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나는 유년기를 책으로 보냈다. 몸으로 노는 것보다 말로, 글로 노는 것이 즐거웠다. 책 읽기는 나에게 놀이였다. 중학생이 되고 사춘기에 접어들어선 동화를 접고 소설의 세계에 발걸음했다. 종례가 끝나면 학교 도서관으로 쏜살같이 달려갔고, 학교 앞 문구점에서 팔던 손바닥만한 ‘삼중당 문고판’을 사기도 했다.
삼중당 문고의 책들 중에는 제목에 한자가 듬성듬성 박혀 있는 것도 있었다. 한자가 서툴러서 제목을 온전하게 읽지 못하는 순간도 있었다. 어느 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발견했다. 우선 한자가 들이밀 자리가 없는,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는 제목이라서 좋았다. 그리고 책 속에 푹 빠져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다시 첫 페이지가 읽고 싶어졌다. 마지막 문장에 도돌이표라도 표기된 것 마냥 읽고 또 읽고···. 그렇게 열네댓 번을 거듭 읽었다. 열다섯의 나는 ‘데미안’을 지극히 사랑했다.
1990년대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데브니(캐서린 워터스턴 분)는 맏아들 이안(루카스 헤지스 분)의 나이인 열여덟에 엄마가 되었다. 싱글맘인 그녀는 이안과 달리 13살 막내 스티비(서니 설직 분)가 한없이 어리게만 느껴진다. 동생 스티비에게 툭하면 주먹질 하는 이안은 외출하면서 으름장을 놓는다. “내 방 들어가면 죽는다.” 허나 스티비는 형의 부재를 틈타 슬금슬금 방으로 향한다. 마치 샵처럼 정리된 CD, 모자 등 형의 물건을 하나하나 새기듯 눈에 담는다.
요사이 스티비를 사로잡는 대상은 스케이드보드다. 멋들어지게 보드를 타는 동네 형들을 동경하는 스티비는 형들의 아지트인 스케이트보드 숍을 기웃거린다. 보는 이도 들썩이게 할 만큼 근사하게 보드를 타는 레이(나켈 스미스 분), 끝내주는 기술을 보면 입버릇처럼 “존나 쩌네!”라고 하는 파티광 존나네(올란 프레나트 분), 언젠가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항상 카메라와 동행하지만 머리가 4학년 수준인 4학년(라이더 맥로플린 분), 자신은 쩔지만 스티비에게 넌 멀었다고 으스대는 루벤(지오 갈리시아 분)은 스티비를 무리에 끼워 준다. ‘땡볕’이라는 별명과 함께.
형들과 어울리는 스티비는 처음 해보는 것들이 많아진다. 부모 없이 다른 사람의 차도 타보고, 지붕에서 서툰 솜씨로 알리(스케이트보드와 함께 뛰어오르는 기술)를 하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이고, 술 담배도 하고, 거리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 파티에서 만난,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소녀 에스티(알렉사 데미 분)는 스티브에게 말한다. “너 진짜 귀엽다. 재수 없게 변하기 전의 나이 같달까?”
지난 25일 개봉한 ‘미드 90(mid90s)’은 ‘문라이트’(2016)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레이디 버드’(2018) ‘미드소마’(2019)처럼 감각도 감성도 돋보이는 작품들을 제작해 온 A24의 작품이다. ‘머니볼’(2011)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3) ‘돈 워리’(2018)의 배우 조나 힐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조나 힐은 1990년대 중반 10대였던 자신이 즐겨 스케이드보드를 타던 곳인 LA의 법원 건물 앞에서 4년에 걸쳐 각본을 썼다.
‘미드 90’은 16mm 필름 촬영과 4:3 비율의 필름화면으로 시대의 질감을, ‘소셜 네트워크’(2010) ‘버드 박스’(2018)의 음악감독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가 음악으로 시대의 양감을 키웠다. 또한 너바나, 모리세이, 마마스 앤 파파스의 명곡과 1990년대의 힙합 뮤직도 극을 넘실거린다. 특히 GZA의 ‘Liquid Swords’는 조나 힐에게 ‘어린 시절 가장 중요했던, 자신의 DNA에 들어있는, 죽을 때까지 뇌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노래’로 표현할 만큼 각별한 곡이다. 스티비와 음악이 투톱이라고 할 만큼 음악의 무게감이 큰 작품이다.
조나 힐은 인물에 빈틈없이 스며드는,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다. 자신이 연출한 ‘미드 90’에서는 배우들의 천연한 연기를 추출하는 데 그 장기가 발휘된다. 배우가 아니라 유명 스케이드 보더인 나켈 스미스와 올란 프레나트의 연기가 그 증명이다. ‘킬링 디어’(2017)의 서니 설직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거침없이 맞서는 스티비의 감정을, 성장을 총명하게 품어낸다. 긴장한 소년의 살 떨림이 스크린을 넘어 전해질 만큼.
스티비의 몸은 형 이안의 주먹세례로 얼룩덜룩한 피멍투성이다. 비록 무늬만 형일지라도 이안을 동경했던 스티비는 이안에게 없는 CD를 일일이 가려내서 생일 선물을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음악도 모른다는 핀잔이 전부다. 자신에게 필요도 없는 공룡 보드를 거저 주는 법이 없는 형이고, 거리에서 존나네에게 무시를 당하고 그 분풀이를 스티비에게 쏟아붓는 형이다. 반면 동네 형 레이는 스티비의 맹랑한 객기를 나무라지 않고, 도리어 근사한 보드를 선물한다. 그리고 온 마음이 상처투성이인 스티비에게 각별한 한마디를 툭 던진다. “살다 보면 자기 인생이 최악으로 보여. 근데 남들의 인생이 어떤지 보면 네 인생하고 바꾸기 싫을 걸.”
조나 힐은 “10대 시절, 스케이드 보드를 타면서 친구들을 만났고, 성장하고 사랑하는 법도 배웠다. 나에게는 스케이트 보드였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음악, 영화, 그림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누군가 중의 하나인 나에게는 소설이었다. 스티비처럼 혹은 조나 힐처럼 겉멋과 속멋을 동경하고, 누군가의 재능을 시새우기도 하고, 말보다 화나 눈물이 앞서기도 하고, 마냥 웃음이 터지기도 했던 그 시절에.
‘미드 90’은 소년기의 아직 마감이 덜 된, 우둘투둘한 돌기(突起)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톡톡 튀어 오르는 소년기의 빛깔이 참으로 아릿하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삼중당 문고의 책들 중에는 제목에 한자가 듬성듬성 박혀 있는 것도 있었다. 한자가 서툴러서 제목을 온전하게 읽지 못하는 순간도 있었다. 어느 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발견했다. 우선 한자가 들이밀 자리가 없는,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는 제목이라서 좋았다. 그리고 책 속에 푹 빠져들었다. 마지막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다시 첫 페이지가 읽고 싶어졌다. 마지막 문장에 도돌이표라도 표기된 것 마냥 읽고 또 읽고···. 그렇게 열네댓 번을 거듭 읽었다. 열다섯의 나는 ‘데미안’을 지극히 사랑했다.
1990년대의 미국 로스앤젤레스. 데브니(캐서린 워터스턴 분)는 맏아들 이안(루카스 헤지스 분)의 나이인 열여덟에 엄마가 되었다. 싱글맘인 그녀는 이안과 달리 13살 막내 스티비(서니 설직 분)가 한없이 어리게만 느껴진다. 동생 스티비에게 툭하면 주먹질 하는 이안은 외출하면서 으름장을 놓는다. “내 방 들어가면 죽는다.” 허나 스티비는 형의 부재를 틈타 슬금슬금 방으로 향한다. 마치 샵처럼 정리된 CD, 모자 등 형의 물건을 하나하나 새기듯 눈에 담는다.
요사이 스티비를 사로잡는 대상은 스케이드보드다. 멋들어지게 보드를 타는 동네 형들을 동경하는 스티비는 형들의 아지트인 스케이트보드 숍을 기웃거린다. 보는 이도 들썩이게 할 만큼 근사하게 보드를 타는 레이(나켈 스미스 분), 끝내주는 기술을 보면 입버릇처럼 “존나 쩌네!”라고 하는 파티광 존나네(올란 프레나트 분), 언젠가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항상 카메라와 동행하지만 머리가 4학년 수준인 4학년(라이더 맥로플린 분), 자신은 쩔지만 스티비에게 넌 멀었다고 으스대는 루벤(지오 갈리시아 분)은 스티비를 무리에 끼워 준다. ‘땡볕’이라는 별명과 함께.
형들과 어울리는 스티비는 처음 해보는 것들이 많아진다. 부모 없이 다른 사람의 차도 타보고, 지붕에서 서툰 솜씨로 알리(스케이트보드와 함께 뛰어오르는 기술)를 하다가 바닥으로 곤두박이고, 술 담배도 하고, 거리에서 잠을 청하기도 하고···. 파티에서 만난,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소녀 에스티(알렉사 데미 분)는 스티브에게 말한다. “너 진짜 귀엽다. 재수 없게 변하기 전의 나이 같달까?”
지난 25일 개봉한 ‘미드 90(mid90s)’은 ‘문라이트’(2016)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 ‘레이디 버드’(2018) ‘미드소마’(2019)처럼 감각도 감성도 돋보이는 작품들을 제작해 온 A24의 작품이다. ‘머니볼’(2011)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2013) ‘돈 워리’(2018)의 배우 조나 힐의 감독 데뷔작이기도 하다. 조나 힐은 1990년대 중반 10대였던 자신이 즐겨 스케이드보드를 타던 곳인 LA의 법원 건물 앞에서 4년에 걸쳐 각본을 썼다.
‘미드 90’은 16mm 필름 촬영과 4:3 비율의 필름화면으로 시대의 질감을, ‘소셜 네트워크’(2010) ‘버드 박스’(2018)의 음악감독 트렌트 레즈너와 애티커스 로스가 음악으로 시대의 양감을 키웠다. 또한 너바나, 모리세이, 마마스 앤 파파스의 명곡과 1990년대의 힙합 뮤직도 극을 넘실거린다. 특히 GZA의 ‘Liquid Swords’는 조나 힐에게 ‘어린 시절 가장 중요했던, 자신의 DNA에 들어있는, 죽을 때까지 뇌의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을 노래’로 표현할 만큼 각별한 곡이다. 스티비와 음악이 투톱이라고 할 만큼 음악의 무게감이 큰 작품이다.
조나 힐은 인물에 빈틈없이 스며드는,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는 배우다. 자신이 연출한 ‘미드 90’에서는 배우들의 천연한 연기를 추출하는 데 그 장기가 발휘된다. 배우가 아니라 유명 스케이드 보더인 나켈 스미스와 올란 프레나트의 연기가 그 증명이다. ‘킬링 디어’(2017)의 서니 설직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거침없이 맞서는 스티비의 감정을, 성장을 총명하게 품어낸다. 긴장한 소년의 살 떨림이 스크린을 넘어 전해질 만큼.
스티비의 몸은 형 이안의 주먹세례로 얼룩덜룩한 피멍투성이다. 비록 무늬만 형일지라도 이안을 동경했던 스티비는 이안에게 없는 CD를 일일이 가려내서 생일 선물을 하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음악도 모른다는 핀잔이 전부다. 자신에게 필요도 없는 공룡 보드를 거저 주는 법이 없는 형이고, 거리에서 존나네에게 무시를 당하고 그 분풀이를 스티비에게 쏟아붓는 형이다. 반면 동네 형 레이는 스티비의 맹랑한 객기를 나무라지 않고, 도리어 근사한 보드를 선물한다. 그리고 온 마음이 상처투성이인 스티비에게 각별한 한마디를 툭 던진다. “살다 보면 자기 인생이 최악으로 보여. 근데 남들의 인생이 어떤지 보면 네 인생하고 바꾸기 싫을 걸.”
조나 힐은 “10대 시절, 스케이드 보드를 타면서 친구들을 만났고, 성장하고 사랑하는 법도 배웠다. 나에게는 스케이트 보드였던 것이 누군가에게는 음악, 영화, 그림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누군가 중의 하나인 나에게는 소설이었다. 스티비처럼 혹은 조나 힐처럼 겉멋과 속멋을 동경하고, 누군가의 재능을 시새우기도 하고, 말보다 화나 눈물이 앞서기도 하고, 마냥 웃음이 터지기도 했던 그 시절에.
‘미드 90’은 소년기의 아직 마감이 덜 된, 우둘투둘한 돌기(突起)가 매력적인 작품이다. 톡톡 튀어 오르는 소년기의 빛깔이 참으로 아릿하다.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 텐아시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