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도 어느덧 40대 중반이다. 90년대 후반 호기롭게 당도한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던 ‘충무로의 젊은 피’는 그로부터 10여 년 후, 위기의 한국영화계를 살릴 구원투수의 백넘버를 달고 세계 그라운드 위에 서 있다. 작년 최고의 히트작이었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에게 ‘잘 만든 장르영화’, ‘장사 잘한 흥행영화’ 이상의 무거운 책임이 부여된 것 역시 이런 연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지운은 ‘국민 감독’의 무게에 짓눌려 조로하거나 박제된 거장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영화라는 놀잇감을 해체하고 조립하고, 그 놀이터를 확장시키는데 매료된 영화의 플레이어다.

데뷔작 <조용한 가족>부터 <반칙왕>, <장화, 홍련>, <달콤한 인생>, <놈놈놈>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10년이 넘는 시간을 나타내는 세월의 나이테가 아니라, 끊임없는 영화적 실험을 증명하는 취향과 관심의 역동적 그래프다. 하지만 철옹성 같은 감각의 제국에 살고 있는 그에게도 자신의 감각이 뭉툭해지는 순간에 대한 공포는 호환마마보다 더 무섭게 찾아오는 모양이다. 눈 옆의 주름살보다 감각의 무뎌짐을 더욱 두려워한다는 감독 김지운. 다음 5편의 영화는, 김지운 감독이 무뎌진 당신의 오감에 내미는 감각의 숫돌들이다. 갈아라. 그리고 2009년을 향해 힘껏 찔러라.

1. <노스텔지아>(Nostalgia)
1983년 │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정서적으로 메말랐다는 생각이 들 때 늘 <노스텔지아>나 <거울>같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를 꺼내 들어요. 귓가에 스치는 바람의 이미지들,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와 그 흐름들. 그리고 그 풍경에 맞먹는 듯 한 배우들의 깊은 표정과 내밀한 움직임이라니. 그 영화들은 마치 이 소리를 좀 들어보라고, 이 흐름들을 고요히 지켜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거든요. 한동안 혼탁해진 감각들이 정화되는 느낌, 영화에 대한 근본적인 향수를 더듬어가는 느낌. 이미지를 통해 결국 정서적인 확장의 경지에 다다르게 만드는, 숭고해지는 기분이 드는 그런 영화예요.”

타국을 떠돌다 향수를 이기지 못하고 어머니의 땅으로 귀환해 노예의 삶을 선택한 러시아 작곡가와 몇 세기 후 그의 삶을 쫓는 시인. 근원으로부터 유배된 자들만이 느끼는 통한과 향수를 숨 막힐 듯 아름다운 풍경화 속에 그려 넣은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대표작.

2.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No Country For Old Men)
2007년 │ 감독 에단 코엔, 조엘 코엔

“장르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상태, 장르의 장인들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경지예요. 마치 솜씨 좋은 정형사가 고기에 붙은 깻잎 한 장 같이 얇은 기름 막을 발라내는 과정을 긴장감 넘치게 지켜보는 느낌이 든 달까. 정교함과 묵직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한 장면 한 장면에 늘 경탄해요. 표피에 머무는 표현, 부풀려진 감각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정수와 핵심으로만 이루어진 냉혹하고 냉정한 거장의 솜씨.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자극 받고 교육되는 기분이 들 정도예요.”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이 원작. 미국 텍사스, 한 차례 총격이 지나간 이곳에서 한 남자가 이백만 달러가 든 돈가방을 줍게 되고 이후 돈을 쫓는 청부살인업자와 보안관을 둘러싼 무언의 추격이 시작된다. <파고>의 서늘한 긴장감을 그리워해온 코엔 형제의 오랜 팬이라면 절대로 거부 할 수 없는 핏빛 초대장. 고요한 공포감과 함께 문제적 단발머리를 찰랑거리는 하비에르 바르뎀의 위대한 연기 역시 이 영화의 백미다.

3. <브릭>(Brick)
2005년 │ 감독 라이언 존슨

“신.선.하.다. 라는 생각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요.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느와르적 무게감과 긴장감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죠. 21세기 판 <밀러스 크로싱>이 탄생했다고나 할까. 느와르의 모든 법칙과 요소들을 묵직하게 활용하면서도 결코 경쾌함을 잃지 않더라고요. 특히 상처받기 쉬운 눈빛을 지닌 주인공 브랜든(조셉 고든-레빗)의 마지막 순간까지 전진해 나가는 연기가 인상적이었어요. 장면전환, 이야기 전개, 배우와 소재를 엮어나가는 솜씨까지, 젊고 재기가 넘치는 동시에 어느 한 순간도 격을 잃지 않는 영화, 선도 높은 하이틴 느와르예요.”

여자 친구가 사라졌다. ‘브릭’이라는 암호 같은 단어에 도움을 구하는 통화를 마지막으로. 결국 며칠 후 변사체가 되어 발견된 여자 친구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브랜든은 그녀의 주변을 뒤쫓기 시작한다. 2005년 선댄스 페스티벌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

4. ‘Director’s Label’ 조나단 글레이저 편

2005년 │ 감독 닉 케이브, 조나단 글레이저

“<섹시 비스트>나 <버스> 등 그의 장편도 좋아하지만 라디오헤드, 자미로콰이의 걸출한 뮤직비디오나 감각적인 리바이스 CF, 역동적인 기네스 CF들을 보고 있으면 조나단 글레이저를 현존하는 최고의 비주얼리스트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어져요. 그의 작품들은 때론 강렬한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을 전달 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거든요. 동시대 비주얼 작업이 어느 수준에 다다랐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을 때 이만한 바로미터가 없죠”

스파이크 존스, 미셀 공드리 등 당대 비주얼리스트들의 작품들을 모은 PALM의 ‘Director’s Label’ 중 하나인 조나단 글레이저의 작품 모음집. 드니 라방의 신들린 연기를 엿볼 수 있는 U.N.K.L.E.의 뮤직비디오, 말과 서퍼들의 격렬한 넘실거림을 담은 기네스 CF까지, 눈이 즐거워지는 비주얼 종합선물세트.

5. <쓰리 타임즈>(Best Of Our Times)
2005년 │ 감독 허우 샤오시엔

“첫 번째 에피소드인 ‘연애몽’을 좋아해요. 휴대폰 같은 21세기 문명과 함께 사라져버린 아슬아슬한 엇갈림, 편지를 쓰고 보내고 기다리며 느끼던 설렘. 이제는 더 이상 우리 곁에 존재하지 않는 그 시절의 아스라함을 어쩌면 그렇게도 싱그럽게도 표현했는지. 특히 테마 곡 The Platters의 ‘Smoke Gets in Your Eyes’가 흐르던 장면은 격조 높은 광고영상을 보는 듯 사랑스러웠어요. 다시 못 느낄 아련한 정서적인 감각들을 일깨워준 영화였죠.”

서기와 장첸, 사랑과 기억이라는 베틀 위에 1966년, 1911년, 2005년이라는 3개의 시간들(쓰리타임즈)과 연애몽, 자유몽, 청춘몽이라는 3개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짜 내려간다. 허우 샤오시엔 감독.

“좀 더 내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지난 2008년은 누가 뭐라 해도 김지운의 해였다. 가뭄이 이어지던 대한민국 영화판에 <놈놈놈>이 선사한 온갖 신드롬과 결과적인 수치는 말 할 것도 없거니와, 김지운 감독에게 쏟아진 해외시장의 러브 콜은 결국 프랑스 감독 클로드 소테의 1971년 작 <맥스 앤드 정크맨>의 리메이크로 이어졌다. 현재 “한 달에 5건 정도 들어오는 해외 시나리오를 검토 중”이라는 그의 2009년 소망은, 그러나 엉뚱하게도 “국내에서 작은 영화를 찍고 싶다”는 것이다. “<놈놈놈>을 끝내고 보니 좀 더 내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지더라고요.”

사실 김지운은 ‘핫’보다는 ‘쿨’에, ‘느림’보다는 ‘스피드’에, ‘둔함’보다는 ‘예민함’의 세계에 속했던 감독이다. 하지만 “뒤늦게 술 맛을 알아서 예전에는 의식적으로 피하던 술자리를 요즘엔 마다하지 않고 찾는다”는 그의 고백을 듣고 있자니 김지운 감독이 만들어낼 다음 작품의 형태가 어렴풋이 그려지는 기분이다. 긴장 속에 이완을 품은, 작지만 내밀한, 그리고 2도 씨 더 뜨거운. 그의 영화도, 아니 2009년 우리 삶도 그러하기를. 해피 뉴 이어.

글. 백은하 (one@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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