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일본의 후지산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었어요. 그 곳 주변에 있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우와. 여관의 창문으로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후지산이 내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 때 내게 뭐가 필요한지 알게 된 것 같아요. 일과 인생의 균형이나 조화라고도 할 수 있을 거 같아요. 내 일을 벗어난 세계에서 뭘 느낄 수 있는지 알게 됐죠.”

배우 한지혜는 지난해를 자신의 최고의 해라고 말했다. 단지 KBS <미우나 고우나>와 MBC <에덴의 동쪽> 등 자신이 출연한 드라마가 연이어 성공해서이기도 하지만, 연예인 한지혜가 아닌 한지혜라는 사람에게 소중한 것들을 찾았기 때문이다. <미우나 고우나>와 <에덴의 동쪽>은 배우 몇 명이 아닌 모든 출연진들의 공동의 힘으로 만들어가는 작품이었고, 이런 제작 환경은 한지혜에게 연예계 생활 동안 잊고 살았던 일과 그 외의 생활을 조화시키는 것에 대해 알게 했다. 그동안 출연했던 미니시리즈와 달리 비교적 여유 있었던 드라마 촬영 스케줄은 한지혜가 스스로 “공무원 생활하고 비슷했다”고 할 만큼 ‘주 5일 근무’를 허락했고, 그 시간들 동안 한지혜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들을 꾸준히, 차근차근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영어 회화를 꾸준히 배우고, 다른 한편으로는 밤에 차를 몰거나, 스노보드를 타며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여러 선배 연기자들과 함께 했던 <미우나 고우나>와 <에덴의 동쪽>은 한지혜에게 연기의 다양한 테크닉을 익히도록 해줬고, 그 작품들이 한지혜에게 준 시간은 인간 한지혜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고, 더 많은 세상을 알게 만들어줬다. 연예계 데뷔 후 앞만 보고 가던 생활에서, 이제는 일과 자신의 생활, 그리고 새로운 배움의 가치를 알게 된 것. 그래서, 한지혜가 ‘그의 플레이 리스트’ 테마로 선택한 것은 ‘나에게 힘을 주는 음악’들이다.




1. Corinne Bailey Rae의
“정말 음악이란 게 듣고 싶을 때 들어요.” 한지혜가 처음으로 추천한 앨범은 영국의 신세대 소울 뮤지션으로 지난 2006년 돌풍을 일으켰던 코린 베일리 래의 셀프 타이틀 앨범이다. “코린 베일리 래의 음악을 들을 때면 기분이 참 묘해져요. 목소리에 참 깊은 슬픔이 들어있는데, 그러면서도 아주 우울하지는 않거든요. 자신의 감정을 깊게 절제할 줄 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그만큼 자기 자신을 깊게 들여다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닐까요? 혼자 감정에 빠져 있을 때 이 앨범을 들으면 처음엔 제 감정에 푹 빠졌다가 점점 나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나 자신을 바라볼 여유를 찾게 돼요. 특히 ‘Like a star’의 뮤직비디오가 참 좋았어요. 그 뮤직비디오에서 노래 부르는 코린 베일리 래 사이로 그녀의 일상들이 스쳐 가거든요. 저한테 ‘Like a star’가 그런 느낌의 노래에요. 나의 일상들을 여유롭게 되돌아 볼 수 있는 느낌? 그렇게 음악을 듣다보면 몸과 마음이 평온해지게 되는 것 같아요.”



2. 에픽하이의
‘어느덧 5년이 지났고, 세상은 소란스러워졌다. 깨끗한 종이 한 장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에픽하이의 소품집 은 앨범 부클릿 첫 장에 적힌 이 문장의 느낌을 그대로 반영한 느낌이다. 아날로그 사운드가 강조된 음악 속에서 이들은 마치 다친 상처를 회복하듯 천천히, 따뜻한 느낌으로 듣는 이에게 다가선다. “이 앨범을 들을 때면 바싹 마른 땅에 천천히 물이 흘러들고, 어느 틈에 물이 차오르면서 풍요로운 땅으로 바뀌는 느낌이 들어요. 처음엔 우울한 음악일 줄 알았는데 들을수록 신나기까지 하더라구요. 꼭 마음의 상처를 받은 사람을 회복시켜주기 위한 음악 같아요. 특히 ‘1분 1초’는 정말 놀랐어요. 어떻게 사랑에 상처받은 사람의 감정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릴 수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면서도 아픈 마음만 강조하지 않고 그 과정을 지난 사람의 차분함이 보여 더 좋았구요. 이 앨범을 듣고 나서 타블로씨의 책을 사기도 했어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지더라구요.”




3. Kanye West의
카니예 웨스트는 뛰어난 래퍼이자 프로듀서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 힙합 패션을 주도하는 패셔니스타이기도 하다. 한지혜가 카니예 웨스트를 처음 알게 된 것 역시 패션 잡지에 나온 그의 모습을 통해서였다고. “카니예 웨스트의 스타일은 남성적이면서도 귀여워요. 스타일리쉬하고 카리스마적인 느낌도 있지만, 그 사이에 잔뜩 폼 잡지 않고 유머 감각을 발휘할 줄 알죠. 음악도 마찬가지에요. 힙합 음악 중에 너무 폼 잡거나 섹시한 이미지만 내세우는 곡들은 듣기 조금 부담스러운데, 그는 언제나 쿨해요. ‘Stronger’는 정말 재밌잖아요?” 하지만 한지혜는 클럽에서 카니예 웨스트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춰 본 적이 없다. 연예인이 된 이후로는 클럽에 가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 대신 한지혜는 드라이브를 하면서 그의 음악을 듣는다고. “카니예 웨스트의 음악만 있으면 드라이브를 하면서도 춤을 추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늘 저를 즐겁게 만들거든요. 기분 따라 몸을 흔들면 그게 춤 아니겠어요?”



4. Robbie Williams의
한지혜는 영국 최고의 스타 중 한 명인 로비 윌리암스의 팬이다. “로비 윌리암스는 정말 굉장한 에너지를 가졌어요. 공연을 보면 무대 위에서 많이 움직이는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이 손짓 하나, 눈빛 한 번 보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을 끌어 모으거든요. 정말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이 있어요” 한지혜가 로비 윌리암스의 특정 앨범 대신 를 추천한 것도 로비 윌리암스의 이런 애정 때문. 평소 차에서 CD로 음악을 많이 들어 ‘She`s the one’이나 ‘Supreme’ 등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한 장에 담은 가 로비 윌리암스의 노래를 듣는데 편하기 때문이다. “제가 음악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로비 윌리암스는 정말 다양한 장르에서 유니크한 매력을 전달하는 방법을 아는 것 같아요. 좀처럼 예상할 수 없어요. 그래서 촬영이 끝나고 지쳤을 때 음악을 들으면 사람의 몸을 하나씩 깨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몇 년 째 들어도 신선하다는 느낌이 드는 음악들이에요.”




5. 이영훈의
한지혜가 말한 마지막 앨범은 다소 예상 밖이었다. 바로 지난해 세상을 떠난 작곡가 故이영훈의 곡들을 리메이크한 앨범 <옛사랑>을 고른 것이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문세 선배님의 음악을 좋아했어요. 그 뒤로 이문세 선배님의 노래가 故이영훈 선생님의 작곡이라는 걸 알고 그 분의 노래를 찾게 됐어요. 그래서 이 리메이크 앨범도 듣게 됐죠.” 두 장으로 나온 [옛사랑] 앨범의 수록곡 중에서도 한지혜가 특히 인상 깊게 들었던 곡은 ‘빗속에서’. “리쌍이 힙합으로 리메이크를 했는데, 이 곡을 이런 식으로 재해석할 수도 있다는 게 신선했어요. 특히 이 노래에서 피처링을 한 알리라는 보컬리스트가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정말 빗속을 뚫고 나오는 시원한 목소리 같았어요. 그러면서도 진한 소울의 느낌이 있었구요. 얼마 전에 ‘울컥’이라는 노래도 불렀던데, 그 노래도 좋더라구요. 제가 이런 목소리를 들으면 감상에 빠지게 되나 봐요. 물론 ‘빗속에서’는 언제 들을지 아시겠죠? 하하.”


“진정성과 스타일을 함께 가진 배우를 꿈꾸다”



“스타일리쉬하면서도 진정성 있는 배우가 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5개의 앨범을 고른 뒤, 앞으로 배우로서 어떤 모습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한지혜는 이렇게 반문했다. “많이 부족하지만, 저는 정말 연기에서 진정성을 가진 배우가 되고 싶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배우들이 스타일리쉬하거나, 트렌드를 잘 소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더라구요. 반대로 스타일리쉬한 배우들은 연기의 진정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구요. 하지만 저는 연기도 정말 잘하고 싶지만 멋진 스타일도 함께 가지고 싶어요. 너무 꿈이 큰 건가요?” 진정성과 스타일을 함께 가진 배우. 혹은 ‘연기 잘하는 배우’와 이른바 ‘패셔니스타’로 불리는 연예인의 모습을 모두 갖겠다는 꿈. 배우의 생활과 20대 여성의 인생을 함께 살게 했던 2008년의 기억은 한지혜에게 이런 균형의 즐거움을 배우게 한 것 같다. 즐기면서 일하되 정말 연기 잘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한지혜. 그녀가 반복되는 연기 생활과 그 뒤의 여유 속에서 조금씩 자신이 꿈꾸는 ‘한지혜’의 모습에 다가설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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