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록 홈즈 시리즈를 외우도록 읽고 <가십 걸><번 노티스>까지 다 보고 나서 나는 잠시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돌아오는, 마감도 섭외 걱정도 회의 준비도 없는 날 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느냔 말이다! 좁은 방 안을 빙빙 돌며 읽을거리를 찾아 헤매던 내 눈에 한 달 전, 인터넷 서점의 반액 세일에서 충동적으로 사들이곤 박스도 뜯지 않았던 <빨강머리 앤> 전집이 구원처럼 들어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나 역시 동화책이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으로 빨강머리 앤을 처음 접했지만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총 10권으로 완성한 <빨강머리 앤> 시리즈에는 그보다 훨씬 풍부하고 깊이 있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물론 어릴 땐 그저 공상을 좋아하고 엉뚱한 소리 잘 하는 여자애인 줄 알았던 앤이 어른이 된 지금 보니 하얀 피부에 날씬하고 발랄하고 어떤 사람과도 친해질 수 있는 매력의 소유자에 공부도 잘 하는 데다 남자애들에게 인기도 있는 ‘엄친딸’ 스타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땐 상당한 배신감이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쳇, 얄미운 계집애!’라며 정을 뗄 수 없었던 것은 결정적으로 이 대목 때문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열병으로 부모를 잃고 남의 집을 떠돌며 애보기로 얹혀살았던 앤은 그들이 잘 해 주더냐는 머릴러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친절하게 해 주려는 생각이 있었다면 반드시 그러지 못했더라도 괜찮아요. 두 분 다 살아가는 데 걱정거리가 많았어요. 남편이 심한 술주정꾼이라면, 세 번이나 쌍둥이를 낳는다면 힘들겠지요? 하지만 나에게 친절히 해 주려는 마음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요” 고작 열 한 살짜리가 말이다.

이처럼 글 구석구석까지 배어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애정, 유머는 읽는 사람의 마음을 그야말로 평안하게 만들어준다. 자라서 선생님이 된 앤이 학생에 대한 애정과 체벌의 필요성 사이에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에피소드나 에이본리 마을의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주민들을 설득해 나가는 과정 역시 흥미로우면서도 순간순간 가슴을 찡하게 한다. 게다가 무엇보다 기쁜 것은 앤의 자녀들 세대 이야기까지 담고 있는 이 시리즈에서 아직 못 읽은 내용이 8권이나 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아무래도 그린 게이블즈가 있는 프린스에드워드 섬에 가보고 싶어질 테니 그 전까지 환율이나 떨어지길 기도해야지.

글ㆍ사진.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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