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몰라봤다. 김남주라는 ‘CF 여왕’의 복귀에 그저 그런 ‘줌마렐라’ 드라마의 등장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 드라마 보통이 아니다. 회사 부인회의 서열과 부장-과장-대리-인턴으로 이어지는 카스트 제도는 저리 가라로 엄정하지만 또 못지않게 웃기다. 더없이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칠 줄 모르고 터지는 웃음은 처럼 거북하지 않다. 재벌과 음모가 등장하지만 유쾌하기 그지없는 MBC 의 비결을 조지영, 윤이나 TV평론가가 알아봤다. /편집자주

퀸즈푸드 야망의 두 주역인 김홍석(김창완)과 한준혁(최철호)의 사우나 장면, 두 사람이 수건만 걸치고 앉아있을 때, 홍석은 말한다. ‘벗고 있으니 사람 다 똑같더라고. 잴 필요도 없고, 쫄 필요도 없어’ MBC <내조의 여왕>을 보고 있자면, 새삼 이 대사에 공감하게 된다. 남의 떡이 커보이고, 남의 집 잔디가 더 파랗게 보이지만, 사람들의 인생살이란, 결국 거기서 거기인지도 모른다.

신데렐라의 부활, 멜로 라인… 모든 것이 분명하다

많은 드라마들이, 난관 끝에 결혼(재혼)에 골인하기까지의 이야기, 즉, 결혼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주목하더라도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여자가 연하남을 만나며 끝나곤 했다. <내조의 여왕>은 달랐다. 이 드라마는 말하자면,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시작한다. 그 왕자가 사실 왕자가 아니었음이, 그래서 신데렐라의 팔자는 나락으로 떨어졌음이 밝혀진다. 다시, 그럼 신데렐라의 역전타는 가능할 것인가? 드라마의 제목을 보자면, 어쩐지 가능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천하의 천지애(김남주)의 매력은 여전해서, 사장 허태준(윤상현)이나 한준혁마저 그녀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한다. 거기에 사장의 부인 은소현은 지애의 남편, 온달수(오지호)에게 적극 대시하고 있다. 거기에 보태서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는 사랑의 화살표는 분명히 중요한 메인 플롯이긴 하지만, 시작부터 전면전은 아니되 점점 볼륨이 커지는 배경음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 외에도 흥미진진한 서브플롯이 많은데, 이를테면 ‘분장실의 강선생님’을 연상시키는, 무시무시한 ‘평강회’의 상하구조가 그렇고, 김홍석-한준혁의 음모라인, 하대리-양과장의 엉성라인이 그렇다. 굵직하거나 자잘하거나 갈등은 모두 선명하다. 갈등을 추동하는 힘은 역시, 캐릭터다.

드라마를 생동하게 하는 캐릭터의 힘

캐릭터의 힘은, 인물이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순간에도, 그들이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내조의 여왕>에는 비중이 크거나 작거나 상관없이, 저마다의 성격대로, 나름대로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이 있다. 주연의 인생을 설명하거나 요약하기 위해, 등장하는 사람들은 없다. 게다가 그 캐릭터 하나 하나가 어딘지 연민이 가지 않을 수 없는 허점을 지니고 있는 것도 탁월한 설정이다. 천지애-온달수 부부는 물론이요, 전개상 어쩔 수 없이 악역을 전담하는 양봉순(이혜영)마저, 그녀의 뿌리깊은 콤플렉스를 알고 나면 마냥 미워하기가 어렵고, 냉혈한인 듯 보이지만, 천연덕스럽게 온달수의 도시락을 뺏어먹거나 엎드려 자다가 입가에 침 자국을 단 채 일어나는 한준혁도 정이 안갈 수 없고, 어렸을 때 아마 구준표 같았을 허태준도 안쓰럽고, 사랑 받지 못하는 그의 아내 은소현도 안타깝다. 대본은 인물에게 저마다의 성격을 주고, 그 성격에 꼭 맞는 약점도 추출했다.

거기, 그 배역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연기자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입에 달라붙는 구어체 대사들은 주거니 받거니, 온전한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심지어 은근히 숨겨둔 유머 코드는 드라마의 감칠 맛이다. 이를 테면 퀸즈푸드의 주력 모델이 <티켓 투 더 문>의 오승아라는 사실이 그렇다. 주조연이 따로 없는, 견고한 캐릭터의 구축은, 작품의 내적 메시지와도 일치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진 듯 보여도’ 실상은 없는 한 가지 때문에 불행할 수 있는 것이 인생이고, ‘가진 것 아무것도 없어도’ 행복할 수 있는 것 역시 인생이다. 인생은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사는 것이기에, 변화할 수는 있어도 역전승(패) 할 일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인생이 다른 누구의 인생에 비해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할 수 없는 것처럼. 예측불허 퀸즈푸드의 운명과 복잡한 애정구도가 속도를 내고 있는 극의 중반부, <내조의 여왕>은 치정과 불륜의 음습함도 없이, 슬랩스틱의 피로함도 없이, ‘재지도 않고 쫄지도 않고’ 계속 놀라운 균형감을 보여줄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글 조지영

MBC <내조의 여왕> OST 중 한 곡인 ‘너에게 원한 건’은 90년대 초반 인기를 끌었던 댄스 그룹 노이즈의 히트곡이다. 이 드라마는 ‘너에게 원한 건’을 듣고 열광하며 무스를 발라 하늘 높이 머리를 세우던 여고생들이 15년이 지난 후, 전혀 다른 상황 속에서 처하게 된 데서 출발한다. 학창시절 여왕이었던 천지애(김남주)는 백수 남편을 어떻게 해서든 취직시켜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고, 그녀의 시녀처럼 시중을 들어주던 양봉순(이혜영)은 부장님 사모님이 되었다. 이성에 대한 인기라는 기준으로 관계가 만들어졌던 여고시절과는 달리, 가정을 꾸리고 생활의 최전선에 서 있는 30대 중반의 나이에는 사회적인 권력에 따라 관계가 재정립된다.

‘내조’라고 쓰고 ‘생존’이라고 읽는다

‘내조(內助)’라는 단어의 사전적 의미는 ‘아내가 남편을 도와줌’이라는 뜻이지만, <내조의 여왕> 속 아내들의 내조는 이 적자생존의 사회 속에서 ‘내 가족’이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투쟁의 방식이다. <내조의 여왕>의 남자들은 평사원인 온달수(오지호)를 제외하면 이름보다 사장, 이사, 부장, 대리와 같은 직함으로 불린다. 이름 뒤에 붙는 직함이 그 사람의 지위를 나타내고, 권력의 정도를 보여준다. 베갯머리송사로 회사 내부 깊숙한 곳의 일들까지 움직이는 이사 부인 오영숙(나영희)을 비롯해 퀸즈푸드의 평강회 회원들 모두는 그 권력 구조 아래에 있다. 살고 있는 집의 평수, 입고 있는 옷의 브랜드, 생계 외적으로 투자할 수 있는 돈의 액수에 의해 지위가 결정되는 그 사회 속에서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 있는 지애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내조’라고 이름 붙인 필사적인 아부뿐이다. 한 때 여왕이었던 지애도 남편의 취직을 위해서라면 이사 사모님의 대소사를 챙기며, 친구의 시녀가 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길을 택한 사람들, 곧 직장생활로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소위 ‘결혼적령기’라고 일컫는 나이에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 사람들에게 <내조의 여왕>은 무한 공감의 드라마가 될 수 있다. 일단 딸의 유치원 등록금 때문이라도 아무리 힘들어도 ‘화장실 바닥에 붙어있는 물 묻은 휴지처럼’ 회사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하는 ‘리얼리티’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은소현(선우선)과 달수의 과거, 허태준(윤상현)과 지애의 우연한 인연으로 드라마로서의 판타지까지 가미된다. <내조의 여왕>은 리얼리티와 판타지 어느 쪽도 놓치지 않고 균형을 맞추면서 적절한 속도로 사건을 전개해 나간다. 이런 면에서 <내조의 여왕>은 매우 영리한 드라마다. 리얼리티가 살아있지만 보기 불편할 정도로 사실적이지는 않고, 갈등은 파국에 이르기 전에 해결되며, ‘백마 탄 왕자님’의 로맨스 판타지는 적당한 선에서 가슴을 설레게 한다. 남은 6회 동안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한, 이 드라마의 재미는 특별히 반감되지 않고 희망적인 결론으로 나아갈 것이다.

왜 사냐 물으면 그저 웃지요

흥미로운 점은 <내조의 여왕>의 장르가 코미디라는 사실이다. <내조의 여왕>에서 코미디는 주로 웃을 수 없는 상황에서 터져 나온다. 자존심을 짓밟는 사람 때문에 한없이 비참해지는 순간, 한 방 날리고픈 상상은 언제나 상상으로 끝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순간에 그건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그래서 <내조의 여왕>의 코미디는 사실 블랙코미디다. 지애가 동전까지 탈탈 털어 봉순의 견인된 차를 되찾을 때, 직원에게 ‘누나라고 생각’하고 280원만 내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에 웃다가, 어쩐지 짠해지고 마는 것은 그래서다. 아무리 극한 상황이 와도 특유의 긍정성을 잃지 않고 유쾌하게 모든 상황을 헤쳐 나가는 지애의 모습은,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처지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천하의’ 천지애도 저렇게 사는데. 어쩌면 이 드라마가 끝까지 놓치지 말아야 하는 미덕이 있다면, 팍팍한 삶 속에서 어찌됐건 웃어보는 바로 그 ‘천지애 정신’일지도 모르겠다.
글 윤이나

글. 조지영 (TV평론가)
글. 윤이나 (TV평론가)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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