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들이 호들갑스러워지는 때를 알고 있다. 그건 수트에 대해 이야기할 땐데, 그럴 때 남자들은 구두에 대해 이야기하는 캐리 브래드쇼나 맛집 앞에 선 아침 방송 리포터 못지 않게 호들갑스러워진다. 그렇다고 그들이 꼭 수다스러워지는 건 아니다. 개중에는 말이 많아지는 남자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말보다는 마음으로 호들갑을 떤다. 어른이 되었다는 징표,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 사회 구성원으로서 규율을 따르겠다는 다짐, 성공을 향한 갈망의 상징… 수트에 이런 다양하고도 거창한 의미들을 부여하고 그 의미들 속에 스스로를 가두느라 마음이 지레 바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점도 있다. 그런 남자들 덕에 내 업무는 보다 단순해지고 예측 가능해진다. 수트는 라펠이 넓어졌다가 좁아졌다가, 재킷 단추가 여덟 개가 됐다가 두 개가 됐다가, 조끼를 입는 게 멋져 보이다가 벗는 게 멋져 보이다가 하는 식으로 소소하게 유행이 변하긴 하지만 크나큰 줄기가 변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현대 남성에게 수트란 갑옷과도 같다는 거 몰라요?”
싱글 브레스트 수트가 유행하느냐 더블 브레스트 수트가 유행하느냐에 관계 없이 재킷의 어깨는 꼭 맞게 입어야 하고 셔츠의 소매 자락은 0.5센티미터 정도만 재킷 밖으로 빠져 나와 있어야 한다. 앞주름이 없는 바지가 유행이든 앞주름이 있는 바지가 유행이든 신발은 발등에 금속 장식이 달린 로퍼 말고(!) 제대로 된 레이스업 슈즈를 신어야 하며, 라펠의 각이 예리한 게 유행이냐 둥그스름한 게 유행이냐와 무관하게 투 버튼 재킷일 땐 위의 단추, 쓰리 버튼 재킷일 땐 가운데 단추만 잠궈야 한다. 이런 연유로 여성 잡지에서 일하는 내 동료들이 ‘이번 시즌엔 유행이 이렇게 바뀌었어요!’를 수다맨처럼 쉴새 없이 떠들며 사는 것과 달리 남자들이 보는 잡지를 만드는 나는 깐깐한 데다 내세울 건 체력뿐인 사감 선생처럼 똑 같은 규칙을 쉴 새 없이 반복하며 살아간다. 누군가 반항할라치면 “쓰읍(협박을 위해 내는 소리)! 현대 남성에게 수트란 갑옷과도 같다는 거 몰라요?” 겁을 줘가면서.
<멘탈리스트>의 패트릭 제인은 그런 내가 요즘 예의주시하고 있는 남자다. 심령술사인 이 남자는 불러 앉혀 놓고 ‘수트 교육’을 좀 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남자는 수트를 대하는 자세부터가 틀려먹었다. 수트가 무슨 추리닝인 줄 아나 그걸 입고 소파에 누워서 자고, 모래사장에 무릎 꿇고 앉아 모래성을 쌓는가 하면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쓱 찔러 넣고 다닌다. 그러니 제인의 수트가 늘 쭈글쭈글하고, 너저분한 건 인지상정이다. 바지 뒤쪽에 생긴 여러 개의 가로 주름이나 여보란 듯 튀어 나온 무릎도 마찬가지. 요즘 멋쟁이들은 지나치게 말쑥하면 오히려 촌스러우니까 수트는 다릴 지언정 셔츠는 다리지 않고 입는다던데, 이 남자의 수트는 그 정도를 넘어선다.
명심! 이런 남자는 제인 하나로 충분하다
그래도 제인에게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면 어떡해요! 실루엣이 다 망가지잖아요. 바지는 좀 다려 입고 다녀요!” 같은 충고를 하는 건 무의미할 것 같다. 이미 제인에게 수트는 재킷과 바지가 ‘세트 구성’된 남자 옷일 뿐, 보통 남자들이 ‘수트’라고 말할 때 거기 담기는 여러 가지 의미와 상징은 거세된 지 오래이므로. 아내와 딸을 잃는 순간, 삶에의 미련도 성공에의 열망도 함께 잃어버린 남자에게 수트 입기의 룰 같은 걸 강조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수트 입기의 룰이란 결국 수트가 가진 여러 상징을 받아들이는 남자들에게만 유효한 것 아니겠냐, 말이다.
남자들이 오해할까봐 분명히 밝혀두는데, 패트릭 제인처럼 옷을 입는 남자는 제인 하나로 족하다. 심령술사도 아닌 주제에 엊그제 모래사장 위를 뒹굴던 수트를 그 다음날도 입고 나타나는 남자, 뒷골목 건달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다니는 남자를 어디에 쓸까. 그래도 제인이 그 꼬깃꼬깃한, 수트 같지도 않은 수트를 입고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게 느껴진다. 겁쟁이인 나는 꿈도 못 꾸는 일탈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으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친구를 볼 때 느끼는 대리만족 같은 것. 허나 제인과 달리 성공에의 열망,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 기타 등등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한 나는 문득 떠오르는 의구심을 억누른 채(‘우리는 수트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 확성기를 든다. “자자, 수트를 제대로 입는 것은 성공으로 가는 첫 걸음입니다. 따라오세요, 하나 둘, 하나 둘!”
심정희
이지혜 seven@10asia.co.kr
“현대 남성에게 수트란 갑옷과도 같다는 거 몰라요?”
싱글 브레스트 수트가 유행하느냐 더블 브레스트 수트가 유행하느냐에 관계 없이 재킷의 어깨는 꼭 맞게 입어야 하고 셔츠의 소매 자락은 0.5센티미터 정도만 재킷 밖으로 빠져 나와 있어야 한다. 앞주름이 없는 바지가 유행이든 앞주름이 있는 바지가 유행이든 신발은 발등에 금속 장식이 달린 로퍼 말고(!) 제대로 된 레이스업 슈즈를 신어야 하며, 라펠의 각이 예리한 게 유행이냐 둥그스름한 게 유행이냐와 무관하게 투 버튼 재킷일 땐 위의 단추, 쓰리 버튼 재킷일 땐 가운데 단추만 잠궈야 한다. 이런 연유로 여성 잡지에서 일하는 내 동료들이 ‘이번 시즌엔 유행이 이렇게 바뀌었어요!’를 수다맨처럼 쉴새 없이 떠들며 사는 것과 달리 남자들이 보는 잡지를 만드는 나는 깐깐한 데다 내세울 건 체력뿐인 사감 선생처럼 똑 같은 규칙을 쉴 새 없이 반복하며 살아간다. 누군가 반항할라치면 “쓰읍(협박을 위해 내는 소리)! 현대 남성에게 수트란 갑옷과도 같다는 거 몰라요?” 겁을 줘가면서.
<멘탈리스트>의 패트릭 제인은 그런 내가 요즘 예의주시하고 있는 남자다. 심령술사인 이 남자는 불러 앉혀 놓고 ‘수트 교육’을 좀 시킬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 남자는 수트를 대하는 자세부터가 틀려먹었다. 수트가 무슨 추리닝인 줄 아나 그걸 입고 소파에 누워서 자고, 모래사장에 무릎 꿇고 앉아 모래성을 쌓는가 하면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쓱 찔러 넣고 다닌다. 그러니 제인의 수트가 늘 쭈글쭈글하고, 너저분한 건 인지상정이다. 바지 뒤쪽에 생긴 여러 개의 가로 주름이나 여보란 듯 튀어 나온 무릎도 마찬가지. 요즘 멋쟁이들은 지나치게 말쑥하면 오히려 촌스러우니까 수트는 다릴 지언정 셔츠는 다리지 않고 입는다던데, 이 남자의 수트는 그 정도를 넘어선다.
명심! 이런 남자는 제인 하나로 충분하다
그래도 제인에게 “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면 어떡해요! 실루엣이 다 망가지잖아요. 바지는 좀 다려 입고 다녀요!” 같은 충고를 하는 건 무의미할 것 같다. 이미 제인에게 수트는 재킷과 바지가 ‘세트 구성’된 남자 옷일 뿐, 보통 남자들이 ‘수트’라고 말할 때 거기 담기는 여러 가지 의미와 상징은 거세된 지 오래이므로. 아내와 딸을 잃는 순간, 삶에의 미련도 성공에의 열망도 함께 잃어버린 남자에게 수트 입기의 룰 같은 걸 강조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수트 입기의 룰이란 결국 수트가 가진 여러 상징을 받아들이는 남자들에게만 유효한 것 아니겠냐, 말이다.
남자들이 오해할까봐 분명히 밝혀두는데, 패트릭 제인처럼 옷을 입는 남자는 제인 하나로 족하다. 심령술사도 아닌 주제에 엊그제 모래사장 위를 뒹굴던 수트를 그 다음날도 입고 나타나는 남자, 뒷골목 건달처럼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다니는 남자를 어디에 쓸까. 그래도 제인이 그 꼬깃꼬깃한, 수트 같지도 않은 수트를 입고 사건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떤 카타르시스 같은 게 느껴진다. 겁쟁이인 나는 꿈도 못 꾸는 일탈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으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친구를 볼 때 느끼는 대리만족 같은 것. 허나 제인과 달리 성공에의 열망, 열심히 살겠다는 의지, 기타 등등 그 무엇도 버리지 못한 나는 문득 떠오르는 의구심을 억누른 채(‘우리는 수트에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 확성기를 든다. “자자, 수트를 제대로 입는 것은 성공으로 가는 첫 걸음입니다. 따라오세요, 하나 둘, 하나 둘!”
심정희
이지혜 seven@10asia.co.kr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