 │ 제임스 맨골드

“휴가를 즐기는 기분을 맛보기 위해 영화를 봐요. 영화는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2시간의 휴식인 것 같아요. 꼭 심각하고 어려울 필요는 없잖아요? 케이트와 레오폴드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좌충우돌적인 러브스토리를 보고 나면 푹 쉬고 난 것처럼 기분이 좋아져요. 성공한 완벽남과 여자들의 사랑보다는 이렇게 조금 모자란 듯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공감 가기도 하구요. 그리고 터프한 휴 잭맨이 여기선 아주 딴 판으로 나오죠. (웃음)”

야성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휴 잭맨과 로맨틱 코미디의 여왕이었던 맥 라이언이 만났다. 냉소적인 노처녀 케이트(맥 라이언)의 유일한 낙은 헤어진 애인의 집을 엿보는 것. 그러다 우연히 만난 레오폴드(휴 잭맨)라는 작자는 영 수상하다. 어디서 배웠는지 촌스러운 매너에 온갖 닭살 돋는 찬사는 다 갖다 붙이는 그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 지금과 다른 느끼한 귀족 버전의 휴 잭맨을 확인하는 재미가 있다.

3. <프린세스 브라이드> (The Princess Bride)
1987년 │ 롭 라이너

“공주와 왕자가 등장하는 영화지만 좀 색달라요. 온갖 동화, 영화의 전형적인 설정들을 다 갖고 와서 웃기게 패러디해요. 칼싸움 하는데 팔이 잘려도 계속 싸우고, 한 손으로는 핫도그 먹으면서 싸우고. (웃음) 귀엽고 정말 웃긴 로맨틱 영화예요. 충분히 예상 가능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결말이지만 과정이 새롭고 신선해요. 정말 재미있으니까 여러분도 꼭 보세요.”

당신이 아는 공주와 왕자의 동화는 여기에 없다. 한껏 비틀어 놓은 옛날이야기는 지금 봐도 신선하다. 공주(로빈 라이트)는 이웃나라 왕자와 정략결혼을 할 운명이지만 속내는 허드렛일을 하는 소년(캐리 엘위스)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의 음모에 휘말려 공주는 납치되고, 왕자는 소년을 죽이려 한다. 과연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착한 소년과 공주는 어떻게 해피엔딩을 맞을 수 있었을까? 카메오 출연한 <케빈은 12살>의 케빈(프레드 세비지)과 형사 콜롬보(피터 포크)의 얼굴이 반갑다.

4. <노팅힐> (Notting Hill)
1999년 │ 로저 미첼

“개인적으로 정말 소중한 영화예요. 3년 전에 처음 홍콩에 갔을 때 함께한 게 <노팅힐>이었어요. 전 친구도 없었고, 손바닥만 한 아파트에서 말 통하는 사람 하나 없이 살았죠. 그 때 제가 갖고 있던 게 DVD도 아닌 <노팅힐> VCD 한 장이었어요. 혼자서 그걸 매일 밤 보면서, 울다가 웃었어요. 눈물 젖은 피넛버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요. 서점에서 일하는 평범한 아가씨와 사랑에 빠질 수 있냐고요? 물론이죠! (웃음)”

서점을 운영하며 조용하게 살고 있는 윌리엄(휴 그랜트)은 가게를 방문한 할리우드 배우 안나(줄리아 로버츠)와 우연한 사건들로 자꾸 얽히게 된다. 유쾌한 친구들과 함께 하며 스타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던 안나의 본 모습을 보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둘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게 된다. 기자회견장의 극적인 프러포즈와 함께 마지막 해피엔딩 장면까지.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가 가져야 할 덕목을 모두 갖췄다. 귓가를 간질이던 O.S.T ‘She’가 영화의 여운을 더욱 진하게 한다.

5. <엽기적인 그녀> (My Sassy Girl)
2001년 │ 곽재용

“전지현 씨와는 광고를 함께 찍었어요. 촬영할 때는 굉장히 섹시했는데 영화에서는 그런 모습이 전혀 없더라고요. 술 먹고 토하고, 지하철에서 남자 뺨도 막 때리고. (웃음) 그렇게 엽기적이면서도 자연스럽게 자신의 매력을 보여줬어요. 저도 항상 완벽해 보이는 것보단 편하고 귀여운 여자가 더 좋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 같아요. 대부분 영화들의 여주인공이 아름답고 똑똑한 인물이지만, 여기서 전지현 씨는 비현실적이지 않고 사무실이나 학교에 있을 것 같은 사람이었으니까요. 그게 인기의 비결 아니었을까요?”

곽재용-전지현표 로맨틱 코미디의 신호탄이자 최고 흥행작. 첫사랑의 아픔을 간직한 청순한 그녀(전지현)는 알고 보면 폭력적이고 막무가내인 게 tvN <막돼먹은 영애씨> 뺨친다. 그런 그녀가 좋다고 끌려 다니는 견우(차태현)는 늘 몸이 괴롭다. 구타와 구토, 만취로 이어지는 술자리가 난무하는 견우와 엽기녀의 러브스토리는 인터넷 소설처럼 발랄하다.

“할리우드를 이끄는 최초의 아시아 배우가 되고 싶어요”

“5년 후는 지금과 다른 ‘뉴 할리우드’가 될 거예요. 그 때 할리우드를 이끄는 최초의 아시아 배우가 되고 싶어요. 브래드 피트나 조니 뎁처럼.” 우리는 종종 미모에 눌려 배우로서의 능력을 과소평가 당하는 배우들을 보았다. 그러나 다니엘 헤니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저주할 새도, 자만할 새도 없이 그저 쉼 없이 달리고 있다. 성공적인 데뷔를 치른 그가 할리우드 의 중심에 서게 될 날도 멀지 않은 것 같다. 아, 그나저나 이렇게 사랑스러운 남자를 전 세계와 함께 공유해야 한다니!

글.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