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그들이 사는 세상>이 끝났다. 그렇게 드라마는 끝났지만 삶은 무기력하게도 계속된다. 준영도 지오도 어디선가 계속해서 그들의 세상을 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는 드라마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당신은 앞으로 허구가 아닌 이 진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나갈 것인가. 주인공 한두 명에만 집중되지 않는 다각적 구성, 몰입을 방해하는 객관적인 내레이션의 빈번한 등장. 어쩌면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가는 이 높디높은 허들은 노희경 작가, 그녀 스스로가 세운 것일지도 모른다. 노희경은 여전히 달리고 있다. 더 높은 곳을 향해 뛰고 있다. 때론 살아있는 운동 에너지가 그 어떤 박제된 기록 보다 중요하다.

대본을 모두 완성한 채로 방영을 시작했다. 하지만 종영 날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었을 것 같다.
노희경
: 시청률 때문에 사기 떨어지거나 팀워크가 무너질까 걱정했는데 송혜교랑 현빈은 내가 업고 다녀도 모자랄 만큼 잘 해 줬다. 감독과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청률 50%는 나온 애들처럼 신나서 촬영했는데 그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 순간 괴로워해서 시청률이 나아지면 모르겠지만 당시 필요했던 건 그냥 앞으로 가는 거였다. 탄식할 시간도 반성할 시간도 없이 하루하루 찍으면서 간 거다. 그저 모두 한 마음으로 여기까지 온 게 감사할 뿐이다.

“혹시 우리가 가르치려고 한 건 아니었을까, 너무 위로하려고만 하지 않았나”

내레이션이 갖는 효과는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가 직접화법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시원하게 할 수 있는 면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드라마와 시청자의 거리두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노희경
: 사실 내레이션이라는 도구가 잘못 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너무 어렵고 사유적이었던 것이 문제였다. KBS <꽃보다 아름다워>에서도 내레이션을 썼지만 이런 문제는 없었다. 가족은 모두의 공통된 고민거리니까. 다 끝내놓고 보니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가라는 생각을 했다. 그걸 뒤늦게 알다니. 쓸 때는 의사나 법관이나 드라마감독이나 작가나 각자의 직업을 통해 보편적인 삶의 고민이 연결될 꺼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 다음에는 연애이야기를 할 꺼다. 우리가 모두 같이 고민하는 이야기를. (웃음)

어느 순간부터 노희경의 드라마를 보면 편안하고 따뜻하긴 한데 그 때문에 긴장감이 사라진 느낌이다. 늘 위로해주고 모든 것을 받아 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난 것 같은 기분, 애인보다는 엄마 같은 드라마. 그것이 시청률에 미치는 영향도 있지 않았을까?
노희경
: 안 그래도 마지막 회를 보고 나서 표 감독과 그런 얘기를 했다. 혹시 우리가 가르치려고 한 건 아니었을까, 너무 위로하려고만 하지 않았나. 하지만 나 역시 이 작품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다. 그 어떤 제작사와 방송사 관계자가 괜찮다고, 그냥 생긴 대로 살라고 얘기해줄 수 있을까. 그저 우리 팀들이 이 작품을 끝내고 일거리가 안 떨어진 게 다행스럽다. (웃음) 이제는 내가 반성할 시간이다. 긴장감이 떨어지는 부분, 내가 나도 모르게 시청자를 가르쳤던 부분이 무엇인지를 직시하는 시간을 지금부터 가질 꺼다.

사실 그 다독임과 가르침이 싫었던 건 아니다. 이 시대는 오히려 누구도 가르치려고 들지 않으니까. 하지만 확실히 미안한 마음이 덜 들었던 건 사실이다. 굳이 ‘본방’을 사수하지 않아도, 내일 다운로드를 받아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 꼭 오늘 전화하지 않아도 이 사람이랑 끝날 것 같지는 않은 연애랄까.
노희경
: 그래서 다음부터는 1에서 100까지 다 안 보여주고 80에서 끝내고 남은 20은 다음 회로 넘겨서 긴장감을 주는 구성을 연구할 생각이다. 그리고 좀 더 친절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조 작가들이 처음에 대본이 좀 어렵다는 말을 했다. ‘단막’이 뭐고 ‘프로듀서’의 역할이 뭔지 모르겠다는 거다. 나중에야 알았다. 남들이 모를 때 자막이라도 넣어주고 설명을 했어야 한다는 걸. (웃음) 4천만을 데리고 설명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걸 빨리 알아채고 브레이크를 걸었어야 했는데. 내가 이렇게 멍청하고 귓구멍이 막힌 사람이다 (웃음) “배우겠습니다. 오직 배우겠습니다”라는 말을 4년 동안 가지고 왔는데, 다음번에는 “내가 미련한 줄 알자”라는 말을 가슴에 품고 갈 꺼다.

초기작들을 보면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기운이 느껴지는데, 갈수록 그 모든 것에 달관해가는 느낌이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당연한 결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어떤 시청자들은 예전 같은 느낌을 그리워하더라.
노희경
: 날이 서서 치열했던 과거의 시간이 있었던 건 다행이지만 그 당시 나는 너무 힘들었다. 살고 싶을 때보다 죽고 싶은 때가 많았으니까. 현재도 내가 고쳐야 될 점과 만족하는 부분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괴로워하고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내 드라마는 훨씬 더 일차원적으로, 감정에 충실 하는 쪽으로 갈 것 같다”

“자지는 마”라고 말하던 KBS <거짓말>을 비롯해 예전 작품들을 돌이켜 보면 관계에 있어 몸보다는 말로 다가가는 부분이 많았던 것 같은데 <그들이 사는 세상>은 말보다는 몸으로 다가가는 느낌이다. 지오가 준영에게 화해를 청하는 방식도 어떤 이들에게는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키스로 섹스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방식 말이다.
노희경
: 그건 어쩌면 관찰을 통한 결과 같다. 아이들을 보면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안겨서 울어버리면 끝난다. 그냥 손 한 번 잡으면 끝난다. 내가 연애를 할 때도 그랬다. 물론 그렇게 쉽게 가는 걸 인정하기가 싫은 젊은 시절이 있었다. 모든 걸 머릿속에서 정리하려 했고 합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인생은 정리되지 않는 혼돈 속에 있는 것 같다. 몸으로 해결하면 다냐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몸이 다는 아니다. 하지만 몸은 빠르다. 앞으로도 그렇게 쓸 것 같다. 솔직해지는 게 겁나지는 않는다.

어떻게 보면 마초적인 해결책일 수도 있는데 너무 솔직해진 건 아닐까.
노희경
: 스물 몇 살, 서른 몇 살의 젊은 사람들이 좀 마초적이면 어떤가. 그게 오히려 재미있는 거다. 괜히 우아한 척 하면 짜증난다. 지금 조카들과 같이 살고 있는데 애들한테 “고모가 인생을 더 살아서 아는데..” 이렇게 말하면 애들이 싫어한다. 그냥 “고모 짜증났어”라고 말하면 긴장한다. 앞으로도 내 드라마는 훨씬 더 일차원적으로, 감정에 충실 하는 쪽으로 갈 것 같다.

지난 10여 년을 되돌아봤을 때 노희경이라는 사람이 처한 환경적 변화들이 있었다. <거짓말>을 쓸 때는 철저하게 혼자였고, <꽃보다 아름다워>를 쓰고 오랫동안 멀리했던 아버지와 화해했고, KBS <굿바이 솔로>를 끝내고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지금은 오빠 언니들의 조카들과 대가족을 이뤄 살게 되었다. 이런 환경적인 변화가 작가로서 사는 데 있어 어떤 변화로 다가왔나.
노희경
: 작가로서 나만큼 복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끊임없이 쓸 거리를 주니까. (웃음)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가난이 나를 사유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 같다. 그리고 혼자 살던 <거짓말> 때는 오롯이 ‘내가 보는 것’만 중요했던 시간이었다. 그 때 성실함을 배웠다. 24시간 동안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글을 쓸 수 있었던 시간, 정열과 객기를 그 때 알았다. 이후 KBS <고독>이 망한 뒤로는 나를 돌아보고 명상을 좋아하게 됐다. 그리고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조카들과 함께 살며 아홉 식구가 됐다. 그 파란만장한 시간이 좋기만 했겠나.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웠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커서 지금처럼 사랑한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서로 할 수 있는 사이가 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앞으로 우리가 늙어가고 병이 들면 또 다른 문제들이 생겨나겠지만 그 과정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진 것 같다. 넓어지고 싶어서 넓어진 게 아니라 강제로 넓혀진 거지. 이해 안 하면 못사니까. 조카들 때문에 학교에도 불려가고, 다른 학부모들 앞에서 무릎 꿇고 하는 과정에서 아이들을 이해하는 힘도 생기고 내 청춘을 돌이켜보게 된 거다. 우리 엄마도 나 때문에 학교 많이 불려가셨다. (웃음) 또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화해한 게, 내 마음 속에 엄청난 자신감을 주었다. 그렇게 미워하던 아버지랑도 화해했는데 어지간히 미운 사람은 미운 것도 아니다. 글쓰기 힘들고 시청률 안 나오는 건 장난이다. (웃음) 앞으로는 청소년 드라마, 가족 드라마도 더 잘 쓸 수 있을 것 같다.

구성에 기대어 작가 개인은 뒤로 숨는 방식의 글쓰기도 있겠지만 노작가는 언제나 본인의 현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드라마를 써왔다.
노희경
: 예전에 어른들이 작가가 자기 얘길 쓰기 시작하면 그 인생 끝이라는 얘기를 하셨다. 그래서 나도 겁을 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도 그렇고 MBC <내가 사는 이유>가 끝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 너는 쓸 게 없을 거라고 했다. 엄마 얘기 하고 가족 얘기 다 했으니까. 그런데 끊임없이 내 인생에 사고가 일어나더라. (웃음) 그런 자기반영적 글쓰기가 때론 힘들긴 하다. 하지만 결국 내가 풀어야 할 숙제들을 드라마를 통해 푸는 거다. 안 그랬으면 드라마 따로 내 인생 따로 고민해야 했을 테니까. 체력이 안 되니까 합쳐놓은 거다.

그렇다 보니 작품에 대한 공격이 작가에 대한 공격이 되는 경우가 있다. 시청률이나 수익의 문제도 그렇고.
노희경
: 이번에 좀 심한 말도 들었다. “남의 돈 가지고 장사를 그 따위로 하면 되냐”는 거다. 그 부분은 조금 억울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손익분기점은 맞춘 드라마다. 만약 이 작품 때문에 제작사가 큰 손실을 봤다면 정말 다른 고민을 하겠지. 대본을 빨리 쓰는 건 제작비를 줄이기 위한 이유가 컸다. 만약 손익분기점을 못 맞춘다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소멸 될 꺼다. 대중예술을 하면서 개인적인 평이 따라붙는 건 당연하다. 욕 듣는 게 마음이 안 아픈 건 아니지만 모두를 다 만족시킬 수는 없다. 고민은 한다. 묵과하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악평에 무너지지는 않는다. 대신 거기에서 숙제를 찾는다. 큰 깨달음을 얻은 건, 북한 돕기를 하면서다. 봉사를 안 하면 욕을 안 먹는다. 그런데 봉사를 하면 욕을 먹는다. “잘난 척 한다, 글이나 쓰지, 생색내지 마라” 등 봉사해본 사람들은 다 느낀다. 특히 배우들 같은 경우에는 심하게 욕먹는다. 어떤 분이 나에게 이런 말을 하더라. “착한 일 할 때는 욕먹을 각오를 해야 한다. 칭찬받으려고 하는 게 무슨 착한 일이냐 생색이지. 그것 때문에 네가 그걸 멈춘다면 이미 네 마음속에 생색이 더 크다는 거다”라고. 예수님도 부처님도 소크라테스도 다 욕 먹고 죽었는데 내가 뭐라고 욕을 안 먹겠나. <고독>으로 욕을 먹었을 때는 뒤통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늘 칭찬만 듣겠나. 나도 남의 드라마 보면 100% 맘에 드는 거 아니다. 비평들이 나에게 숙제거리를 남겨줄 거고 그 숙제가 사라지는 날 내 글은 가치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

“옛날에는 글이 나의 전부였지만 지금 나는 행복하게 사는 게 전부”

다음 작품의 윤곽은 좀 잡혔나?
노희경
: 이미 캐릭터들도 잡았고 제목도 정했다. <그 뻔한 여자 남자 여자>. 취재도 슬슬 시작했고. 이렇게 빨리 다음 작품을 쓰기 시작한 건 처음이다. <그들이 사는 세상>을 통해 느낀 젊은 연기자들의 가능성, 나이든 연기자들에 대한 재발견이 나에게 투지를 갖게 한다. 대본을 좀 더 미리 쓰면 좀 더 좋은 신인들을 만나고 연기자들의 풀을 좀 더 넓힐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빈한테 그런 말을 했는데, 스물일곱 된 당신이 그런 자세로 일하는 걸 보면 3년 뒤 우리나라 드라마의 미래도 밝을 거라고. 송혜교도 진짜 멋있다. 표감독은 “내가 종지면 이 어린 배우들은 세숫대야만큼 넓다”라는 말도 했는데 공감한다.

얼마 전 낸 산문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가 베스트셀러로 올랐더라.
노희경
: 북한 돕기를 하면서 도움 주신 출판사가 있어서 책을 내게 된 거다. 수익금도 일부 그 쪽으로 다시 돌아간다. 책은 다른 누구보다 우리 조카들을 위해 쓰고 싶었다. 얼마 전 큰 조카가 스무 살이 되면서 독립을 했고 둘째는 올해에 독립을 하는데 그 아이들이 집을 나가는 시점에 이 책이 나와서 참 좋았다.

책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의 얘기, 평생 사이가 나빴던 아버지와 화해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가족에 대한 아픈 기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꺼내놓기 힘든 내용이라 읽다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 위로가 된다.
노희경
: 알기만 해도 좀 편해지는 게 있으니까. 내 아픔만 가지고 오롯이 끙끙대면서 남이 아픈 걸 머리로만 알고 있다가 다른 사람들과 그런 얘기를 하다 보면 참 어리석은 방법의 위안인데도 위안이 된다. “어머, 너도 그랬어?”하면서. 물론 그게 안 되고 “얘네 집 콩가루네”해도 어쩔 수는 없지만. (웃음)

<그들이 사는 세상>을 통해 지오나 준영에게 했던 질문대로, 드라마는 당신에게 무엇일까.
노희경
: <거짓말> 때만 해도 글을 위해 드라마를 위해 난 목숨도 바칠 수 있었다. 그땐 내 인생의 전부가 드라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내 인생의 전부는 나다. 내가 웃고 사는 것, 내 가족과 친구들이 행복한 게 중요하다. 옛날에는 작가 노희경이 이 세상의 한 획을 긋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은 내 드라마가 가까운 사람들이라도 만족시킬 수 있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얼마 전에 조카 하나가 “이모처럼 멘토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어른이 다른 친구들에게도 있으면 좋겠어”라는 얘기를 해서 참 기분이 좋았다. 차마 “내가 너의 멘토니?”라는 말은 못 물어봤지만. (웃음) 옛날에는 글이 나의 전부라고 충분히 얘기할 수 있었지만 지금 나는 행복하게 사는 게 전부고, 옛날에는 작가로서의 내가 남기를 바랐지만 지금은 주변 사람들이 나 때문에 조금 편했다고 하면, 재미있었다고 하면 좋겠다.

글. 백은하 (one@10asia.co.kr)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사진. 이원우 (four@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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