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원래 진짜 말이 없어요.” ‘무릎팍 도사’도 ‘젊은 할배’라고 두 손 든 과묵한 김래원은 심지어 바르기까지 하다. 주일마다 성당에 가고, 어떤 질문에도 예의 바르게 “네, 아니오” 이상의 대답을 아낀다. 20대의 혈기보다는 30대의 진중함이 풍기는 그에게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묻자 그제서야 제 나이로 돌아간다. 무게 있는 중저음이 한 톤 높아지고, 조근 조근 말이 끊이지 않는다. 곁에 있던 스태프들도 “이렇게 말 많이 하는 건 처음 본다”며 놀란다.

드라마 MBC <나>의 고등학교 방송반 새내기 래원이는 MBC <옥탑방 고양이>와 <어린 신부>로 대학생이 되었다. 옥탑방에서 티격태격 연애하던 경민은 ‘어린 신부’를 만나 개과천선한 상민이 되어 전 국민적인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귀여움을 받던 청년은 <미스터 소크라테스>로 거친 폭력과 욕설이 난무하는 세계에 뛰어든다. 경찰과 조폭의 1인 2역은 사랑스러운 외피를 벗겠다는 첫 신호였지만 “마음만 앞섰던” 도전은 쓴 쓸개가 되었고, 김래원은 그것을 씹으며 와신상담했다. “목표가 있으면 미친 듯이 노력해야 해요. 여긴 매일이 전쟁이고 경쟁이거든요.” 그렇게 잠시 행복을 맛보았다 처절하게 무너지는 <해바라기>의 태식을 치열하게 담아내며 김래원은 비로소 남자가 되었다.

12년을 카메라 앞에서 자라온 김래원. 사춘기 소년이었던 아이는 대학생이 되고 청년이 되고 남자가 되었다. 그렇게 잘 자라온 바른 생활 사나이가 좋아하는 영화는 의외로 마구 웃을 수 있는 영화들이다. “원래는 정적인 영화를 좋아했는데 요즘엔 밝고 경쾌한 영화를 찾게 돼요.” 다음은 “생활의 90%가 진지모드”인 김래원이 일탈을 꿈꿀 때 찾는 유쾌한 영화들이다.




김래원│일탈을 꿈꿀 때 찾는 유쾌한 영화들
1. <대부> (Mario Puzo`s The Godfather)
1972년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솔직히 이 영화가 보고 나서 기분이 좋아지는 영화는 아니잖아요? 그래도 개인적으로 워낙 좋아하는 영화라 언제 봐도 좋아요. 굉장히 긴데다가 시리즈가 3편이나 되는데도 잠도 안자고 쭉 다 봤어요.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가 없더라구요. 점심 먹고 보기 시작했는데 다 보고 나니까 새벽이던데요. (웃음) 말론 브란도, 알 파치노의 젊은 시절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지금과 달리 뜨거운 혈기가 느껴져서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해요. 그들이 뿜어내는 카리스마에 우울할 새가 없죠.”

누구나 알고, 누구나 얘기하는 영화사의 교과서. 가족과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 강해지려고 악착같이 살던 남자는 결국 무자비한 삶의 방식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그 비극과 복수는 대를 이어 계속된다. 이 간단한 줄거리 안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비극이 모두 담겨있다. <대부3>에서는 마이클(알 파치노)의 딸 매리로 분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딸이자 촉망받는 젊은 감독 소피아 코폴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김래원│일탈을 꿈꿀 때 찾는 유쾌한 영화들
2. <오션스 일레븐> (Ocean`s Eleven)
2001년 │ 스티븐 소더버그

“물론 전에 보긴 했지만 박희곤 감독님께서 이 영화를 보면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어요. 작품을 준비하면서 보니까 또 새롭던데요. 게다가 맷 데이먼은 원래 좋아하는 배우구요. 관객들을 쥐었다 놨다 하잖아요. <오션스 일레븐>에서도 소매치기를 하는데, 분명 영화 전개상 성공할 거라는 것을 아는데도 어찌나 조마조마 하던지… <본 얼티메이텀>에서도 그렇고 긴장감을 주는 최고의 배우예요. 물론 모든 배우들의 로망인 ‘멋있게 보이기’도 놓치지 않구요. (웃음)”

젊은 도둑, 늙은 도둑, 바람둥이 도박꾼, 떠벌이 사기꾼, 어리바리 소매치기범까지 여기 다 모였다. 라스베가스의 도박장을 털기 위해 의기투합한 대니 오션(조지 클루니)과 친구들은 완벽한 분업 시스템과 치밀한 계획으로 1억 5천만 달러라는 거금을 차지한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뺏고 다시 빼앗기고를 반복하는 오션 일당과 테리 베네딕트(앤디 가르시아)의 싸움은 돈을 떠나 남자들의 자존심 대결이다. 브래드 피트, 조지 클루니, 맷 데이먼, 앤디 가르시아 등 명배우들의 매력이 뜨거운 스파크를 일으키며 폭발한다.



김래원│일탈을 꿈꿀 때 찾는 유쾌한 영화들
3. <백 투 더 퓨처> (Back To The Future)
1985년 │ 로버트 저메키스

“<백 투 더 퓨쳐>는 시리즈를 통틀어서 한 30번은 본 거 같아요. 이 영화가 나올 때 저도 한창 열심히 스케이드 보드를 타고 있었는데 영화 속에 마티가 타고 다니는 건 날아다니는 거예요! “우와, 저 보드는 날아다니네” 하면서 배신감이 뒤섞인 큰 충격을 받았어요. (웃음) 제 신조가 ‘영화는 쉽게 보고, 사는 건 즐겁게’인데 거기에 100% 들어맞는 작품이에요. 저도 배우이긴 하지만 영화를 볼 때만은 관객으로 돌아가는데, 가장 순수한 관객의 입장에서 본 영화기도 해요.”

천방지축 시간여행을 다니는 마티(마이클 제이 폭스)는 당시 청소년들에게 동경의 대상이었다. 마티가 드로리안을 타고 과거로 가서 부모님과 삼각관계를 만들고, 미래에 가서 호버 보드를 타거나 총질이 난무하던 서부시대에 떨어져도 늘 흥미진진했다. 거기에 늘 위기에서 구해주는 브라운 박사(크리스토퍼 로이드)가 있었으니, 위험한 모험도 늘 든든할 수밖에.



김래원│일탈을 꿈꿀 때 찾는 유쾌한 영화들
4. <21> (21)
2008년 │ 로버트 룩케틱

“라스베이거스 도박장에서 수학천재들이 딜러를 놓고 도박을 해요. 카드가 한 팩이 45장이잖아요, 그게 도박판에 8팩이 들어가는데 그 천재들이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외워서 교수랑 같이 도박장을 털어요. 영상도 스피디하고, 마지막에 상상할 수 없는 반전까지 눈을 뗄 수 없었어요. 실화를 바탕으로 해서 박진감 넘치고, 순간순간 닥치는 위기들이 <인사동 스캔들>과도 비슷한 것 같아요.”

상위 1%의 천재들이 모인 MIT 블랙잭팀. 누군가는 등록금 때문에, 누군가는 재미로, 누군가는 자신이 천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라스베이거스를 털기로 마음먹는다. 이들은 미키 교수(케빈 스페이시)와 함께 ‘카운팅 기술’로 카지노들을 하나씩 초토화시킨다. 빠른 전개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감독이 회심의 일격으로 준비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평범한 사람의 두뇌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카운팅 기술’을 보다보면 실재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김래원│일탈을 꿈꿀 때 찾는 유쾌한 영화들
5. <첫키스만 50번째> (50 First Dates)
2004년 │ 피터 시걸

“재미있으면서 감동도 있고, 막 웃을 수 있으면서도 짠했어요. 자기 인생을 한 여자에게 다 건 사랑이잖아요. 현실에 그런 남자가 어디 있겠어요. 사람들은 로맨틱 코미디가 가볍기만 하다고 생각하는데, 전 사랑 얘기가 오히려 더 어렵다고 봐요. 연애 감정은 가짜로 꾸며서 연기하면 표가 다 나거든요. 그리고 남의 연애사는 제3자가 보기에는 항상 재밌잖아요. (웃음) 특히 거기서 드류 베리모어가 매일 <식스센스>의 반전을 보고 놀라는 것도 너무 웃겼어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려 매일의 기억이 백지상태로 포맷되는 루시(드류 베리모어)와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헨리(아담 샌들러). 루시는 연인의 이름도 기억 못하고, 늘 낯선 이로 헨리를 경계하지만 또 매일 그와 사랑에 빠진다. 하와이의 햇살처럼 상큼한 미소의 루시와 그런 그녀를 위해 매일 새로운 데이트를 준비하는 헨리는 그야말로 천생연분. 똑같이 반복되는 데이트가 지겨운 오래된 연인들은 헨리의 기상천외 데이트 비법을 참고하자.


“지금까지 수수하고 밝은 청년이었다면 이제 비로소 성인이 된 거죠”



“<인사동 스캔들>의 이강준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여유가 줄줄 흐르는 남자예요. 그런 건 보통 남자 나이 서른이 넘어야 생기기 마련이라 많이 망설였어요.” 김래원의 말처럼 복원전문가 이강준은 영화 속 상황을 통제하는 인물이다. 모두의 머리 위에 있는 자신만만한 1인자. 그처럼 영화 안에서나 현실에서나 김래원에게는 군 입대를 앞둔 20대 남자의 불안감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해바라기> 때도 그렇고, 30대의 배우가 해야 할 역할을 미리 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전 수수하고 밝은 청년이었다면 이제 비로소 성인이 된 거죠.” 우리가 몰랐던 사이, 조용히 자기 안에 자라고 있던 것들을 갈무리 해온 김래원. 그는 여유만만, 패기만만한 스물아홉이다. 성대한 서른 잔치를 앞두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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