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비 킴은 몇 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다. 두 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청소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고, 그 뒤로 15년을 다시 한국에서 보냈다. 레게 그룹 닥터 레게로 데뷔했고, 힙합그룹 부가킹즈의 리더이자 타이거 JK, 윤미래, 다이나믹 듀오 등이 속한 힙합 크루 무브먼트의 큰 형님으로 활동하며 힙합 신을 대표하는 뮤지션이 됐다. 그리고 자신의 솔로곡 ‘고래의 꿈’이 드라마 OST로 인기를 얻은 뒤에는 대중에게도 친숙한 뮤지션이 되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영화 <영웅본색>의 주제가 ‘당년정’을 리메이크하고, ‘사표를 날려라~ 내일 아침까지만’이라는 가사로 화제를 모은 한 CM송을 불렀고, 발라드 음악들만을 모은 스페셜 앨범 도 냈다. 복잡다단했던 만큼 화려하고, 만만치 않았던 만큼 흥미진진한 그의 음악과 인생 이야기.

당신을 인터뷰 한다니까 다들 노래 좋다고 전해달라고 하더라. 요즘 밤마다 사표 던지고 싶다고. (웃음)
바비 킴
: 하하. 사실 반응이 너무 좋아서 놀랐다. 팬들 중에는 “왜 ‘사표를 던져라~’는 스페셜 앨범에 안 들어가요?”라고 말하기도 하고 (웃음). 그래도 CM송은 내가 하는 음악하고는 다른 종류의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기존 발라드 작곡가들한테 곡을 받아서 완전히 다른 걸 하는 기분으로 작업했다”

CM송이 <영웅본색>의 주제가를 리메이크했는데, 당신은 미국에서 살면서 <영웅본색>을 못 봤다. 곡의 정서를 어떻게 이해했나.
바비 킴
: 그 부분은 CM송 디렉터가 아주 잘했다. 난 <영웅본색>을 보지 못해서 처음 음악을 듣고 “이걸 어떻게 불러?” 이랬다. 그래서 처음에는 우울하게 소화했다. 그런데 CM송 디렉터가 희망적으로 불러달라고 했다. 숙취 제거 음료인데 우울하게 부르면 다음 날 아무도 숙취에서 깨어나지 못할 거라고. (웃음)

‘고래의 꿈’이 드라마에 삽입돼 성공한 뒤로 대중들에게 힙합이 아닌 컨템퍼러리 뮤지션으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바비 킴
: 원래 팬들이 너무 컨템퍼러리로 가는 거 아니냐고 욕할까봐 걱정했다. 그런데 오히려 바비 킴이 이런 것도 하는구나 하면서 좋아했다. 나는 한국에서 닥터레게도 하고, 무브먼트에서 힙합도 하고, 그러다 발라드 음악도 듣게 됐다. 그게 다 합쳐지면서 요즘 내 음악이 나오는 것 같다.

발라드만 수록한 스페셜 앨범 은 한국식 발라드를 해보자는 의도로 낸 건가.
바비 킴
: 그렇다. 난 아직도 내 취향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니까. 드라마 OST로 반응을 얻은 뒤부터 이런 음악에 대한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고. 그래서 내 곡을 안 쓰고 기존 발라드 작곡가들한테 곡을 받아서 완전히 다른 걸 하는 기분으로 작업했다. 그래서 스페셜 앨범으로 냈다. 내 음악은 정규 앨범에서 하면 되니까.

레게, 힙합, 발라드로 계속 새로운 음악을 하면서도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 같다.
바비 킴
: 나는 부가킹즈를 하면서 솔로를 하고, 솔로를 하면서 CM송도 하는 거니까. ‘고래의 꿈’이 잘 되면서 부가킹즈도 계속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남들은 의리를 지켰다고도 하는데, 나는 애들하고 힙합 하는 걸 좋아하니까. 나는 1980년대에 미국에서 빌보드 차트 음악을 주로 들으면서 그 때부터 레게, 컨트리, 유로 음악까지 다 들었었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음악도 다양하고, 그런 걸 다 할 수 있는 방법도 필요하고.

욕심이 많은가 보다. (웃음)
바비 킴
: 그렇다. 미국에는 장난감만 파는 큰 빌딩이 있는데, 어렸을 때 부모님이 거기서 장난감을 사준다고 하면 누나는 갖고 싶은 걸 빨리 골라서 계산대로 간다. 하지만 나는 이것저것 고르다 끝까지 버틴다. 그러다 제일 이상한 장난감 고르고. (웃음)

“힘들고 아파서 무브먼트를 만들었다”

보통 그러면 이도 저도 못하는데 당신은 잘 됐다. (웃음)
바비 킴
: 그건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이든 다 놓지 않고 열심히 한 게 도움이 됐고. 한국에 왔을 때는 음악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이것저것 다 했다. 한국에 처음 와서 어학당 다닐 때는 음악 배우면서 어학 테이프 녹음도 했다.

두 살 때부터 미국에서 지낸 걸로 안다. 왜 한국에 왔었나.
바비 킴
: LA 폭동 때문이었다. 그 사건 이후로 집안 생활이 어려워지니까 부모님이 나에게 한 2년 정도 한국에서 살면서 한국말도 배워보자고 했다. 처음부터 음악을 하려고 온 건 아니었다. 그러다 우연히 오디션을 볼 기회를 얻었다. 그 때 회사에서 노래하고 랩을 같이 시키더니 “넌 절대로 가수할 목소리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웃음) 내가 하는 멜로디 랩이 그 회사에서 준비하는 레게 그룹하고 잘 어울릴 거라고 했다. 그게 닥터 레게였다.

언더그라운드나 다름없이 음악을 시작한 건데, 외국인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적응하기 어렵지 않았나.
바비 킴
: 나는….. 미국에서도 외국인이고, 한국에서도 외국인이다. 그게 현실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래도 남들이 나를 외국인처럼 생각하고 받아주면서 이해해주는 부분도 있었다. 식사할 때 예절 같은 것도 알려주고. 컬쳐 쇼크를 느끼기도 했다. 내가 술, 담배를 하기 시작한 것도 한국에 온 뒤부터다. 음악 하는 형들은 늘 맨 정신에 얘기 안 하고 저녁에 삼겹살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니까 거기 안 낄 수 없었다. 그래서 오바이트하면서라도 억지로 그 자리에 참여했다. 거기다 앨범은 계속 안 되고.

인간관계를 맺는데 정말 어려웠겠다.
바비 킴
: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부가킹즈의 멤버 간디도 처음 만날 때 말 한마디 안했다. 대신 눈빛을 보고, 힙합을 왜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러니까 자기는 래퍼들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좋다고 했다. 그런 식으로 그 사람이 자기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상황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래서 지루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런 당신이 힙합 단체인 무브먼트를 만든 건 의외다.
바비 킴
: 힘들고 아팠으니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힙합이 대중적이지 않았다. 공연에 나가면 대기실도 안 줘서 편의점에서 모였다. 록까페에서는 힙합이 나오면 연인들 몇 명이부르스를 췄었고. 그래서 힙합 하는 사람들끼리라도 친해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 때 이미 힙합 하는 사람들이 가는 길이 너무 달랐다. 공연을 하면 함께 모여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따로 있었고. 아픔을 털어놓을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나나 타이거 JK처럼 비슷한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무브먼트를 만들었었다.

“한국 힙합은 시작할 때부터 빈부 격차가 있었다”

그 때 한국 힙합이 왜 하나로 뭉치지 못했나.
바비 킴
: 한국 힙합은 시작할 때부터 빈부 격차가 있었다. 어떤 친구들은 가진 게 랩 밖에 없어서 힙합을 했지만 어떤 친구들은 굉장히 여유로운 집안 환경에서 힙합을 했다. 거기다 나처럼 외국에서 와서 적응하기 힘들었던 사람들도 있었고. 그리고 힙합이 좀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우리도 미국처럼 하자며 바로 서로 욕하고 지역에 따라서 세력을 나누던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도 원래 하나로 시작해서 나눠진 건데, 우리는 나누고 시작한 거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더 힘들었겠다. 그 때 마이너였던 힙합 신에서도 이방인 같은 위치였으니까.
바비 킴
: 그렇긴 했다. 나는 미국에서는 음악을 많이 듣기는 했어도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 그래도 한국에서 생활하는 게 더 나았다. 인종차별은 없었으니까. 그리고 미국에서는 노래도 마음대로 부르지 못했다. 미국에서는 음악 대신 운동을 열심히 했었는데, 그 때 운동선수가 노래하면 안 됐다. (웃음) 그러면 애들이 여성스럽다고 놀렸으니까.

미국에서 당신이 속해 있던 문화가 당신의 음악적인 감수성을 결정한 건가.
바비 킴
: 나는 흑인 친구들하고 같이 운동하면서 음악을 들었다. 그 때 흑인들은 레게하고 힙합을 들었는데, 둘 다 흑인들이 인종 차별을 이겨내며 듣는 음악이었다. 그러면서 사랑과 평화를 주제로 했고. 그 음악 들으면서 얼마나 아팠 길래 이런 음악들이 나올까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당신도 그렇게 아팠는데 굉장히 긍정적인 성격 같다.
바비 킴
: 나쁘게 말하면 자만심이다. 뭔가 잘 될 거라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앨범이 계속 안 되도 누구한테 핑계대거나 손가락질 하지 않고, 나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열심히 하지 않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작곡도 하고 세션도 했고. 솔직히 누가 나한테 너는 10년 고생할거라고 하면 안했을 거다. (웃음) 그런데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까 10년이 지나갔다. 좌절하지 않았다. 대신 오늘만 열심히 살자고 생각했다.

“젊은 후배들을 자주 만나면서 새로운 걸 찾는 게 중요”

그래서 CM송 디렉터도 당신을 선택한 건 아닐까. 당신 노래는 늘 힘들어도 어쨌건 털고 일어나자는 느낌이 있다.
바비 킴
: 난 내 노래가 남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됐으면 좋겠다. 솔직히 난 고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남들은 내가 고생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생 했던 사람이 부르니까 사람들이 더 와 닿게 느끼는 것 같다. 요즘에는 이렇게 고생시켜줘서 고맙다는 생각도 한다. (웃음)

그런 고생 뒤에 이제 당신은 사람들도 많이 알고, 힙합이든 발라드든 다 해도 괜찮은 뮤지션이 됐다. 요즘 어떤 기분으로 음악을 하나.
바비 킴
: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싶다. 레게가 좋아서 닥터 레게를 했고, 힙합을 하고 싶어서 부가킹즈를 했다. 그리고 이제는 발라드로 스페셜 앨범도 내고. 하고 싶은 음악을 다하고 산다. 복 받았다고 생각한다. (웃음)

한국과 미국에서 모두 외국인으로 살았고, 이제 한국에서 산 시간이 미국에서 산 시간과 비슷해졌다. 그렇게 살면서 30대 후반이 됐는데, 당신의 인생은 어땠던 것 같나.
바비 킴
: 바쁘게 살았다. 그리고 아직도 할 게 많이 남아있고. 지금도 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고 싶고. 계속 그렇게 살고 싶다. 그리고 젊은 후배들을 자주 만나면서 새로운 걸 찾아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 그렇다고 열아홉 살짜리 여자를 사귀라는 건 아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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