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테인먼트 전문 미디어 텐아시아가 매주 1회 ‘영평(영화평론가협회)이 추천하는 이 작품’이라는 코너명으로 영화를 소개할 예정입니다. 최근 상영 중인 영화나 곧 개봉할 영화를 영화평론가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아 선보이도록 하겠습니다. [편집자주]
사진=영화 ‘언노운걸’ 포스터 /
사진=영화 ‘언노운걸’ 포스터 /
나에게 알지 못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세계 인류는 70억이고 우리나라 인구만 해도 5천만 명이며 길에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만 따져도 부지기수다. 그러니 이십년 전쯤 어느 자리에서 한번 인사한 사람을 오늘 우연히 다시 만난다 한들 여전히 알지 못하는 사람일뿐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게 세상의 이치인데 어느 날 제니(아델 하에넬)에게 뜻하지 않은 일이 닥쳤다. ‘언노운 걸'(La fille inconnue, 다르덴 형제, 극영화, 벨기에/프랑스, 2016년, 105분)은 이렇게 시작한다.

3개월간 동네 가정의로 파견 나와 있던 그녀는 근무 마지막 주에, 그것도 진료시간이 한참 지나서 울려오는 벨소리를 들었다. 근무 시간에만 환자를 받는 게 원칙으로 지켜지는 서구사회이기에 제니에겐 문을 열어줄 의무는 없었다. 그리고 정 급했으면 한 번 더 벨을 눌렀을 게 아닌가? 장난 벨 소리였을 가능성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다음날 출근을 하는 제니에게 형사 두 사람이 찾아와 CCTV를 확인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어젯밤에 벨을 한 번(!) 눌렀던 소녀가 공사판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때부터 제니는 죽은 소녀의 그날 밤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제니의 목적은 단 한 가지, 이름도 없이 묻힌 소녀의 묘비에 이름을 적어 넣으려는 것이다.

‘언노운 걸’은 죄책감에 관한 영화다. ‘일상성’이라는 형식을 빌려 영화를 만드는 다르덴 형제는 일상에 숨어있는 심각한 주제를 끌어내 관객의 손에 안겨주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덕분에 유렵영화제에서는 이미 단골로 상을 받는 인물들로 정평이 나있고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쌓아나갔다. ‘언노운 걸’에서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법한 죄책감을 다룬다.

영화는 그리 길지 않고 사람들 간의 세세한 만남과 주인공이 거리를 걷거나 차에 탄 모습들이 주로 카메라에 잡힌다. 하지만 주인공이 걸어가고 만나고 운전하는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기에 이야기의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소녀의 모습을, 그것도 CCTV 화면에서 잠깐 본 데 불과하지만 뇌리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굵직한 무게감으로 제니를 장악한다.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면 무엇인가 해야 했다.

소녀의 죽음과 관련해 많은 사람들이 죄책감에 시달린다. 사실 다른 이들에 비교하면 제니의 죄책감은 가장 작은 축에 속한다. 소녀를 죽인 A, 그 사실을 알고 있는 B, B의 친구인 C. 제니와 함께 일했던 인턴 D, 소녀의 성(性)을 산 남자인 E, 소녀를 데려와 그에게 안겨준 아들 F. 살인자 A의 아내 G, 사건 담당 형사 H와 I, 제니를 만류하는 선배의사 J, 소녀의 언니 K 등등. 그들의 태도 역시 다양해 살인사건을 사무적으로 대하는 사람, 강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면서 합리화의 구실을 찾는 사람, 어떻게 해서든지 사건을 덮으려고 하는 사람과 그에 더해 일을 덮어야 한다면서 완력을 쓰는 사람까지 있다. 차이는 있을지언정 다들 어느 정도의 죄책감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왜 죄책감을 느낄까? 다르덴 형제는 그에 대해 분명한 답을 갖고 있다. 크던 작던 우리가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유는 “죽은 소녀가 우리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우리 구비문학에서 사또가 부임한 첫날밤에 죽어나갔다고 하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 한 좀 풀어달라고 나타난 것인데 사또들은 공포를 느껴 숨을 거두었고 마침내 현명한 사또가 등장해 귀신의 사연을 듣고 한을 풀어주었다. 그랬더니 감사의 말을 남기고 귀신은 저승으로 편히 갔다. 죄책감은 비록 살아있는 사람이 느끼지만 그 원인은 분명 죽은 사람, 아니 나아가 상처받은 사람에게 있다. 그렇게 시각을 달리하면 나를 성찰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가 무척 깊다. 그 말 한마디면 충분하다.

박태식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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