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영화 <그림자 살인> 홍보만으로도 정신없을 시기에 황정민은 아침부터 드라마 <식스먼스> 타이틀 촬영을 하고 휴식 없이 드라마 포스터 촬영을 위해 신사동의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전날 밤 40도가 넘는 고열로 고생했다는 매니저의 귀띔. 누구보다 바쁜 시기를 바쁘게 보내고 있는 그와의 인터뷰가 혹여 까칠하게 진행될까 걱정한 건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튜디오 뒤편에서 슬리퍼를 걸친 채 영화 <너는 내 운명> 석중 같은 서글서글한 미소로 “기다리느라 힘드셨죠? 여기 앉아서 진행하세요”라 말하는 그의 모습 앞에서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의 강수부터 <그림자 살인>의 홍진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외면을 보여줬던 그에게서 내면의 진심 한 줌을 들여다본 느낌을 받은 건 그가 만들어준 편안한 분위기 덕분일 것이다.오늘 <식스먼스> 포스터 촬영인데 드라마는 얼마나 찍었나.
황정민: 한 번 했다. 그것도 드라마 타이틀 촬영이었다. 영화 스케줄 때문에 토요일부터나 촬영 들어간다. 아, 그래봤자 내일이구나. (웃음) 내일부터 죽었다고 봐야지.
“드라마를 찍는 다고 해서 연기가 특별히 바뀌는 건 아니다”
아직 경험해보진 못했겠지만 영화와는 호흡이 많이 다를 거 같다.
황정민: 물론 영화는 준비할 시간이 많은 편이지만 영화 찍을 때도 빨리 찍고 그 장소에서 나가야 할 때가 있다. 드라마 스케줄이 빡빡하다지만 그건 나만 준비되어있으면 되는 거다. 연기하는 입장에선 그렇게 불편할 게 없을 것 같다. 물론 연기한 다음에 모니터로 확인하지 못하고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런 식으로 연기하는 게 궁금하다. 난 평소에 모니터를 굉장히 꼼꼼히 확인하는 편이니까.
영화 <검은 집>에 같이 출연했던 강신일이 모니터를 안 본다고 하던데.
황정민: 그렇다. 신일이 형은 모니터를 안 본다. ‘봐서 뭐하니’ 이러는데 속으로 부러웠다. ‘그렇게 연기에 자신 있단 말이에요?’라고 물어보는데 그냥 ‘그 결정은 내가 하는 게 아니니까’라고만 하더라. 사실 그게 맞는 것 같다. 자신의 연기가 좋다고 믿거나 자만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어차피 연기를 평가하는 게 자신이 아닌 관객이라면 그냥 자기가 자신의 최선을 다하고, 미련 없이 스스로를 믿는 거다.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런데도 본인이 모니터링을 열심히 하는 이유는 있을 거 아닌가.
황정민: 내가 내 걸 본다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고서 어땠는지 들어보는 작업인 거다. ‘이 테이크에서 어땠니? 이런 느낌으로 했는데 어땠니’라고 물어보고 거기에 대한 의견을 듣는 거다. 모자란 것 같으면 ‘오케이, 그럼 이걸 다르게 해보자’ 이런 식으로. 내 연기를 내가 어떻게 판단하겠나.
그렇다면 그런 차이에서 오는 드라마의 연기 스타일 변화가 있을 것 같다.
황정민: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 내가 아는 게 한 가지 방식밖에 없다. 나는 연극할 때 배웠던 연기 방법, 캐릭터 분석하는 방법을 그대로 영화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쭉 그렇게 해왔고, 드라마에서도 그렇게 할 건데 결과론적으로 어떻게 될지는 판단하기 어렵지.
그것 때문일까? 여태 당신이 영화에서 보여준 연기는 뭔가 연기 같은 연기, 계산하는 연기 같은 느낌이 든다. 나쁜 뜻이 아니다.
황정민: 그런 게 분명히 있다. 그래서 그런 걸 극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고, 그런 틀 자체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식스먼스>의 구동백은 <너는 내 운명>의 석중이랑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이번 영화 <그림자 살인>에서의 건들거리는 연기는 조금 흥미로웠다. 이 사람이 힘을 좀 뺀 건지, 아니면 힘 뺀 것처럼 보이는 테크닉을 구사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황정민: 힘을 뺀다는 것 자체가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다. 예전에 작품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연기를 잘 할까, 도대체 연기를 잘 하는 게 뭘까’ 늘 그런 고민을 해왔다. 배우라면 누구나 그런 고민은 기본적으로 하지 않나. 이런 고민이 나 스스로를 스스로 옥죈다. ‘너 잘하고 있어? 이게 맞아? 네가 하는 게 진심으로 하는 거야? 맞아? 아니야.’ 만들었다가 부수고 만들었다가 부수는 과정을 수없이 겪는다. 그런데 이번 작품 같은 경우는 진짜 마음먹고 나를 좀 내버려뒀다. ‘너 연기 잘해. 잘하니까 넌 이제 홍진호야. 홍진호니까 대사 좀 틀리면 어때. 놀아. 즐겨. 두려울 게 뭐가 있어.’ 그런 마음을 먹고 간 거다. 이렇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렸다.(웃음)
드라마에 도전하는데 대한 부담감도 덜어줬겠다.
황정민: 그런 면이 분명히 있다. 처음에는 막 ‘드라마… 하아…’ 이랬는데 이걸 겪고 보니 그 고민이 정말 말도 안 되는, 내 개인적인 고민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대된다. 어떻게 내가 이 현장을, <식스 먼스>의 구동백이라는 인물을 즐기면서 할지. 또 <너는 내 운명>의 석중과 비슷한 성격이지만 어떻게 다른 인물을 만들어낼지도 흥미롭고.
<그림자 살인>의 홍진호는 나름의 사연이 있는, 보이는 게 다인 사람이 아니다. 그런 히스토리를 담아내야 할 텐데.
황정민: 물론 캐릭터 분석을 하면서 내 나름대로의 시나리오를 만든다. 홍진호는 왕족을 보살피는 경호원이었다. 정의감에 불타는 사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직하게 잘 사는 사람이었을 거다. 하지만 사실 연기에 있어 인물의 과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그 사람의 뿌리니까 그걸 이해하긴 해야 하지만 그걸 가져가면서 지금의 대본을 소화하는 게 중요하지. 처음에는 군인 시절에 일본군과 싸우다가 자기 부하들이 죽고 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신이 있었는데 그런 걸 다 걷어냈다. 우리 영화에서 중요한 건 그런 삶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 이런 흥미로운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홍진호의 과거가 궁금해지는 건 영화 초반에는 돈만 찾던 그가 후반부에는 정의감으로 사건을 해결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 이 사람이 원래는 이런 사람이었구나.
황정민: 정의감은 아니지. 영화 편집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게 있는데 원래는 ‘나는 안한다, 돈 안 되는 일이면 안 한다’는 장면이 있었다. 실제로 내가 표현하고 싶었던 건 정의감에 불타는 게 아니라, 인간말종들을 만났을 때의 원초적 분노 정도다. 내가 아직 모자란 게 그 순간을 즐기자고 하면서도 홍진호스럽게 하지 못하고 순간 황정민이 나오는 거다. 그 부분은 내가 좀 실수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상황에서 평소 홍진호처럼 ‘에헤라디야~’ 이럴 수는 없는 건데.(웃음) 홍진호라면 어떻게 했을지 한 번 더 생각했다면 다르지 않았을까. 조금 안타까운 면이 있는 거 같다. 그런 면에서 사건을 해결해서 고맙다는 고종 황제에게 ‘딱히 그러려고 한 건 아닌데 그렇게 됐네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든다. 원래 있던 대사는 아니고 이것저것 시도하면서 나온 대사인데 그 대사로 인해서 홍진호의 캐릭터가 잡힌다고 생각한다.
글. 위근우 (eight@10asia.co.kr)
사진. 채기원 (ten@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