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텐아시아=현지민 기자]
‘불륜을 주제로 하는 데다가 이것을 코미디 요소로 풀어낸다?’ 이병헌 감독은 영화 ‘바람 바람 바람’의 연출을 제안 받았을 때부터 각색을 거쳐 촬영을 시작할 때까지 숱하게 고민했다. “나에게 도전이자 모험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다.
‘바람 바람 바람’은 20년 경력을 자랑하는 바람둥이 석근(이성민)과 뒤늦게 바람의 세계에 입문한 그의 매제 봉수(신하균), SNS와 사랑에 빠진 봉수의 아내 미영(송지효) 앞에 치명적 매력의 제니(이엘)가 나타나면서 이들의 관계가 꼬이는 이야기다.
이 감독은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각색하면서 후회한 적도 있다”고 토로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불륜을 소재로 하는 만큼 이것이 조금이라도 미화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민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바람 바람 바람’은 2011년 개봉한 체코 영화 ‘희망에 빠진 남자들’을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 작품인데, 불륜이라는 상황에 충실한 원작과 달리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했다.
10. 처음엔 리메이크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나. 다시 연출을 결심한 계기가 있나?
제작사 대표님이 제안해서 원작을 봤는데 국내 정서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고사했다. 그런데 대표님이 ‘이 얘길 풀 사람은 너밖에 없다’며 다시 제안했다. 혹하는 마음에 영화를 다시 보니 영화가 설명해주지 않는 감정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이 인간들이 불륜을 저지르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졌다. 또 영화를 본 이후에 느껴지는 공허함에 대해 풀어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부정적인 소재를 코미디로 다룬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자칫하면 욕만 먹고 끝날 수 있으니까.
10. 각색하며 어떤 부분이 가장 어려웠나?
특히 제니라는 캐릭터를 만드는 게 어려웠다. 제니가 왜 봉수를 꾀려 하는지 납득이 안 되는 거다. 각색을 하다가 혼란스러워서 2주 정도 글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제니의 일생 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디서 태어났을까,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일까, 여자 중학교를 다녔을까, 남녀공학을 다녔을까, 첫사랑은 누구였을까 등 모든 것을 고민했다. 한참 헤매다 누군가 직접 자신을 찍은 초상화를 봤다. 남자친구랑 헤어질 때 치고 받고 싸웠는지 그 모습을 찍어서 걸어놨더라. 그 상황에 제니를 대입시켜서 캐릭터를 입체화시켰다.
10 배우 이엘이 어려운 캐릭터 제니를 연기했다. 결과적으로 만족하나?
촬영 전에 제니의 말투나 표정 등을 상상했지만 현장에 가면 수정할 일이 많았다. 이엘에게 다시 설명하고 수정을 요구하며 맞춰나갔다. 이엘이 캐릭터의 복잡한 감정을 알기에 내 의견에 잘 따라줬다.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으면서도 매번 다른 연기를 보여줬다.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10. 섬세한 감정에 집중한 영화라고 말했다. 코미디 요소와의 간극을 맞추는 데 고민이 있었을 것 같은데?
작정한다면 난 더 웃길 수 있다. 하지만 말투나 표정 하나로도 과잉 감정이 돼버리더라. 웃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무리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감정을 망가뜨릴 수 있는 장면이라면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10. 그럼에도 ‘이쯤에서는 관객들이 웃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장면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재밌으면서 슬픈 장면이 있다. 석근이 택시에 돌을 던지려다가 찰나에 마음을 바꾸는 장면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 안에 석근이 여러 생각을 했다는 게 느껴졌다. 뒤늦게 많은 것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신이 웃기면서도 먹먹하더라.
10. 영화에 삽입된 음악도 재미를 더하는 데 한몫했다는 평가다.
고전적인 느낌을 가미하고 싶었다. 음악 감독에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제안 받았을 땐 ‘너무 B급 아니냐’고 했는데 바버렛츠가 편곡한 걸 듣자마자 ‘바로 이거다’라고 말을 바꿨다.(웃음) 또 노래방 장면에는 비하인드가 있다. 석근과 제니가 부를 강렬한 노래가 필요했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어느 날 연출부와 노래방에 갔는데 그 중 한 녀석이 ‘레베카’를 부르는 거다. 강렬했다. 그 곡이 영화에 사용된 이유다.
10. 촬영을 꼭 제주도에서 해야 했던 이유가 있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인물들을 섬이라는 공간에 가두고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또 국내 정서와는 거리감이 있는 이야기라 이국적인 공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제주도의 겨울 이미지를 담고 싶었다. 불륜 이야기니까 차가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채꽃 피는 제주도 말고 그 이면을 담고 싶었다. 그런데 촬영이 밀려서 봄에 찍는 바람에 겨울 풍광을 많이 담진 못했다. 주변에선 ‘이럴 거면 제주도는 왜 갔느냐’고 하더라. 미안하다.(웃음)
10.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은 많지만 자극적인 노출은 없다. 의도한 건가?
처음엔 노출이 있는 성인 코미디로 기획된 영화였다. 하지만 각색 과정에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 애써서 감정에 집중한 이야기를 만들어놨는데 시각적인 것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노출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0. 영화의 결말을 두고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 의견 분분하다. 자신의 의도는?
영화의 처음과 끝에 삽입된 롤러코스터 신은 하찮은 쾌감 후에 느껴지는 공허함을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 컷이다. 이야기의 끝은 식사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밥을 먹는 건 하루에도 몇 번씩 해야 하는 일상적인 행위다. 난 인물들에게 형벌을 준다고 생각해 그 장면을 엔딩으로 담았다.
10. 불륜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주변의 우려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생각은?
이 영화가 불륜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확신과 자신이 있었다. 부정적인 걸 바로 보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고 위험하다고 피할 수도 없다. 부담은 되지만 해서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내 의도를 듣고서도 이야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다. 해석은 관객들의 몫이니까.
현지민 기자 hhyun418@tenasia.co.kr
‘바람 바람 바람’은 20년 경력을 자랑하는 바람둥이 석근(이성민)과 뒤늦게 바람의 세계에 입문한 그의 매제 봉수(신하균), SNS와 사랑에 빠진 봉수의 아내 미영(송지효) 앞에 치명적 매력의 제니(이엘)가 나타나면서 이들의 관계가 꼬이는 이야기다.
이 감독은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각색하면서 후회한 적도 있다”고 토로할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불륜을 소재로 하는 만큼 이것이 조금이라도 미화돼선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민은 영화에 고스란히 담겼다. ‘바람 바람 바람’은 2011년 개봉한 체코 영화 ‘희망에 빠진 남자들’을 원작으로 한 리메이크 작품인데, 불륜이라는 상황에 충실한 원작과 달리 인물들의 감정에 집중했다.
제작사 대표님이 제안해서 원작을 봤는데 국내 정서와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 고사했다. 그런데 대표님이 ‘이 얘길 풀 사람은 너밖에 없다’며 다시 제안했다. 혹하는 마음에 영화를 다시 보니 영화가 설명해주지 않는 감정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이 인간들이 불륜을 저지르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졌다. 또 영화를 본 이후에 느껴지는 공허함에 대해 풀어보면 재밌을 것 같았다. 하지만 부정적인 소재를 코미디로 다룬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자칫하면 욕만 먹고 끝날 수 있으니까.
10. 각색하며 어떤 부분이 가장 어려웠나?
특히 제니라는 캐릭터를 만드는 게 어려웠다. 제니가 왜 봉수를 꾀려 하는지 납득이 안 되는 거다. 각색을 하다가 혼란스러워서 2주 정도 글을 쓰지 못할 정도였다. 그래서 제니의 일생 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어디서 태어났을까, 부모님은 어떤 사람들일까, 여자 중학교를 다녔을까, 남녀공학을 다녔을까, 첫사랑은 누구였을까 등 모든 것을 고민했다. 한참 헤매다 누군가 직접 자신을 찍은 초상화를 봤다. 남자친구랑 헤어질 때 치고 받고 싸웠는지 그 모습을 찍어서 걸어놨더라. 그 상황에 제니를 대입시켜서 캐릭터를 입체화시켰다.
10 배우 이엘이 어려운 캐릭터 제니를 연기했다. 결과적으로 만족하나?
촬영 전에 제니의 말투나 표정 등을 상상했지만 현장에 가면 수정할 일이 많았다. 이엘에게 다시 설명하고 수정을 요구하며 맞춰나갔다. 이엘이 캐릭터의 복잡한 감정을 알기에 내 의견에 잘 따라줬다. 같은 장면을 여러 번 찍으면서도 매번 다른 연기를 보여줬다. 굉장히 고맙게 생각한다.
10. 섬세한 감정에 집중한 영화라고 말했다. 코미디 요소와의 간극을 맞추는 데 고민이 있었을 것 같은데?
작정한다면 난 더 웃길 수 있다. 하지만 말투나 표정 하나로도 과잉 감정이 돼버리더라. 웃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아무리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떠올라도 감정을 망가뜨릴 수 있는 장면이라면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10. 그럼에도 ‘이쯤에서는 관객들이 웃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장면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재밌으면서 슬픈 장면이 있다. 석근이 택시에 돌을 던지려다가 찰나에 마음을 바꾸는 장면이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 안에 석근이 여러 생각을 했다는 게 느껴졌다. 뒤늦게 많은 것을 깨닫고 괴로워하는 신이 웃기면서도 먹먹하더라.
고전적인 느낌을 가미하고 싶었다. 음악 감독에게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를 제안 받았을 땐 ‘너무 B급 아니냐’고 했는데 바버렛츠가 편곡한 걸 듣자마자 ‘바로 이거다’라고 말을 바꿨다.(웃음) 또 노래방 장면에는 비하인드가 있다. 석근과 제니가 부를 강렬한 노래가 필요했는데 마땅한 게 없었다. 어느 날 연출부와 노래방에 갔는데 그 중 한 녀석이 ‘레베카’를 부르는 거다. 강렬했다. 그 곡이 영화에 사용된 이유다.
10. 촬영을 꼭 제주도에서 해야 했던 이유가 있나?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인물들을 섬이라는 공간에 가두고 집중해서 들여다보고 싶었다. 또 국내 정서와는 거리감이 있는 이야기라 이국적인 공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제주도의 겨울 이미지를 담고 싶었다. 불륜 이야기니까 차가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유채꽃 피는 제주도 말고 그 이면을 담고 싶었다. 그런데 촬영이 밀려서 봄에 찍는 바람에 겨울 풍광을 많이 담진 못했다. 주변에선 ‘이럴 거면 제주도는 왜 갔느냐’고 하더라. 미안하다.(웃음)
10.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은 많지만 자극적인 노출은 없다. 의도한 건가?
처음엔 노출이 있는 성인 코미디로 기획된 영화였다. 하지만 각색 과정에서 내 생각이 바뀌었다. 애써서 감정에 집중한 이야기를 만들어놨는데 시각적인 것들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노출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0. 영화의 결말을 두고 해피엔딩이냐 새드엔딩이냐 의견 분분하다. 자신의 의도는?
영화의 처음과 끝에 삽입된 롤러코스터 신은 하찮은 쾌감 후에 느껴지는 공허함을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 컷이다. 이야기의 끝은 식사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밥을 먹는 건 하루에도 몇 번씩 해야 하는 일상적인 행위다. 난 인물들에게 형벌을 준다고 생각해 그 장면을 엔딩으로 담았다.
10. 불륜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주변의 우려가 있던 것도 사실이다. 이에 대한 생각은?
이 영화가 불륜을 미화하지 않는다는 확신과 자신이 있었다. 부정적인 걸 바로 보지 않고는 해결할 수 없고 위험하다고 피할 수도 없다. 부담은 되지만 해서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내 의도를 듣고서도 이야기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감수해야 할 일이다. 해석은 관객들의 몫이니까.
현지민 기자 hhyun418@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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