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일이다. 어떤 가수는 노래 못 해도 TV에 나오고, 어떤 배우는 연기 못 해도 TV에 나온다. 못 하는 기간이 길어도 계속 나올 수 있다. 가끔은 인기도 누린다. 그런데 개그맨은 웃기지 못하면 TV에 못 나온다. 운이 좋아 잠깐 얼굴을 비추더라도 곧 사라진다. 웃기지 못하는 개그맨이 인기를 얻는 건 더더욱 힘들다. 아무리 잘 생겨도, 아무리 예뻐도 웃기지 못하면 끝이다. 한 코너로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해도 다음 코너에서 또 웃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개그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그 어떤 분야보다 냉정하다. 그래서 한 해 사이에도 TV에서는 수많은 개그맨들이 뜨고 지고, 이들은 항상 아이디어 고갈과 코너 종료에 대한 불안에 시달린다.

사회면 전담 개그맨의 탄생

KBS <개그 콘서트>(이하 <개콘>)의 황현희를 주목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황현희는 올해 ‘많이 컸네 황회장’(이하 ‘황회장’)과 ‘황현희 PD의 소비자 고발’(이하 ‘소비자 고발’)을 차례로 히트시키며 개그 침체의 시대에도 유일하게 건재한 <개콘>의 중흥기를 든든히 뒷받침하고 있다. ‘황회장’이 캐릭터를 살린 콩트라면 ‘소비자 고발’은 KBS <이영돈 PD의 소비자 고발>을 정면으로 패러디하고서도 “우린 MBC <불만제로>를 패러디했다”고 한 방 먹이는 코너다. 회장이라는 권위에 기대고 있지만 허풍과 허세를 걷어내고 나면 “너 얼마 전에 떡볶이 먹다가 마지막 하나 남은 거 몰래 빨리 먹으려고 들었는데 대파였지? 그거 누가 그랬을까? 누가 그렇게 떡처럼 해놨을까, 그 허연 대파를!”이라며 깐죽대거나 “이번에 중국 쪽 펀드 다 내 꺼니까 투자할 생각 하지 마! 내꺼, 내꺼, 내꺼, 퉤퉤퉤!”라며 치사스럽게 구는 황회장과, “아무리 먹어도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지 않는 시리얼”에 문제를 제기하고 “계란이 들어있으면 계란맛 과자, 양파가 들어있으면 양파맛 과자인데 그럼 ‘엄마손 파이’는 뭐냐”며 예리하게 지적하는 황현희 PD는 태연한 얼굴로 궤변을 늘어놓는 황현희식 개그의 첨단을 보여준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경찰 공무원 시험을 포함해 공무원 시험에만 네 번이나 응시했던 전적도 재미있지만 KBS 19기 공채로 데뷔해 5년차에 접어드는 황현희의 개그는 그동안 줄곧 신문으로 치면 사회면을 전담해왔다. 형법 수업의 모의 법정 실습 경험으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어 “조사하면 다 나와!”를 유행시킨 ‘범죄의 재구성’의 검사 캐릭터와, 평소 즐겨 보는 프로그램인 MBC <100분 토론>의 손석희를 모델로 삼은 ‘집중토론’의 냉철한 사회자가 대표적이다. ‘소비자 고발’의 황PD가 “밀가루 값은 떨어지고 있는데 라면 값은 안 떨어지고, 국제유가는 떨어지는데 기름 값은 떨어지지 않는” 현실을 “왜 출산율은 떨어지는데 숙박비는 떨어지지 않고, 시력은 떨어지는데 안경 값은 떨어지지 않냐”며 비트는 센스 역시 매일 서너 가지의 일간지를 챙겨 보고 한 시사주간지의 홍보 대사로 활동할 만큼 사회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개그다.

“난 아직 답답한 현실에 대해 한 번 질러주는 정도?”

유세윤, 강유미, 안상태, 장동민 등 유독 화려한 면면의 동기들 사이에서 황현희가 별다른 기복 없이 활동해올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을 웃기려면 많이 알고, 계속 공부해야 한다”는 그의 믿음 덕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동안 딱 떨어지는 수트를 차려입은 채 ‘망가지지 않고 웃기면서도 똑똑한 남자’라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구축해 온 황현희는 이제 십여 개의 라디오 코너를 진행하고 버라이어티 MC의 영역을 자연스레 넘나든다. 시사 풍자 개그의 선구자이자 “마이크 하나만 들고 세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사람들을 웃겼던” 故 김형곤과 ‘신사’ 개그맨 주병진이 그가 가장 닮고 싶어 하는 선배들이다.

그래서 ‘낙하산’이 의심되는 여성 캐릭터를 향해 황회장의 입을 빌어 “PD 딸이야, KBS 사장 딸이야?”라고 일갈하면서도 그는 자신의 역할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조심스럽다. “지금 내 개그는 시사라기보다는 문제 제기일 뿐이다. 사회 문제를 얘기하면 바로 채널이 돌아가는 시대에 나는 그냥 스피커 역할이다. 답답한 현실에 대해 한 번 질러주면 사람들이 속 시원해 하는 정도?” 그러나 단순한 웃음 이상을 기대하지 않고 <개콘>을 보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영역 밖’의 황현희식 개그는 우리에게 폭소를 넘어선 희열을 안긴다. 그리고 개그를 위해 단계별 전략을 짜고 세상을 예습 복습하는 이 독특한 개그맨의 세계가 어디까지 넓혀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단지 그 심오한 의미를 얼른 따라잡지 못하는 관객에게는 회장님의 짧지만 우아한 책망이 뒤따를 것 같아 두려워진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글. 최지은 (five@10asia.co.kr)
편집. 이지혜 (seven@10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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