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왕세종>은 어린 충녕이 몰래 대궐을 빠져나오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일종의 가출인 셈인데 어쩌면 이것은 드라마의 운명 자체에 대한 예고였는지도 모르겠다. KBS는 4월 5일, 27회를 기점으로 KBS1에서 주말 밤 9시 45분에 방영되던 <대왕세종>의 자리를 KBS2 주말 밤 9시 5분으로 옮겨버렸다. 시청자의 편의는 조금도 배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마 방송국에서는 20%대에 달하는 시청률을 가지고도 광고 수익을 얻을 수 없는 상황이 아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수익추구보단 양질의 프로그램 제공을 우선한다는 공영방송의 명분에도 어긋났을 뿐 아니라 ‘실용주의’의 관점에서도 결국 실리를 챙기지 못한 선택이었다. 채널을 옮긴 4월에는 광고를 ‘완판’했지만 대하 사극의 주 시청층은 9시 드라마보다 뉴스를 선택한데다 가뜩이나 회를 거듭할수록 복잡해지는 권력 다툼을 그린 사극이 별다른 예고 없이 채널과 시간대를 바꾸는 바람에 내용을 몇 회 씩 놓친 시청자가 대부분이었으니 성도 났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KBS로서는 대운하를 파기 위해 삽을 이용해 해야 하는 어떤 행동과 매우 유사한 짓을 한 셈, 어쩌면 공영방송으로서는 정부 프렌들리한 선택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에는 명대사만 있는 게 아니다. 명작 대사도 있다. “태백 하늘에 나는 새들은 창고가 없어도 먹고 살고, 태백산 꽃들은 물레질을 안 해도 꽃을 피우지만 이 땅, 탄광촌 사람들은 나 신태환이가 몽땅 먹이고 입혀서 산다는 사실을 모르쇼? 내 관심과 긍휼은 그뿐입니다” 라는 MBC <에덴의 동쪽> 신태환(조민기)의 대사는 냉혈한 악역 신태환의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보여 준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한 가수도 있지만 신태환은 외도로 생겨난 자식에 대해서도 “그 자식은 내 인생, 아니 우리 계약 속엔 없었던 자식이야! 서로 참아내지 못한 욕정의 씨앗일 뿐이라구!”라는 서정적 분노를 표현했다. 그 밖에 “넌 이제 내 갈고리에 걸린 물고기처럼 내 손에 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거야” “이동욱이 형제를 봐라! 파죽지세로 니 애비를 위협하고 올라와 북진 통일이라도 하려는 놈들처럼 날뛰는데 말이다” 등 <문학 I> 교과서에 실릴 법한 주옥같은 대사들이 <에덴의 동쪽>을 수놓았다. 심지어 이 작품은 십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귀여니적 감수성 또한 완벽하게 포용하며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마저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아저씨, 벌써 날 사랑하게 된 거니?”라는 그레이스(이연희)의 대사는 2008년 최고의 고난도 작업 멘트로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패러디하며 시작했던 MBC <크크섬의 비밀>은 독특한 설정과 전개,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 덕분에 올해 가장 눈에 띄는 시트콤이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섬의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 총을 든 남자의 정체, 윤대리(윤상현)의 로또 당첨금 수령 여부, 숲에서 쓰러진 신과장(신성우)이 처한 상황 등 이후가 궁금해지는 ‘떡밥’을 잔뜩 던져놓았지만 정작 시즌 2 제작의 가능성은 알 수 없다. 물론 ‘시즌 2’가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반길 것만은 아니다. 90년 방영되었던 인기 일일 드라마 <서울 뚝배기>를 리메이크한 KBS <돌아온 뚝배기>는 주현, 오지명은 물론 아역 배우였던 양동근까지 명연기를 펼치며 서민 드라마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오리지널의 완성도를 뛰어넘지 못하고 시청률마저 저조한 채 조기종영 되었다. 한국 메디컬 드라마의 효시였던 94년 <종합병원>의 시즌 2 격인 MBC <종합병원 2> 역시 소재, 구성, 캐릭터 모든 면에서 <종합병원>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종합병원>의 주인공 중 하나였던 김도훈(이재룡)이 <종합병원 2>에도 출연하며 정하윤(김정은)에게 <종합병원>의 인기 캐릭터였던 이정화(신은경)를 닮았다고 언급하거나 <종합병원>의 장면을 종종 삽입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닌 건 아닌 거다.
언제부턴가 ‘막장’은 ‘멜로’, ‘의학’과 함께 드라마의 한 장르로 굳게 자리 잡았다. 이 장르에서 외도나 불륜은 지극히 초보적인 소재에 불과할 뿐, 진정한 막장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시청자들의 상식 수준, 허용 범위를 대범하게 뛰어넘는 뻔뻔함이 필수다. SBS <아내의 유혹>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은재(장서희)의 남편 교빈(변우민)은 은재의 자매 같은 친구 애리(김서형)와 수년간 불륜 관계를 유지하고, 교빈은 임신한 은재를 납치해 중절 수술을 시키려 하지만 거부하는 은재와 실랑이를 벌이다 바다에 빠뜨린다. 교빈과 애리는 죽어가는 은재를 버리고 도망치고, 또 다른 부잣집 딸 소희(채영인)는 입양된 오빠 건우(이재황)를 사랑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자 건우의 결혼식 날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소희를 찾아 헤매던 건우에 의해 구출된 은재는 자신이 죽은 줄 알고 행복해 하는 남편과 친구의 모습을 보며 복수를 다짐한다. 물론 이것은 30회까지,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했다. 앞으로는 ‘다른 여자’가 되어 교빈을 유혹한 뒤 처절하게 복수하는 은재의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고 하니 최근 20%를 돌파한 시청률은 얼마나 더 오를지 알 수 없다. 하긴, 이 작품의 기획 의도는 “이루지 못한 꿈과 사랑과 지금보다 나은 현실을 갈망하는 여자들의 소망과 꿈을 담은 드라마”라고 한다.
원더걸스는 ‘텔 미’, ‘소 핫’, ‘노바디’의 후크송(멜로디와 후렴구가 반복되어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노래) 3연타로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초등학생도 부장님도 할머니도 그들의 노래를 흥얼거렸고 사람들은 학예회에서, 회식에서, 돌잔치에서 원더걸스의 댄스를 따라했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MBC <아현동 마님>에서는 함진아비들의 단체 ‘텔 미’ 댄스에 이어 한복 차림에 대머리 분장이라는 엽기적인 콘셉트의 ‘텔 미’ 댄스가 등장해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 무대를 선보였다. 하반기에 등장한 ‘노바디’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SBS <가문의 영광>에서 조신하고 참한 성격의 하단아(윤정희)가 이강석(박시후) 앞에서 “아 원 노바↗디노바↗디벛 츄↗난-다-른사람-은 싫-어↘니가아니-면싫-어↘”라고 ‘노바디’를 재해석해 부르자 강석은 노래방 반주기를 꺼 버리며 말한다. “이건 안 되겠고.” 이렇듯 드라마에 범람하는 원더걸스 따라잡기 가운데 최고의 히트작은 역시 KBS <너는 내 운명>에서 호세(박재정)가 부인 새벽(윤아)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반짝이 재킷을 입고 넥타이를 이마에 매고 불러 준 ‘호바디’일 것이다. 그러나 “호세 씨 진짜 웃긴다~꺄하하하하”라고 귀엽게 호응해 준 새벽(윤아)이의 속마음은 사실 “진짜 웃긴다. 소녀시대 앞에서 원더걸스 춤을 추다니…’가 아니었을까.
SBS <타짜>에서 부산 하우스 앞 ‘다찌’들은 동네 주먹인 영민(김민준, 33세)의 격한 한 마디에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영민이 주먹을 들이민 것도 “안 비키면 죽는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도 아니다. 단지 “왜? 여기도 미성년자라서 안 되나?”라고 물어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액면으로는 이립(而立)을 넘어 불혹(不惑)을 앞둔 걸로 보이는 KBS <대왕세종> 양녕대군(박상민, 39세)은 “소자 나이 이제 약관(弱冠)”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때 태종이 느낀 분노만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충녕대군(김상경, 37세)이 형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자신이 형보다 세 살 어리다는 사실을 아버지 앞에서 굳이 밝히지 않은 덕이진 않을까. 때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은 조로(早老)한 당사자가 아닌 옆에서 나올 때도 있다. KBS <바람의 나라>에서 혜압(오윤아, 29세)은 자신이 키운 지 ‘십 수 년’만에 아무리 어리게 봐줘도 동년배 급의 외모를 가지게 된 무휼(송일국, 38세)에 대해 “그 아인…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니, 몹쓸 개그본능은 예능에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KBS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지오(현빈)는 철이(판유걸)의 드라마를 위해 가짜 소주병 라벨을 대량 만들어야했다. 진짜 소주병의 상표가 노출되면 안 된다는 방송법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소품은 가능하면 진짜, 최소한 진짜라고 믿어줄 정도는 되어야 한다. SBS <일지매>에 등장했던 부탄가스나 전봇대는 너무나 바빴던 제작진의 실수라고 치자. KBS <쾌도 홍길동>의 시공을 초월한 의상과 소지품들은 애교스러운 설정의 재미라고 해 두자. KBS <전설의 고향> ‘구미호’에서 논란이 된 여우 꼬리는 CG라는 사실이 뚜렷하도록 어색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작진이 고군분투한 결과라고 생각하면 너그럽게 봐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경마장에서, 하다못해 광화문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말이 가짜라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 KBS <최강칠우>에 등장한 ‘가짜 말’은 “다양한 앵글의 촬영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전격 도입되었으며, 그 대여료만 1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숙한 시선처리와 어색한 표정연기로 몸값을 해내기는커녕 시청자들의 놀림감이 될 뿐이었다. 하긴, 물 건너온 말로서는 큰 돈 받고 제 값 못 하는 것이 한국 드라마의 트렌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가짜 말에게 돌을 던지랴.
‘발연기’는 이제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 이후 가장 널리 인용되고 있는 연기의 갈래가 되었다. 축구도 아니고 세팍타크로도 아니건만, ‘발로 하듯 무성의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들의 등장은 올해도 어김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MBC <에덴의 동쪽>에서 독일 장군을 연상케 하는 딱딱한 말투로 모든 대사를 처리하며 한결같은 표정으로 일관한 이연희는 자칭 “어리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발연기로 많은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스타일리쉬한 명품 발연기를 선보인 <너는 내운명>의 박재정은 KBS 일일드라마 남자주인공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진 발연기계의 순수혈통으로서 맹활약했다. <별난남자 별난여자>의 고주원에서 시작된 이 계보는 <열아홉 순정>에서 서지석을 만나 ‘발실장’이라는 캐릭터를 만듦으로서 정착되었다. 이후 <하늘만큼 땅만큼>에서 잠시 주춤하나 싶던 발연기의 불꽃은 <미우나 고우나>에서 조동혁의 나선재를 통해 아직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리더니 드디어 장호세로 인해 만개하게 된 것이다. 통역이 필요한 이국적인 발음, 넘어지고 달리는 것조차 어색한 특유의 분위기는 기업의 마케팅 팀장이나 되는 어른이 제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어린이용 천사 날개를 어깨에 끼고 노래를 부르는 망측한 대본과 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시청자들을 사로잡았고, 사람들은 그를 ‘발호세’ 혹은 ‘호세 레저’로 부르며 그의 연기 엑기스를 모아 완결판을 제작할 만큼 관심과 애정을 보냈다. 냉혈한은 ‘냐냐냥’이라고 발음하고, ‘붕가’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아내를 ‘새벼씨’, ‘새볏띠’로 부르는 그를 KBS
<개그 콘서트> ‘할매가 뿔났다’의 할매(장동민)가 본다면 분명 한 말씀 하실 것 같지 않은가. “호세 고거! 나, 웃다가 죽으라고! 나 죽으면 빠진 배꼽 가져가려고!”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모르는 것은 장자 한사람으로 족하다. MBC <스포트라이트>는 촛불 시위 현장을 드라마 예고에 그대로 삽입해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를 지우며 ‘리얼리티’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포부와 달리 촛불 시위는 ‘언급’에 그쳤고, 이후에도 ‘뉴타운 열풍’, ‘김용철 변호사 사건’ 등을 연상시키는 에피소드들이 등장 했지만 드라마의 기본인 ‘극적인 재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스포트라이트>는 결국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드라마에서 추구해야 할 리얼리티는 이야기 속의 상황이 갖는 논리일 뿐, 진짜 사건을 연상시키는 노골적인 힌트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드라마 밖의 사건을 차단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배우가 갑작스러운 부상을 당하게 되면 극 속의 인물은 어쩔 도리가 없다. MBC <밤이면 밤마다>를 찍던 중 넘어져 전치 3주의 부상을 당한 김선아는 급히 삽입된 입원 장면을 찍으며 ‘일하면서 즐기는 휴식’을 맛볼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SBS <바람의 화원> 촬영 중 박신양의 팔꿈치에 맞아 코뼈를 다친 문근영은 얼굴이 부어오르는 등 부상의 정도가 심해 촬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방영분을 만들지 못한 제작진은 ‘스페셜’이란 명목의 간추린 재방송을 내 보냈고, 시청자들은 다시 한 번 ‘생방송’으로 만들어지는 드라마 제작 환경이 배우와 시청자 그 어느 쪽에도 바람직하지 않음을 통감해야 했다.
MBC <겨울새>에서 윤상현이 맡았던 ‘주경우’ 캐릭터는 명문 의대 출신의 피부과 의사였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서 그는 소파 위에 항상 두 발을 올린 채 쪼그려 앉아 엄지를 잘근잘근 씹어대는 ‘아드님’일 뿐이다. “엄만 나 없으면 안 돼”라며 아내를 버려 놓고는 옷걸이에 걸린 아내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엉엉 우는 그는 한없이 찌질했으나 많은 여성시청자들은 그에게 모성애를 느꼈다. MBC <크크섬의 비밀>에서 남자 초등학생의 심리백과와 같은 ‘윤대리’ 역을 맡은 그는 여전히 자신의 찌질함이 건재함을 과시했고, 찌질할수록 그의 인기는 높아만 갔다. 하지만 그의 라이벌은 한둘이 아니다. 부자 장모를 얻기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불륜 상대도 버릴 수 있다는 절정의 찌질함으로 승부 했던 SBS <워킹맘>의 박재성(봉태규)이나 바람피우기 콤보, 아내 구타, 솔로 패악질 등 각종 찌질함의 버라이어티를 망라한 SBS <조강지처 클럽>의 한원수(안내상), 이기적(오대규)은 물론, 최근 등장한 다크호스 찌질남이 있으니 SBS <아내의 유혹>의 정교빈(변우민)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아내 은재(장서희)를 바다에 빠뜨리고 도망치며 손이 떨려 운전을 못하겠으니 대리기사를 불러달라고 하는 뻔뻔함과 자다 일어나 아내의 환영을 보고 놀라 우는 나약함을 겸비한 그의 모습은 가히 찌질함의 정수라 할 만 하다. 그나저나 물에 젖은 장서희를 보고 놀라다니, 교빈씨는 MBC <인어 아가씨>도 안 봤나보다.
최지은 five@10asia.co.kr
위근우 eight@10asia.co.kr
윤희성 nine@10asia.co.kr
장경진 three@10asia.co.kr
이지혜 seven@10asia.co.kr
드라마에는 명대사만 있는 게 아니다. 명작 대사도 있다. “태백 하늘에 나는 새들은 창고가 없어도 먹고 살고, 태백산 꽃들은 물레질을 안 해도 꽃을 피우지만 이 땅, 탄광촌 사람들은 나 신태환이가 몽땅 먹이고 입혀서 산다는 사실을 모르쇼? 내 관심과 긍휼은 그뿐입니다” 라는 MBC <에덴의 동쪽> 신태환(조민기)의 대사는 냉혈한 악역 신태환의 뛰어난 문학적 감수성을 보여 준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한 가수도 있지만 신태환은 외도로 생겨난 자식에 대해서도 “그 자식은 내 인생, 아니 우리 계약 속엔 없었던 자식이야! 서로 참아내지 못한 욕정의 씨앗일 뿐이라구!”라는 서정적 분노를 표현했다. 그 밖에 “넌 이제 내 갈고리에 걸린 물고기처럼 내 손에 파멸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 거야” “이동욱이 형제를 봐라! 파죽지세로 니 애비를 위협하고 올라와 북진 통일이라도 하려는 놈들처럼 날뛰는데 말이다” 등 <문학 I> 교과서에 실릴 법한 주옥같은 대사들이 <에덴의 동쪽>을 수놓았다. 심지어 이 작품은 십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귀여니적 감수성 또한 완벽하게 포용하며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마저 불러일으켰는데, 특히 “아저씨, 벌써 날 사랑하게 된 거니?”라는 그레이스(이연희)의 대사는 2008년 최고의 고난도 작업 멘트로 뽑을 수 있을 것 같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를 패러디하며 시작했던 MBC <크크섬의 비밀>은 독특한 설정과 전개, 배우들의 감칠맛 나는 연기 덕분에 올해 가장 눈에 띄는 시트콤이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섬의 비밀은 풀리지 않았다. 총을 든 남자의 정체, 윤대리(윤상현)의 로또 당첨금 수령 여부, 숲에서 쓰러진 신과장(신성우)이 처한 상황 등 이후가 궁금해지는 ‘떡밥’을 잔뜩 던져놓았지만 정작 시즌 2 제작의 가능성은 알 수 없다. 물론 ‘시즌 2’가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반길 것만은 아니다. 90년 방영되었던 인기 일일 드라마 <서울 뚝배기>를 리메이크한 KBS <돌아온 뚝배기>는 주현, 오지명은 물론 아역 배우였던 양동근까지 명연기를 펼치며 서민 드라마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오리지널의 완성도를 뛰어넘지 못하고 시청률마저 저조한 채 조기종영 되었다. 한국 메디컬 드라마의 효시였던 94년 <종합병원>의 시즌 2 격인 MBC <종합병원 2> 역시 소재, 구성, 캐릭터 모든 면에서 <종합병원>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종합병원>의 주인공 중 하나였던 김도훈(이재룡)이 <종합병원 2>에도 출연하며 정하윤(김정은)에게 <종합병원>의 인기 캐릭터였던 이정화(신은경)를 닮았다고 언급하거나 <종합병원>의 장면을 종종 삽입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닌 건 아닌 거다.
언제부턴가 ‘막장’은 ‘멜로’, ‘의학’과 함께 드라마의 한 장르로 굳게 자리 잡았다. 이 장르에서 외도나 불륜은 지극히 초보적인 소재에 불과할 뿐, 진정한 막장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시청자들의 상식 수준, 허용 범위를 대범하게 뛰어넘는 뻔뻔함이 필수다. SBS <아내의 유혹>은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지평을 연 작품이다. 은재(장서희)의 남편 교빈(변우민)은 은재의 자매 같은 친구 애리(김서형)와 수년간 불륜 관계를 유지하고, 교빈은 임신한 은재를 납치해 중절 수술을 시키려 하지만 거부하는 은재와 실랑이를 벌이다 바다에 빠뜨린다. 교빈과 애리는 죽어가는 은재를 버리고 도망치고, 또 다른 부잣집 딸 소희(채영인)는 입양된 오빠 건우(이재황)를 사랑하지만 이루어지지 않자 건우의 결혼식 날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소희를 찾아 헤매던 건우에 의해 구출된 은재는 자신이 죽은 줄 알고 행복해 하는 남편과 친구의 모습을 보며 복수를 다짐한다. 물론 이것은 30회까지, 아직 본 게임은 시작도 안했다. 앞으로는 ‘다른 여자’가 되어 교빈을 유혹한 뒤 처절하게 복수하는 은재의 스토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고 하니 최근 20%를 돌파한 시청률은 얼마나 더 오를지 알 수 없다. 하긴, 이 작품의 기획 의도는 “이루지 못한 꿈과 사랑과 지금보다 나은 현실을 갈망하는 여자들의 소망과 꿈을 담은 드라마”라고 한다.
원더걸스는 ‘텔 미’, ‘소 핫’, ‘노바디’의 후크송(멜로디와 후렴구가 반복되어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노래) 3연타로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초등학생도 부장님도 할머니도 그들의 노래를 흥얼거렸고 사람들은 학예회에서, 회식에서, 돌잔치에서 원더걸스의 댄스를 따라했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MBC <아현동 마님>에서는 함진아비들의 단체 ‘텔 미’ 댄스에 이어 한복 차림에 대머리 분장이라는 엽기적인 콘셉트의 ‘텔 미’ 댄스가 등장해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 무대를 선보였다. 하반기에 등장한 ‘노바디’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 SBS <가문의 영광>에서 조신하고 참한 성격의 하단아(윤정희)가 이강석(박시후) 앞에서 “아 원 노바↗디노바↗디벛 츄↗난-다-른사람-은 싫-어↘니가아니-면싫-어↘”라고 ‘노바디’를 재해석해 부르자 강석은 노래방 반주기를 꺼 버리며 말한다. “이건 안 되겠고.” 이렇듯 드라마에 범람하는 원더걸스 따라잡기 가운데 최고의 히트작은 역시 KBS <너는 내 운명>에서 호세(박재정)가 부인 새벽(윤아)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반짝이 재킷을 입고 넥타이를 이마에 매고 불러 준 ‘호바디’일 것이다. 그러나 “호세 씨 진짜 웃긴다~꺄하하하하”라고 귀엽게 호응해 준 새벽(윤아)이의 속마음은 사실 “진짜 웃긴다. 소녀시대 앞에서 원더걸스 춤을 추다니…’가 아니었을까.
SBS <타짜>에서 부산 하우스 앞 ‘다찌’들은 동네 주먹인 영민(김민준, 33세)의 격한 한 마디에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영민이 주먹을 들이민 것도 “안 비키면 죽는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도 아니다. 단지 “왜? 여기도 미성년자라서 안 되나?”라고 물어봤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액면으로는 이립(而立)을 넘어 불혹(不惑)을 앞둔 걸로 보이는 KBS <대왕세종> 양녕대군(박상민, 39세)은 “소자 나이 이제 약관(弱冠)”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때 태종이 느낀 분노만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충녕대군(김상경, 37세)이 형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자신이 형보다 세 살 어리다는 사실을 아버지 앞에서 굳이 밝히지 않은 덕이진 않을까. 때로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발언은 조로(早老)한 당사자가 아닌 옆에서 나올 때도 있다. KBS <바람의 나라>에서 혜압(오윤아, 29세)은 자신이 키운 지 ‘십 수 년’만에 아무리 어리게 봐줘도 동년배 급의 외모를 가지게 된 무휼(송일국, 38세)에 대해 “그 아인…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니, 몹쓸 개그본능은 예능에만 있는 게 아닌가 보다.
KBS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지오(현빈)는 철이(판유걸)의 드라마를 위해 가짜 소주병 라벨을 대량 만들어야했다. 진짜 소주병의 상표가 노출되면 안 된다는 방송법 때문이었다. 이런 경우를 제외한다면 드라마에 등장하는 소품은 가능하면 진짜, 최소한 진짜라고 믿어줄 정도는 되어야 한다. SBS <일지매>에 등장했던 부탄가스나 전봇대는 너무나 바빴던 제작진의 실수라고 치자. KBS <쾌도 홍길동>의 시공을 초월한 의상과 소지품들은 애교스러운 설정의 재미라고 해 두자. KBS <전설의 고향> ‘구미호’에서 논란이 된 여우 꼬리는 CG라는 사실이 뚜렷하도록 어색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제작진이 고군분투한 결과라고 생각하면 너그럽게 봐 넘길 수도 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경마장에서, 하다못해 광화문 길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말이 가짜라는 사실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렵다. KBS <최강칠우>에 등장한 ‘가짜 말’은 “다양한 앵글의 촬영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전격 도입되었으며, 그 대여료만 1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미숙한 시선처리와 어색한 표정연기로 몸값을 해내기는커녕 시청자들의 놀림감이 될 뿐이었다. 하긴, 물 건너온 말로서는 큰 돈 받고 제 값 못 하는 것이 한국 드라마의 트렌드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가짜 말에게 돌을 던지랴.
‘발연기’는 이제 스타니스랍스키 시스템 이후 가장 널리 인용되고 있는 연기의 갈래가 되었다. 축구도 아니고 세팍타크로도 아니건만, ‘발로 하듯 무성의하고 서툴기 짝이 없는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들의 등장은 올해도 어김이 없었다. 그 중에서도 MBC <에덴의 동쪽>에서 독일 장군을 연상케 하는 딱딱한 말투로 모든 대사를 처리하며 한결같은 표정으로 일관한 이연희는 자칭 “어리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외모에도 불구하고 희대의 발연기로 많은 시청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스타일리쉬한 명품 발연기를 선보인 <너는 내운명>의 박재정은 KBS 일일드라마 남자주인공들을 통해 면면히 이어진 발연기계의 순수혈통으로서 맹활약했다. <별난남자 별난여자>의 고주원에서 시작된 이 계보는 <열아홉 순정>에서 서지석을 만나 ‘발실장’이라는 캐릭터를 만듦으로서 정착되었다. 이후 <하늘만큼 땅만큼>에서 잠시 주춤하나 싶던 발연기의 불꽃은 <미우나 고우나>에서 조동혁의 나선재를 통해 아직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알리더니 드디어 장호세로 인해 만개하게 된 것이다. 통역이 필요한 이국적인 발음, 넘어지고 달리는 것조차 어색한 특유의 분위기는 기업의 마케팅 팀장이나 되는 어른이 제 머리에 꿀밤을 먹이고, 어린이용 천사 날개를 어깨에 끼고 노래를 부르는 망측한 대본과 묘한 앙상블을 이루며 시청자들을 사로잡았고, 사람들은 그를 ‘발호세’ 혹은 ‘호세 레저’로 부르며 그의 연기 엑기스를 모아 완결판을 제작할 만큼 관심과 애정을 보냈다. 냉혈한은 ‘냐냐냥’이라고 발음하고, ‘붕가’하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아내를 ‘새벼씨’, ‘새볏띠’로 부르는 그를 KBS
<개그 콘서트> ‘할매가 뿔났다’의 할매(장동민)가 본다면 분명 한 말씀 하실 것 같지 않은가. “호세 고거! 나, 웃다가 죽으라고! 나 죽으면 빠진 배꼽 가져가려고!”
나비가 나인지, 내가 나비인지 모르는 것은 장자 한사람으로 족하다. MBC <스포트라이트>는 촛불 시위 현장을 드라마 예고에 그대로 삽입해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를 지우며 ‘리얼리티’를 얻고자 했다. 그러나 포부와 달리 촛불 시위는 ‘언급’에 그쳤고, 이후에도 ‘뉴타운 열풍’, ‘김용철 변호사 사건’ 등을 연상시키는 에피소드들이 등장 했지만 드라마의 기본인 ‘극적인 재미’를 충분히 살리지 못한 <스포트라이트>는 결국 저조한 시청률로 막을 내렸다. 드라마에서 추구해야 할 리얼리티는 이야기 속의 상황이 갖는 논리일 뿐, 진짜 사건을 연상시키는 노골적인 힌트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드라마 밖의 사건을 차단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으니, 배우가 갑작스러운 부상을 당하게 되면 극 속의 인물은 어쩔 도리가 없다. MBC <밤이면 밤마다>를 찍던 중 넘어져 전치 3주의 부상을 당한 김선아는 급히 삽입된 입원 장면을 찍으며 ‘일하면서 즐기는 휴식’을 맛볼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SBS <바람의 화원> 촬영 중 박신양의 팔꿈치에 맞아 코뼈를 다친 문근영은 얼굴이 부어오르는 등 부상의 정도가 심해 촬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방영분을 만들지 못한 제작진은 ‘스페셜’이란 명목의 간추린 재방송을 내 보냈고, 시청자들은 다시 한 번 ‘생방송’으로 만들어지는 드라마 제작 환경이 배우와 시청자 그 어느 쪽에도 바람직하지 않음을 통감해야 했다.
MBC <겨울새>에서 윤상현이 맡았던 ‘주경우’ 캐릭터는 명문 의대 출신의 피부과 의사였다. 그러나 시청자들의 기억 속에서 그는 소파 위에 항상 두 발을 올린 채 쪼그려 앉아 엄지를 잘근잘근 씹어대는 ‘아드님’일 뿐이다. “엄만 나 없으면 안 돼”라며 아내를 버려 놓고는 옷걸이에 걸린 아내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엉엉 우는 그는 한없이 찌질했으나 많은 여성시청자들은 그에게 모성애를 느꼈다. MBC <크크섬의 비밀>에서 남자 초등학생의 심리백과와 같은 ‘윤대리’ 역을 맡은 그는 여전히 자신의 찌질함이 건재함을 과시했고, 찌질할수록 그의 인기는 높아만 갔다. 하지만 그의 라이벌은 한둘이 아니다. 부자 장모를 얻기 위해서라면 사랑하는 불륜 상대도 버릴 수 있다는 절정의 찌질함으로 승부 했던 SBS <워킹맘>의 박재성(봉태규)이나 바람피우기 콤보, 아내 구타, 솔로 패악질 등 각종 찌질함의 버라이어티를 망라한 SBS <조강지처 클럽>의 한원수(안내상), 이기적(오대규)은 물론, 최근 등장한 다크호스 찌질남이 있으니 SBS <아내의 유혹>의 정교빈(변우민)을 넘어서기는 어렵다. 아내 은재(장서희)를 바다에 빠뜨리고 도망치며 손이 떨려 운전을 못하겠으니 대리기사를 불러달라고 하는 뻔뻔함과 자다 일어나 아내의 환영을 보고 놀라 우는 나약함을 겸비한 그의 모습은 가히 찌질함의 정수라 할 만 하다. 그나저나 물에 젖은 장서희를 보고 놀라다니, 교빈씨는 MBC <인어 아가씨>도 안 봤나보다.
최지은 fiv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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