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박미영 작가]
나는 대학 동기들을 만나면 20대였던 그 혹은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군가는 그런 화법을 ‘기억력 토크’라고 명명했다. 사실 기억력 토크의 중심에는 미친 기억력을 자랑하는 남자 동기도 있지만, 그와 내가 촉수를 세우는 영역은 사뭇 다르다. 나의 경우에는 그저 사람에 대한 관심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처럼 인간이 중심인 인본주의와도 거리가 있다. 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소소한 기억이 쌓여간다.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가족(万引き家族)’이다. 우리말로 풀자면, 좀도둑 가족이다. 풀썩 주저앉을 것 같은 오래된 목조 민가에 한 가족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아들에게 가르칠 것이라고는 좀도둑질밖에 없는 일용근로자 오사무(릴리 프랭키), 돈 냄새 풍기는 것으로 집어오라고 주문하는 아내 노부요(안도 사쿠라), 죽은 남편의 연금으로 살아가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 유흥업소에서 매직미러 너머의 고객을 상대하는 처제 아키(마츠오카 마유), 좀도둑질에 앞서 꼭 손가락 주문(?)을 하는 아들 쇼타(죠 카이리)가 바로 그들이다.
어느 날, 오사무 부자는 아파트 난간 복도에 있던 애처로운 소녀(사사키 미유)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소녀를 다시 아파트로 데려다주던 길에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라는 친모의 말을 듣게 된다. 노부요는 발걸음을 돌리고, 소녀에게 ‘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가족으로 품는다.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작 ‘아무도 모른다’를 떠올리게 한다. 출생신고를 안 한 탓에 세상에 존재하는 기록이 없는, 사랑에 빠진 엄마가 번번이 방치하는, 아빠만 다른 4남매의 이야기였다. 이번 작품도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전작과 다르다.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인 척했던, 그러나 가족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들은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누군가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기도 한다.
‘어느 가족’의 음악은 첫 장면부터 빼어나다. 동네 마트에서 오사무 부자가 좀도둑질을 하는 장면인데 범죄의 규모와 걸맞지 않는 미스터리한 무드의 음악으로 경쾌함을 배가시킨다. 이후에도 호소노 하루오미의 음악은 화면에 사르륵 녹아내린다. 장면에 맞는 운율을 심은 것이다.
배우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녀처럼 긴 머리로 분한 키키 키린은 현금지급기 앞에서 머릿속 말을 입으로 툭툭 내뱉는 연기를 능청스럽게 해낸다. 또 아역배우에게 따로 대본을 주지 않는 감독의 연출은 이번에도 통했다. 인물의 감정을 예습하지 않은 아역의 연기는 그 자체로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야마토야’ 잡화점의 사장님으로 분한 에모토 아키라는 아이들의 좀도둑질을 눈감아주는, 속 깊은 진짜 어른을 보여준다. 안도 사쿠라의 연기는 유달리 눈길을 끌었다. 그녀의 호방한 웃음에는 미소가 번지고, 그녀의 눈물을 지우는 손짓에는 심장이 멈칫했다.
관계 안에서도 좀 더 애틋한 조합이 있다. 애정 결핍인 아키는 유독 하츠에의 곁을 지키려 하고, 하츠에는 아키 마음의 온도를 기막히게 알아차린다. 친모에게 받은 상처를 거짓으로 둘러대던 린은 노부요의 팔에 있는 상처를 보고는 어루만진다. 오사무는 아빠가 아닌 아저씨로 돌아가겠노라며 묵직한 진심을 전하고, 쇼타는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모양으로 그 진심에 대한 답을 한다. 영화의 대사로도 나오지만 보통이 아닌 그들은 마음으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다들… 고마웠어.” 바닷가에서 하츠에가 입모양으로 했던 대사다. 이 뭉클한 한마디는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향한 대사일지도 모른다.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서로의 손을 붙잡고 뛰던 순간, 저 멀리 보이지는 않고 들리기만 하는 하나비(불꽃놀이)의 소리를 보라고 했던 순간…. 그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지지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이런 기억들을 물리고 살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음영을 가진 기억은 이따금 삐죽 얼굴을 내밀고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환상의 빛’으로 처음 만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다. 번번이, 슬금슬금 사람의 마음을 훔친다. 여러 모로 원제인 ‘좀도둑 가족’이 딱인데 무난한 제목으로 국내 개봉하는 것이 아쉽다. 오늘은 그들의 소박한 기억에 얹히고 싶다. 노부요와 쇼타가 트림을 하면서 마시던 구슬 사이다 ‘라무네’로 결정했다. 폭염으로 푹푹 찌는 날에 라무네를 마시면서 아직도 또렷한 둘의 대화를 음미해야겠다. 오늘도 소소한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질 듯싶다.
7월 2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어느 가족’의 원제는 ‘만비키가족(万引き家族)’이다. 우리말로 풀자면, 좀도둑 가족이다. 풀썩 주저앉을 것 같은 오래된 목조 민가에 한 가족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아들에게 가르칠 것이라고는 좀도둑질밖에 없는 일용근로자 오사무(릴리 프랭키), 돈 냄새 풍기는 것으로 집어오라고 주문하는 아내 노부요(안도 사쿠라), 죽은 남편의 연금으로 살아가는 할머니 하츠에(키키 키린), 유흥업소에서 매직미러 너머의 고객을 상대하는 처제 아키(마츠오카 마유), 좀도둑질에 앞서 꼭 손가락 주문(?)을 하는 아들 쇼타(죠 카이리)가 바로 그들이다.
어느 날, 오사무 부자는 아파트 난간 복도에 있던 애처로운 소녀(사사키 미유)를 집으로 데리고 온다. 소녀를 다시 아파트로 데려다주던 길에 낳고 싶어서 낳은 게 아니라는 친모의 말을 듣게 된다. 노부요는 발걸음을 돌리고, 소녀에게 ‘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가족으로 품는다.
‘어느 가족’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04년작 ‘아무도 모른다’를 떠올리게 한다. 출생신고를 안 한 탓에 세상에 존재하는 기록이 없는, 사랑에 빠진 엄마가 번번이 방치하는, 아빠만 다른 4남매의 이야기였다. 이번 작품도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지만 전작과 다르다. 가족의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인 척했던, 그러나 가족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들은 결국 뿔뿔이 흩어지고, 누군가는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기도 한다.
‘어느 가족’의 음악은 첫 장면부터 빼어나다. 동네 마트에서 오사무 부자가 좀도둑질을 하는 장면인데 범죄의 규모와 걸맞지 않는 미스터리한 무드의 음악으로 경쾌함을 배가시킨다. 이후에도 호소노 하루오미의 음악은 화면에 사르륵 녹아내린다. 장면에 맞는 운율을 심은 것이다.
배우의 연기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녀처럼 긴 머리로 분한 키키 키린은 현금지급기 앞에서 머릿속 말을 입으로 툭툭 내뱉는 연기를 능청스럽게 해낸다. 또 아역배우에게 따로 대본을 주지 않는 감독의 연출은 이번에도 통했다. 인물의 감정을 예습하지 않은 아역의 연기는 그 자체로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야마토야’ 잡화점의 사장님으로 분한 에모토 아키라는 아이들의 좀도둑질을 눈감아주는, 속 깊은 진짜 어른을 보여준다. 안도 사쿠라의 연기는 유달리 눈길을 끌었다. 그녀의 호방한 웃음에는 미소가 번지고, 그녀의 눈물을 지우는 손짓에는 심장이 멈칫했다.
관계 안에서도 좀 더 애틋한 조합이 있다. 애정 결핍인 아키는 유독 하츠에의 곁을 지키려 하고, 하츠에는 아키 마음의 온도를 기막히게 알아차린다. 친모에게 받은 상처를 거짓으로 둘러대던 린은 노부요의 팔에 있는 상처를 보고는 어루만진다. 오사무는 아빠가 아닌 아저씨로 돌아가겠노라며 묵직한 진심을 전하고, 쇼타는 차마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입모양으로 그 진심에 대한 답을 한다. 영화의 대사로도 나오지만 보통이 아닌 그들은 마음으로 이어져 있는 듯하다.
“다들… 고마웠어.” 바닷가에서 하츠에가 입모양으로 했던 대사다. 이 뭉클한 한마디는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향한 대사일지도 모른다.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서로의 손을 붙잡고 뛰던 순간, 저 멀리 보이지는 않고 들리기만 하는 하나비(불꽃놀이)의 소리를 보라고 했던 순간…. 그들은 모래알처럼 흩어지지만, 반짝반짝 빛이 나는 이런 기억들을 물리고 살아가기는 힘들 것이다. 음영을 가진 기억은 이따금 삐죽 얼굴을 내밀고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환상의 빛’으로 처음 만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그냥 돌려보내는 법이 없다. 번번이, 슬금슬금 사람의 마음을 훔친다. 여러 모로 원제인 ‘좀도둑 가족’이 딱인데 무난한 제목으로 국내 개봉하는 것이 아쉽다. 오늘은 그들의 소박한 기억에 얹히고 싶다. 노부요와 쇼타가 트림을 하면서 마시던 구슬 사이다 ‘라무네’로 결정했다. 폭염으로 푹푹 찌는 날에 라무네를 마시면서 아직도 또렷한 둘의 대화를 음미해야겠다. 오늘도 소소한 기억이 차곡차곡 쌓여질 듯싶다.
7월 26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박미영 작가 stratus@tenasia.co.kr
[박미영 영화 ‘하루’ ‘빙우’ ‘허브’, 국악뮤지컬 ‘변학도는 왜 향단에게 삐삐를 쳤는가?’, 동화 ‘꿈꾸는 초록빛 지구’ 등을 집필한 작가다.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스토리텔링 강사와 영진위의 시나리오 마켓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 텐아시아에서 영화와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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