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영화 ‘토이 스토리 4’ 스틸컷.
영화 ‘토이 스토리 4’ 스틸컷.
*이 글에는 토이 스토리 4’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적갈색 커버 30권과 파랑색 커버 30권으로 구성된 1983년판 계몽사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 어린 시절 보고 또 보고 거듭거듭 보던 동화책이다. 나에게는 성경이나 불경, 코란에 준하는 존재 가치가 있었다. 그 책들로 세상을 그리고 읽었기 때문이다. 전집 안에서도 가장 아끼는 책을 꼽자면, 5권 엘리너 파아존의 동화집 ‘보리와 임금님’이다. 동화집 안에서도 애지중지했던 ‘작은 책방’은 다섯 페이지 분량의 머리말이었다.

책으로 넘쳐나는 집에서 ‘작은 책방’은 책꽂이에서 쫓겨난 갖가지 책이 뜰의 멋대로 자란 꽃이나 잡초처럼 전혀 정리되지 않은 방이었다. 어린 소녀였던 엘리너 파아존은 해묵은 먼지 때문에 아픈 눈을 끔벅이며 그 방에서 살며시 나올 때, 머릿속에는 아직 얼룩덜룩한 금빛 먼지가 춤을 추고, 마음 한구석에는 은빛 거미줄이 남아 있었다고 했다. 어린 독자였던 나를 상상만으로도 마구 심장이 뛰게 하는 공간이었다. ‘토이스토리’에서 마주한 ‘앤디의 방’은 ‘작은 책방’처럼 심장을 뛰게 했다. 장난감 친구들의 키를 재고, 장난감 친구들과 모험 같은 놀이를 즐기던 소년 앤디의 정감 어린 방에서.

소년 앤디의 장난감에서 소녀 보니의 장난감이 된 카우보이 우디(톰 행크스 분)와 우주전사 버즈(팀 앨런 분), 카우걸 제시(조앤 쿠삭 분), 장난감 말 불스 아이, 환상의 커플 포테토헤드 부부, 돼지 저금통 햄, 소심한 육식 공룡 렉스, 스프링 강아지 슬링키, 세 눈 달린 외계인 에일리언. 앤디의 최애 장난감이었던 과거와 달리 현재 우디는 옷장 속에서 먼지가 켜켜이 쌓여갈 만큼 간택을 받지 못하는 처지다. 게다가 보니는 우디의 보안관 배지만 똑 떼서 제시에게 달기도 한다.

보니의 유치원 예비소집일. 우디는 잔뜩 주눅이 든 보니가 걱정되어서 몰래 따라간다. 다행히도 보니는 친구를 만든다. 1회용 포크 숟가락으로 직접 만든 장난감 친구다. 보니는 포키(토니 헤일 분)라고 이름도 짓고, 발바닥에는 자신의 이름도 적으며 끔찍이 사랑한다. 문제는 포키가 수프나 샐러드를 뜨고 버려지면 끝이었던 자신의 운명이 장난감으로 리부트된 것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키는 툭하면 쓰레기통으로 몸을 던진다.

보니 가족은 캠핑카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물론 보니의 장난감들도 동행한다. 캠핑카에서 포키는 급기야 달아나고, 우디는 포키를 찾으러 홀로 길을 나선다. 우디는 현재 보니에게 가장 중요한 장난감인 포키를 설득하면서 앤디와의 추억을 하나하나 털어놓는다. 우디는 카니발 기간이라는 현수막이 걸린 마을의 ‘세컨드 찬스 골동품 상점’에서 9년 전 헤어졌던 양치기 소녀 보핍(애니 파츠 분)의 램프를 발견한다. 그곳에서 소녀 인형 개비개비(크리스티나 헨드릭스 분)와 복화술 인형 벤슨 4인조를 만난다. 한편 캠핑카에서 우디를 기다리던 버즈는 마음의 소리를 따르라는 우디의 충고를 떠올리며 날아오른다.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우디의 “잘 가, 파트너”라는 대사로,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없는 이별을 고했던 ‘토이 스토리’ 시리즈가 다시금 돌아왔다. 애니메이션의 명가 픽사가 제작한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1995)는 ‘토이 스토리 2’(1999) ‘토이 스토리 3’(2010)을 거치며 픽사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 시리즈다. 지난달 20일 개봉한 ‘토이 스토리 4’ 역시 우리에게 너무도 친근한 주제곡 ‘난 너의 친구야’(You’ve Got a Friend in Me)로 시작한다. 장난감 친구를 다독이던, 아니 우리를 다독이던 우디 역 톰 행크스의 곰살가운 목소리로.

카우보이 우디, 우주전사 버즈, 카우걸 제시로 25년간 우리의 곁을 지킨 톰 행크스, 팀 앨런, 조앤 쿠삭의 목소리는 심밀(甚密)하다. 일상에서도 불쑥불쑥 어른거릴 만큼. ‘니모를 찾아서’(2003) ‘월-E’(2008)의 감독 앤드루 스탠튼은 ‘토이 스토리’ 시리즈와 함께했던 펜대를 이번에도 내려놓지 않았다. 시리즈를 아우르는 그의 각본은 이번에도 적재적소의 위트와 촉촉한 감성으로 채워졌다. 역시나 시리즈를 아우르는 랜디 뉴먼의 음악은 포근포근한 기운으로 장난감 친구들의 이야기를 품는다. ‘인사이드 아웃’(2015)의 공동 각본가였던 조시 쿨리는 ‘토이 스토리 4’의 연출을 맡으면서 어느새 장난감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된 어른들의 마음까지 헤아린다.

새로이 합류한 장난감 친구들도 눈길을 끈다. 우디처럼 1950년대 말에 제작된, 소리 상자가 있는 개비개비는 장난감들 사이에서 일명 ‘위험한 괴짜’로 통한다. 결함이 있는 모습으로 태어난 개비개비는 골동품 상점주의 외손녀 하모니만 바라본다. 소리 상자만 고치면 자신에게도 기회가 오리라 믿는다. 개비개비의 절절한 믿음은 우디의 소리 상자를 탐내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개비개비는 자신이 주인을 선택한다. 길을 잃고 울먹거리는 한 소녀를. 긴긴 세월 개비개비가 기다린 것은 함께할 친구였던 것이다.

또한 1970년대 캐나다의 위대한 스턴트맨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포즈왕에 터프한 착륙을 자랑하는 피규어 듀크 카붐(키아누 리브스 분)은 강렬한 매력으로 관객의 심장을 녹인다. 장난감과 쓰레기 사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포키, 카니발 인형뽑기용 부스의 솜인형 만담 콤비 더키(키건 마이클 키 분)와 버니(조던 필 분)는 미소부터 폭소까지 책임진다.

우디는 9년 만에 연인 같은 친구 보핍과 해후한다. 하나의 몸에 3개의 머리를 가진 양 빌리 & 고트 & 그러프와도. 골동품 상점의 선반에 앉아 인생을 허비하기 싫었던 보핍의 곁에는 함께 어울려 바깥세상을 즐기는 미니어처 기글 맥딤플즈, 하이 파이브를 좋아하는 특수 요원 3인조 컴뱃 칼이 있다. 핑크 드레스를 벗어던진 보핍은 역동적인 삶을 산다. 보핍은 팔이 떨어져도 고치면 되니까 그닥 놀라지 않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듀크 카붐에게는 지금의 네 모습으로 살아가라고 충고한다.

보핍은 다시 누군가의 장난감으로 살고 싶지 않다. 너른 세상 구경을 하고 싶은 희망이 생겼다. 그리고 그 희망이 옷장 속에만 있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고, 자신이 늙었다고 여기는 우디의 폐부를 찌른다. 결국 우디는 자신의 삶을 찾아서 무한한 공간 저 너머로 한걸음을 내딛게 된다. 역시나 이별의 순간은 저릿하다. 우디가 장난감 친구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추고, 영원한 파트너일 줄 알았던 버즈와 마지막 교감을 나누는 모습은 눈물이 핑 돈다.

우디는 포키를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핍에게 이런 말을 한다. 어둠이 무서워서 밤마다 울던 몰리가 너의 램프가 켜지면 안심했노라고. 몰리에게 네가 그러했듯, 보니에게도 포키가 필요하다고. 우디는 말이다. 절대 친구를 홀로 남겨두지 않는다. 비록 앤디가 어른이 되어서 자신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될지라도 첫정을 잊지 않는다. 우디는 스쳐가는 겉말까지 물들이는 뭉클한 속말로 우리를 웃고 울게 한다. 우디의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으로 또르륵 흘러든다.

개비개비가 앤디의 오랜 성장을 지켜본 감상을 묻자 우디는 서슴지 않고 말한다. “행복했어.” 누군가 나에게 헝겊인형 카우보이 우디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그 시간들이 어떠했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단숨에 말할 것이다.

“행복했어.”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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