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하루에 몇 시간이나 TV를 보는 거예요?” 첫 직장 입사를 위한 마지막 면접, 당시 그 영화잡지의 편집장님은 저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영화잡지에 입사하겠다는 녀석이 면접에 들어와 텔레비전에 대한 유년부터의 집착과 사랑을 줄줄 읊고 있었으니 아마도 기가 막혀서 물으셨을 겁니다. “음……10시간쯤 요?” 물론 거짓말이었습니다. 10시간이라뇨.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기 전 생활 패턴으로 보자면 족히 15시간은 넘게 TV를 보았던 때니까요.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함에 잠도 별로 안 오고, 돈이 없으니 나가 놀 수도 없고, 어쩐지 친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던 그 시절. TV는 웃음을 주고, 위로를 주었습니다. 영화관이었고 쇼 무대였고 토론장이었습니다. 한 번도 이 따위의 상태를 비웃은 적 없는 친구였고, 한 번도 깊은 밤을 외롭게 만든 적 없는 연인이었습니다. 그 이후로도 그 이전에도 아니 지금도, TV 앞의 시간은 저에게 가장 은혜롭고 평화로운 순간입니다. 민호와 영배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해도, ‘건어물녀’처럼 바싹바싹 건조되고 있다 하더라도, ‘TV님’ 앞이라면 누구 눈치 볼 것도 없고, 어느 하나 날 귀찮게 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이 형벌이라면 아마도 이 사랑은 종신형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은 그 어떤 스크린을 거치지 않은, 중간 매개체 없는 진짜 접촉을 원하고 있습니다. 삼라만상이 다 들어가 숨 쉬고 있는 TV수상기 앞에서 우리는 가끔 이것이 진짜 세상이라는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TV는 세상이라는 곳을 바라보는 가장 투명한 창일뿐입니다. 진짜 세상은 그 무균실의 커튼을 치고 나와 대지에 발을 디디는 순간 비로소 만날 수 있습니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1대 1의 응시, 피부에 파고드는 바람의 감촉, 코를 자극하는 꽃향기, 뜨거운 피가 흐르는 누군가의 더운 손과 뺨. 거기서 비로소 TV 속 당신들의 드라마가 아닌 우리의 드라마가 피어나고, 그들만의 리그가 아닌 나만의 리그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안전하고 익숙한 버추얼의 세계를 여전히 사랑하겠지만, 다가오는 주말 하루 이틀이라도 잠시 진짜 세계를 향해 발을 디뎌봐요.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무한도전>처럼 ‘세계일주’를 할 수도 있고, ‘1박 2일’처럼 주머니 가벼운 여행을 떠날 수도 있으니까요. 망설이던 고백을 던져도 좋고, 주저하던 말을 꺼내도 상관없어요.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숨이 턱까지 찰만큼 뛰고, 오랫동안 연락을 못했던 누군가에게 미친 척 전화를 걸어도 좋을꺼예요. 제가 어디 추운 겨울에 이런 말 하던 가요. 지금은 일 년에 몇일 허락되지 않는, 딱 좋은 계절이니까요. 감히 말하건대 TV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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